성경 본문 : 출애굽기 15:22-27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강사 : 김용훈 목사
- 열린문장로교회 원로목사
- Silk Wave Mission 국제 대표
-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M.Div)
요약:
우리 관점에서 '광야를 지날 때'라고 제목을 정했으나, 실제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 주제입니다.
광야의 필연성:
이민자로서 겪었던 젊은 시절의 고생을 겪었습니다. 본래 고생을 싫어해 '광야 없는 삶'을 기도했었지만 인생에서 고난과 광야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준비: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인생이 되려면 성경적인 구원관, 축복관, 그리고 고난관이 필요합니다.
광야를 허락하시는 목적:
훈련: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장차 받을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축복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만남: 광야는 훈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훈련자 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광야에서 누릴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적 예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더 쉬운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은 홍해의 기적을 본 지 불과 사흘 만에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다윗: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 10년의 광야 생활을 한 것은, 그의 내면에 있던 '사울'(야망 등)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욥: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은 재산이나 자녀의 회복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할 만큼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개인 간증: 제가 목회 초기에 겪었던 극심한 '광야'를 나눕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목회, 아내의 우울증, 재정적 어려움, 교인의 '보따리 싸고 가라'는 압박 속에서 매일 사임을 기도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I know (내가 안다)"라는 한 마디로 만나 주셨고, 이 만남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태도: 광야는 피할 수 없지만, 그곳을 지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을 택했고, 모세는 기도를 택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 (엘림):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으며, 우리를 위해 '엘림'(오아시스)을 미리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소망의 근거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목사님의 약점(한국 교회 경험 부족, 아내의 언어 문제)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용하셔서, 세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열린문장로교회'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마라'(쓴 물)의 불평에 머물지 마세요, "내 잔이 넘칩니다"가 우리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다음 접은글은 목사님 말씀을 가급적 그대로 스크립트로 정리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아래 '더보기'를 누르세요.
서론: 이 자리에 서기까지
미국에서 열린문 장로교회를 33년 섬기고 작년에 은퇴를 하여,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는데도 원로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작년에 다니엘 기도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엘 기도회가 어떤 기도회인지 물어보니, 어떤 분이 "목사님, 다니엘 기도회는 강사들이 주로 뜨는 사람들만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면 더 뜹니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지금 뜰 때가 아니라 비행기를 안착시켜야 할 때이기에, '내가 여기를 가야 하나' 하는 마음의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제가 지난주 호주에서 목사님들을 섬기는 사역이 있었는데, 마침 또 요청이 왔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피할 수 없게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함께 귀로 듣고 마음에 담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오늘도 예배자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영의 귀를 열어 주시고, 또 마음에 담고 살아낼 수 있는 은혜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광야가 없는 삶을 원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면서도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미소짓게 한 많은 사람의 간증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간증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풀무불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며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묵상하면 솔직하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오늘 찬양하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아마 대부분 '하나님, 저도 그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말씀을 접하며 제일 먼저 마음에 들었던 솔직한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멋있는 간증을 못 해도 좋으니, 삶에 광야가 없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고생이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 격언 중에 제일 싫어하는 말이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입니다.
저는 젊은 청소년기에 한국을 떠나, 어느덧 돌아보니 50년을 이민자로 산 것 같습니다. 처음 이민자로 살아가며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바느질도 해보고, 식당에서 접시도 닦아보고, 주유소에서 추운 시카고 겨울에 기름도 넣어보고, 마지막에는 공사판에서 페인트를 칠하는 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70년대 이민자들이 지나갔던, 크게 다르지 않은 삶입니다. 저만 유독 크게 고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부족하다 보니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지? 내 친구들은 한국에서 다 대학교 가고 즐겁게 대학 생활을 하는데, 내가 왜 한국을 떠나서 이렇게 고생해야 하지?' 그래서 고생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철이 들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싫어하고 원하지 않아도,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광야는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광야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준비
인생에 찾아올 수 있는 고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실제로 인생을 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흐뭇하게 미소 짓게 하는 인생이 되려면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성경적인 구원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받은 그 사랑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적인 축복관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것이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축복이라는 바른 축복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고난관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적인 고난관을 가지고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순간에도 성경적인 고난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려면 제일 먼저 이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바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생명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고난을 다 막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때로는 왜 우리의 삶 속에 메마른 광야와 같은 고난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합당한 사람으로, 장차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후에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루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길눈이 어두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여 물이 없는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이 있으셔서, 출애굽하고 막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3장 17절을 보면 더 좋은 길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나면 준비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의 상로, 즉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길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광야로 보내신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훈련을 감당하는 자세 1: 겸손히 인정함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광야는 하나님의 훈련의 땅입니다. 광야에서의 훈련 기간을 잘 감당하려면, "하나님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자기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고, 자기들에게는 광야의 고난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 그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 24절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그것 때문에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잘 보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지 이제 사흘밖에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고, 기적의 땅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그들이 준비되었다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되지 않았기에 불평한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광야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고난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축복을 주시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며 투정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마치 어린아이들을 키우면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손자가 넷 있는데, 항상 신발을 신으면 이상하게 왼쪽 신발을 오른발에 신습니다. 넷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도와주려 하면 싫다고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면서 매번 엉뚱하게 신발을 신습니다. 사춘기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도 아실 겁니다. 사춘기가 되면 "내 인생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참견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더 잘 압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혹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저는 20대에 예수님을 만났고, 20대 말에 아무것도 모르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회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저만 어려웠겠습니까, 저 밑에 있는 교인들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돌아보면 지금 너무 부끄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준비시키시는 그 광야의 시간이었는데, 제가 하나님께 너무 많이 떼를 쓰고 불평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하나님의 이유와 계획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대학생 때 만나고 목회자가 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그 모든 어려움의 과정들을 지나가게 하신 목적은, 저를 이민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시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이민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필요했던 정말 중요한 준비는 유명한 신학교 강의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준비는,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지나가야 했던 그 광야가, 저로 하여금 목회자로 준비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계획하신 사람들 가운데, 광야에서 고난받으며 훈련받지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그 축복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기다림의 시간도, 광야의 시간도 훨씬 길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 그가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즐겁게 목동 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기름을 부으며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차기 왕이 된 후에 1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칼을 피하며 사는 광야의 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긴 광야를 다윗의 삶 속에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진 에드워드(Gene Edwards)라는 작가가 그의 책 "새 왕 이야기 (A Tale of Three Kings)"에 이렇게 썼습니다.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다윗의 가슴속에 숨어 있었던 사울을 제거하셨다."
다윗의 가슴속 깊은 곳에도 사울 왕의 야망과 그런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10년의 광야 생활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윗의 그 가슴속에 숨어 있었던 사울 왕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을 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 자신보다도 다윗을 더 잘 아셨기에 그를 훈련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겸손히 하나님의 그 뜻을 기다릴 수 있는, 수용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광야 훈련을 감당하는 자세 2: 하나님의 때를 신뢰함
광야에서 훈련을 잘 감당하려면,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심을 인정해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때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때를 아신다", "언제가 내가 광야에서 나와야 할 때인지를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하나님, 왜 이렇게 더디 역사하십니까? 좀 더 빨리 하실 수 없습니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세밀한 음성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훈아, 너는 너의 하나님이, 네가 준비되지 않아서 더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 왜 이렇게 늦게, 느리게 역사하십니까'라고 계속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하고 싶은데 네가 준비되지 않아서 너의 하나님이 더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가 적합한 때인지를 아십니다.
광야에서 훈련되지 않고 정상에 오르면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축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은 그의 삶에 찾아온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오래전에 그런 훈련을 받고 정상에 오른 한 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유명한 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입니다. 그는 "뿌리 (Roots)"라는 작품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작가가 되기 전까지 8년 동안, 글을 써서 출판사에 가면 "이걸 글이라고 써왔느냐"며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긴 광야의 시절을 지나가며 훈련된 후에야, "뿌리"라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근원에 대한 대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성공한 후에 자기 사무실 앞에 큰 포스터를 하나 붙여 두었습니다. 그 포스터에는 아주 높은 말뚝 위에 거북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이 있었고,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말뚝에 앉지 않았다. (The turtle doesn't get up on top of a fence post by himself.)"
그는 매일 사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그 포스터를 보면서, 자기를 지금 그 자리에 서게 하신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삶의 광야가 찾아올 때, 이 자리에도 아마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급하게 나오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차지 않았는데 나의 수단으로 벗어나면, 또 다른 광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에 맡겨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소망 가운데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결코 헛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욥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 고난의 광야를 지나가며 욥기 23장 10절에서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다."
그는 소망 가운데 인내했습니다.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최선을 아십니다. 최선의 때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그 시간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기며 소망 가운데 기다릴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광야의 참된 축복: 하나님을 만나는 것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광야의 의미는 훈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훈련뿐만 아니라 훈련자 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삶에 찾아오는 광야가 축복이 되려면, 그 광야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소중한 축복은, 광야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삶에서 고난이 찾아오면 성도들이 가장 많이 묵상하는 말씀이 아마 욥기일 것 같습니다.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욥기를 읽으시고 그 질문을 해 보셨는지요?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서 재산을 다 회복해 주시고 자녀들도 많이 주신 것, 그것이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일까요? 아닙니다.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은 광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욥기 42장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옵나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광야를 지나가면, 지적으로만 알던 그 하나님을 삶의 체험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저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난 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가장 피부로 느낀 시간은 편안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제가 담임목회 초기에 너무나 긴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제가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또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내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한국말이 편하지 않고 영어가 훨씬 편한, 거의 2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잘못 만나 한국 교회 담임목사의 사모가 된 것입니다. 너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아내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습니다.
저는 또 저대로 목회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목회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거기다가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당회를 마쳤는데, 한 분이 저를 보자고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보따리 싸고 가세요. 여기 계속 있으면 내가 괴롭힐 겁니다." 그래서 그때 알았습니다. '아, 교회 안에도 조폭이 있구나.'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아주 작아서 담임목사의 사례비를 제때 줄 수도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내는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함께 동역해야 할 리더는 저에게 떠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드렸던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냥 사임하고 떠나면 안 될까요? 제가 언제 하나님께 저를 담임목사 시켜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저를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떠나면 안 될까요? 저는 목회자로 부름 받을 때, 그냥 대학생들과 즐겁게 제자 훈련하며 캠퍼스에서 지내는 것이 저의 부름인 줄 알았는데, 왜 저를 한인 지역 교회로 불러서 이렇게 힘든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까? 제가 그냥 사임하고 떠나면 안 될까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새벽에 기도를 드리는데, 주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주님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실 때는 영어로 하십니다. 그날 아침에 딱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I know.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내가 네가 지나가는 그 자리에 있어 봤다. 내가 안다."
주님이 아신다고 하시니, 환경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여전히 내 삶 속에 광야가 계속되었지만, 그 광야에서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제 아내도 그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이 평생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가게 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못 하는 사람이 한인 교회 담임목사의 사모라는 옷을 입는 것은 너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한 우울증으로 광야를 지나갔는데, 하나님이 제 아내를 만나 주셨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가 자신의 모습을 글로 남긴 것을 보니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마치 어항 속에서 살고 있는 금붕어와 같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불편해서 어항 속 돌 뒤에 숨으면, 누군가가 와서 어항을 툭툭 칠 때마다 깜짝 놀라서 다시 숨을 장소를 찾던 어항 속 금붕어와 같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그 질문을 하며 지나가는데, 주님이 만나 주시고 주신 음성이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야. 너의 아이덴티티, 너의 참 가치는 목사의 사모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생명 준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야."
그 목소리가, 그 만남이 제 아내의 삶에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광야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장소가 되면, 광야가 오히려 축복으로 변합니다.
광야에서의 선택: 불평인가, 기도인가
그런데 문제는, 삶에 찾아온 고난의 순간이 저절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는 곳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불행하게도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하나님은 만나지 못해서 삶이 오히려 더 고달파진 사람들도 종종 만나지 않습니까?
왜 이런 결과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광야를 지나가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광야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광야를 어떠한 태도로 지나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똑같은 광야, 똑같은 어려움 속에서 다른 선택을 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기도했더니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 보니, 하나님께서 이미 문제의 해결책을 바로 그 옆에 두셨습니다.
광야를 지나가면서 기도를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광야를 지나가면서 기도가 우리의 영의 눈을 뜨게 하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광야가 끝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간증을 남긴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송명희 시인입니다. 오늘 잠시 그분의 간증 시를 인용할까 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뇌성마비라는, 이 땅에서는 끝나지 않을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면서, 송명희 시인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 고백했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남이 못 본 것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기도할 수 있는 이유: 엘림과 십자가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광야에서 기도하기 위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광야를 기록하시면서 26절 하반부와 27절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세 목말라 죽을 것 같다며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먼저 가셔서 엘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는 이유는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먼저 가셔서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Future Grace (미래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음식 없이 3주를, 물 없이 3일을, 공기 없이 3분을 생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소망 없이는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잊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 오아시스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광야의 오아시스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광야가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질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이신데, 필요하다면 그 무엇을 하나님께서 아까워하시겠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합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광야 가운데서 소망하며 기도하면,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결론: 마라에서 엘림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제가 경험한 그 하나님을 여러분께 간증하며 말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가 없는 삶이 되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매일 만나와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대학교에서 주님을 만나 교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기에 기존 교회를 알지 못하는, 경험 없는 목사. 한인들을 목회하면서 한국말이 어눌한 2세 사모.
그러한 약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을 제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사용하셔서, 그 약점이 주 안에서 강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강함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약함 앞에서 무너집니다. 제가 33년 전에 처음 부임했을 때, 저희 교회 이름은 '한인정통 장로교회'였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우리는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의 약함을 통하여 '열린문 장로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났던 수많은 젊은이가 교회로 돌아오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영어를 쓰는 이민자 자녀들과 한글을 사용하는 부모 세대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가기 시작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타민족들, 멀리 가지 않아도 이미 우리 곁으로 다가온 선교지와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그 인생을 바꾸는 역사들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쓰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섬길 때마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 교회에 오면 존경받고 있다고 느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그들을 섬기지만, 저희 교회에 오면 그냥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 그런 도움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알고 그들의 외로움을 알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 주는 그 도움을 그들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떠나면 안 될까요?" 하며 절규하며 시작한 목회를 33년이 지난 후에 마무리 지을 때, 제 입술에서 흘러나온 감사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잔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제 그릇보다 크고 넘치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라'(쓴 물)의 불평에 머물지 마십시오. 여러분, '엘림'이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난을 헛되게 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엘림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솔로몬과 같이 세상의 많은 것을 가졌지만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내 그릇보다 차고 넘치게 써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는 분이 계십니까? 광야를 쓰셔서 준비하시는 그 하나님.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나를 준비시켜 주시고, 무엇보다도 이 광야가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나의 모든 고통을 아시는 그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해 주옵소서."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준비되어야 하고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 그리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1991년부터 33년간 열린문장로교회(미국 동부 버지니아 헌던 소재)를 섬기고 작년에 은퇴한 김용훈 목사입니다. 긴 이민 목회의 여정을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광야'라고 불릴 만한 힘든 시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의 캄캄한 광야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을 웃음 짓게 한 믿음의 영웅들이 많이 나옵니다. 풀무불 앞에서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다니엘 3:17-18)라고 외쳤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아, 나도 저런 믿음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 제 삶에 광야가 없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고생이 정말 싫었습니다. 70년대에 젊은 나이로 이민을 가서, 바느질 공장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안 해본 힘든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이민자들이 다 그 정도의 고생은 했지만, 저는 유독 그 고생이 싫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 쳐도, 내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 이 광야는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고난을, 이 광야를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준비되어야 합니까? 세상의 지식이나 돈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구원관으로, 성경적인 축복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적인 고난관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체험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22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놀라운 기적 뒤에 찾아온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니라, 물 한 모금 없는 '수르 광야'였고, 사흘 만에 겨우 찾은 물은 '마라'의 쓴 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광야의 시간을 지날 때, 두 가지를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첫째, 광야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삶의 고난과 광야를 다 막아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홍해를 가르신 그 능력으로, 단숨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가나안까지 직행하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이 광야로 이끄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그 엄청난 축복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전능하신 하나님이 '훈련과 준비'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기에, 그들을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은 더 정확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 길이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사람의 땅 길'이라는 더 빠르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들이 전쟁을 만나면, 겁에 질려 다시 애굽의 노예 생활로 돌아가려 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먼저 준비시키십니다. 그 준비의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의 기적을 본 지 불과 3일 만에 물이 없다고, 물이 쓰다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24절)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3일 전의 기적을 기억했다면 "하나님, 3일 전에도 길을 내셨으니 물도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대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들이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 저는 준비 다 됐습니다. 저는 고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빨리 이 광야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투정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게 손자가 넷 있는데, 어릴 때 보면 꼭 신발의 좌우를 바꿔 신습니다. "할아버지가 도와줄게" 하면 기어코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는, 결국 짝짝이로 바꿔 신습니다. 어디 손자뿐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고집부리는 사춘기 자녀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저는 20대에 예수님을 만나고 20대 끝자락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목회를 시작했으니, 저도 고생하고 교인들도 고생했습니다. 그 준비시키는 기간 동안 하나님께 어찌나 떼를 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후,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허락하신 그 힘든 이민자의 삶과 고난이, 저를 '이민 교회' 목회자로 세우시기 위한 완벽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민자의 설움과 아픔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민자들을 위로하고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그 준비는 이민의 삶 한복판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인물 중에 광야에서 단련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40년, 요셉은 13년,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에도 10년이 넘는 세월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다윗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사울을 제거하셨다."
("'God did not have to remove Saul from the throne;
He had to remove Saul from David's heart.")
<세왕 이야기>(A Tale of Three Kinga)
진 에드워드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숨어 있던 '사울 왕'을 제거하셨다고 합니다. 다윗 안에도 사울처럼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다윗보다 더 잘 아셨기에, 광야의 연단을 통해 그 속의 사울을 제거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왜 이리 더디냐고 기도하십니까? 그런 기도를 하던 저는 어느 날 이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내가 더딘 것이 아니라, 네가 준비되지 않아서, 내가 너보다 더 간절하게 네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를 아십니다.
광야에서 훈련되지 않고 정상에 오르면 그 성공은 모래성과 같아서 오래가지 못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축복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뿌리>를 쓴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유명해지기까지 8년간 수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후 자기 사무실에 거북이가 울타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포스터를 붙여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여기에 올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말뚝 위에 앉지 않았다. Anytime you see a turtle up on top of a fence post, you know he had some help."

내 힘과 내 수단으로 광야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잠시 벗어나는 듯해도 금방 또 다른 광야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소망 가운데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욥은 그 극심한 광야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하나님은 최선의 때를 아십니다. 그분께 맡기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광야를 허락하신 첫 번째 목적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라면, 두 번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광야를 만나면 많은 성도님이 성경 특히 욥기를 펴서 읽고 묵상합니다.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자녀와 재산을 두 배로 회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욥이 누린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오직 광야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모든 고난이 끝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광야라는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통해 가슴으로, 눈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아도, 제가 하나님을 가장 깊이 느꼈던 순간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형통할 때가 아니라,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고난의 때였습니다.
저는 담임목회(1991년 33세) 초기에 긴 광야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제 아내는 거의 교포 2세에 가까워서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담임목사 사모로 살아가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결국 아내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교인 중에는 노골적으로 저를 싫어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담임목사 사례비를 제때 받지 못해서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웠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하나님께 사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못하겠습니다. 이 짐을 내려놓게 해 주세요." 그렇게 울부짖던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가 아니었습니다. 딱 한마디였습니다. "I know." (내가 안다.)
"용훈아,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네 아내의 고통을 안다. 너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안다. 내가 다 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제 영혼에 놀라운 평강이 밀려왔습니다. 환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광야는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저를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광야 한복판에서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제 아내에게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늘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 같다.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이 싫다"라고 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아내가 받은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목사의 아내가 아니라, 내 사랑하는 딸이다." 이 정체성의 자각,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아내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고난의 시간이 저절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광야를 지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광야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24절)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25절)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모세가 기도했더니 갑자기 없던 나무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해결책인 '한 나무'를 바로 그 옆에 준비해 두셨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그의 영의 눈이 열렸고,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해결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를 지날 때 기도의 자리를 선택하십시오. 원망과 불평 대신 부르짖기를 선택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고, 이미 우리 곁에 준비해 두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뇌성마비라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던 송명희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에 '나'라는 제목의 찬양시를 통해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나 남이 없는 것 가졌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오늘 광야를 지나는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 엘림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광야에서 기도하기 위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26절과 27절입니다.
26절: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의 쓴 물 앞에서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기 전에 이미 그들을 위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풍성한 쉼터를 예비하시고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미래에 필요한 은혜까지도 미리 준비하시는 'Future Grace(미래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소망이 없으면 단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광야에서 버틸 수 있는 '오아시스'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궁극의 오아시스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외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가장 귀한 아들까지도 나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광야에서 물 한 모금, 나무 한 그루를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면,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주님을 만났기에 기성 교회의 신앙 경험이 없었습니다. 제 아내는 한국말이 서툴렀습니다. 모든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 교회 이름이 '한인 정통 장로교회'였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경직되어 있습니까? 절대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의 그 약함을 통해, 아내의 그 약함을 통해, 그 보수적인 교회를 '열린문 장로교회'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은퇴하는 날, 저는 감히 다윗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엘림이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가셔서 그곳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저 크고 화려한 그릇이 되기를 열망하기보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나의 그릇일지라도, 그 작은 그릇을 들어 내 잔이 넘치도록 채우시고 크게 써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복된 인생,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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