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2.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시 119:71)
강사 : 박상원 선교사
현) 아프리카대륙선교회 운영이사
현) 에스와티니(eSwatini 구 스와질란드. 작년에 국명 변경. AIDS발병율 세계 최고. 남아공에 종속적인 인구 114만의 소국. 일부다처제) 이시드라 성실고아학교 후원 회장
현) 아프리카 원주민 선교사
[참고] 박상원 선교사는 김종양 선교사의 아내이며 동역자다. 김종양 선교사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김종양 선교사 △1946년 전북 출생 △1985년 독일 베뢰아 신학교와 영국 웨일스 신학대학 졸업 △1985년 10월 병원선교회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세계선교회에서 파송받아 말라위 사역 시작 △1986년에 아프리카대륙선교회를 설립해 말라위 스와질란드 등 중남부 아프리카 7개국에 교회 고아원 병원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신학교 선교농장 기도원 기독의과대학 설립 △1987년 미국 남침례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 받고 1988년 6월 선교지를 스와질란드로 옮김.)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의 시간]
나는 아프리카에서 34년째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불교신자)을 만나 세상적으로는 재미있게 살았고 살 수 있었다.
결혼한 지 6개월이 되던 1976년 3월에 남편이 늦은 나이에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국비장학생으로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나는 한국에 남아서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 동안 남편은 독일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매주 보내는 편지로 나를 전도해서 나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 계획했던 1년이 지나고도 아주 오랫동안 남편은 한국에 오지 않더니, 국비지원 교육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영어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가서 또 신학을 공부하며 선교사 파송 준비를 했다.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한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너무 낙심이 되어 철야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남편이 목회가 아닌 원래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했고, 시아버지께 남편을 말려달라고 간청도 했다.
그러던 중, 1984년에 유학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귀국했는데 아프리카로 가서 살 것 같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강하게 반대를 했고 남편이 아무 말이 없어서 설득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개월 후에 영국으로 돌아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반송되더니, 한참 후에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남편의 편지가 왔다.
말라위는 '아프리카의 알프스'라고 사람들이 부를 정도로 아름답다며 남편이 여러 달 동안 편지를 보내며 강력 초청을 해서 준비를 하고 어느덧 초등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다. 그 때는 국제선 비행기는 첫경험이었는데 초행길이기도 했지만 남편이 구입해서 보낸 비행기표는 가장 가격이 싼 비행기표여서 아프리카를 가기까지 일주일이나 걸렸다. 심지어 왕복도 아닌 편도 비행기표였다. 영국에서 아프리카행 비행기로의 환승을 며칠 동안 기다리던 중에, 함께 기도해준 다른 전도사님 말씀이 '김종양 선교사님은 (돈이 없어서 잼도 바르지 못하고) 마른 빵만 먹고 산다'고 얘기했으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1986년 (남편이 처음 유학을 떠난 지 10년 후)에 말라위에 도착했는데,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이 불과 1년여 만에 너무 새카맣게 타고 비쩍 말라서 아들과 나는 남편을 알아볼 수 조차 없었다. 그날 저녁에 잠자리에서 보니 남편이 너무 야위고 가난해서 허리가 가늘어져 혁대를 조이는 구멍이 6개나 새로 뚫어져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한숨도 못 자고 날이 밝았고 남편이 지난 1년 동안 사역했다는 곳으로 갔는데, 원주민 목사님들은 뛸듯이 좋아하며 껴안아 주었지만 그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게는 무척 힘들기만 했다. 숙소에는 도마뱀과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그런 열악한 곳을 남편은 '아프리카의 알프스'라고 속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 숙소마저 아프리카 원주민 집사님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이었다. 집도 방도 없이 더부살이 해야하는, 내 기대와는 너무 다른 그 상황 속에서 나는 한동안 실어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말라위에 도착한 후 2개월 동안 남편이 혼자 사역을 나가면 나와 아들은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리고 주일에만 겨우 가족이 함께 외출을 했다.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남편은 그것도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돈으로 허름하지만 우리 가족이 단독 살림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
그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다가도 교회당에만 가면 마음이 녹아내렸다. 무척 어려운 형편 속에서 살지만 뜨거운 믿음을 유지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성도들의 믿음 생활 때문이었다. 남편과는 자주 다투는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우리 가족이 먹을 것도 부족한데 성도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음식을 동내는 것이었다. 사연인 즉, 남편이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모두 우리집으로 오라'고 초청 광고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원주민들이 성도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머물렀기 때문에 나는 너무 힘이 들어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다. 주일에는 가게도 모두 문을 닫아 새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어 바나나만 겨우 먹고 자리에 누우면 눈물만 흘렀다. '엄마, 배고파...'라는 아들의 소리를 들으면 모든 은혜가 사라지는 힘들고 강퍅한 삶을 살고 있었다. 독일 선교사에서 파송 받아 온 한국인 물리치료사 부부와의 교제도 있었는데, 그들의 삶의 수준은 우리와는 달리 진정한 알프스처럼 보였다. 그들 집의 냉장고에 수북히 쌓인 계란과 우유를 보니 욕심이 생겨났고 그날은 남편과 밤새도록 싸웠다. 그날부터 남편은 나를 피해 다녔다. 그렇게 힘든 날들을 보내는 중에도 뜻하지 않게 원주민 사역자들이 모아서 보내준 80개의 계란을 받는 기쁜 일도 있었다.
[고난의 유익, 주의 율례를 배우다]
가난이 싫어서 불평만 하며 살던 중에 나는 황달과 말라리아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없던 나였으나, 그 고통 중에서 울며 기도하던 중에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
'사랑하는 내 딸아...'하는 음성을 들었고 내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하고 불렀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내 딸아~'하고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아프리카로 불렀고 사랑한다고 하시며, 내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동안 저지른 내 잘못들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원주민 성도들을 위해 밥을 지은 후에 배고파 하는 아들을 주기 위해 밥을 떠서 감추는 내 모습을 보여 주셨고, 원주민 아이들에게는 빵을 얇게 썰어주고 내 아들을 위해서는 두껍게 썰었던 죄가 드러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을 사랑해서 여러 잘못을 저질렀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서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너무 괴로워서 밤이 새도록 회개 기도를 하던 중에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일어난 남편의 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울며 남편에게 용서를 구했고 나는 그로부터 거듭나고 완전히 달라졌다. 환경은 그대로였지만 내가 달라진 것이었다. 예전처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감사한데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병원에서 준 황달과 말라리아 약들을 모두 버리고 100일 동안 2끼를 금식하며 한 끼만 먹고 철야기도를 했다. 그리고 찾아간 의사는 내가 죽은 줄 알았다며 무척 놀라며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황달과 말라리아가 모두 치유되었다는 것이었다.(할렐루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지만 우리는 그 후로도 계속 가난했다. 가난을 너무 힘들어하던 아들과 나를 남편이 안아주며 위로하고 혼자 방에 들어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을 부르는데 예전과는 달리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미의 마음으로, 가난에 찌든 아들에게는 '선교사는 되지 말라'고 했고 아들도 결단코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했으나, 아들(김모세 목사)이 성장해서는 스스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했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다. 알프스는 스위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병 고침의 은혜를 체험한 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로 서원하고 남편 김종양 선교사를 돕는 배필로, 함께 동역하는 선교사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토록 가난했던 우리 선교사 부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병원이 없던 스와질란드에 최초의 의과대학을 세우고 있다. ‘스와질란드기독대학교(SCU)'는 전체 인구의 약 39%인 22만 명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죽어가는 이 나라에서 의과대학의 설립은 생명의 구명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종교인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버겁고 힘든가?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달라져 보이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모두가 듣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사건이 나를 향한 사랑으로 다가오기를 축복한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이번 기도회를 통해 그저 교회를 다니기만 하던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부담이 되지 않고 감격이 되고 기쁨이 되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는 것도 죄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면 우리가 끊어버리지 못한 옛사람의 습성도 끊어낼 수 있고 두려움도 몰아낼 수 있으며 평안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오늘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되 숨겨진 우리의 죄악을 먼저 회개하자.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할 수 있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가족 중에 치유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자.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셨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이미) 나음을 입었다.
-----------------+-------
아래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추가적인 내용입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간략히 말씀한 부분들의 상세 내용이 있어 공유합니다.
개미 섞인 식빵과 염소고기
“엔지니어 교육을 받기 위해 독일에 갔다가 한국병원선교회 소속 파독 간호사들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먼 타지에서 외롭고 쓸쓸했던 국비 장학생은 처음 드린 예배에서 커다란 은혜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선교회 사역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미국인 독일 선교사였던 브라이스 목사가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세상에 기술자는 얼마든지 있지만 선교사는 정말 부족하니 신학을 해서 선교사를 하라는 권유였습니다.”
이렇게 뒤늦게 신학의 길에 뛰어든 김종양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미국 남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났다. 1985년, 39세의 뒤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후원단체였던 파독 간호사회에서는 간사의 실수로 3개월이 지나도록 후원금을 단 한 푼도 보내주질 않았다. 지낼 곳이 없었던 김 선교사는 원주민 성도의 가정집에서 개미 섞인 식빵과 염소고기 한두 조각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남편의 연락을 받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말이 원주민 가정집이지 빈민촌도 그런 빈민촌이 없었습니다. 들끓는 모기떼와 도마뱀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에서도 남편은 사역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든 생활 때문에 결국 실어증에 걸렸습니다. 체격이 좋았던 남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아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에 버짐이 피고 다리는 원주민 아이들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었습니다.”
새벽녘의 목소리
남편에게는 이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했지만, 아내로서는 그렇게 담담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아쉬운 것 없이 잘 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선교사가 된 남편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프리카로 가족을 불렀다. 그런데 그곳은 가난과 고통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우유 한 컵, 계란 한 알을 먹지 못해 다리가 망가지는 땅이었다. 당연히 아내의 고통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남편과 밤새도록 싸웠습니다. 교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결국 황달병과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약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피골이 상접해서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병원에서조차 포기를 하고 그냥 집에서 쉬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왔는데 너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병들고 지친 몸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지만 남편인 김 선교사는 알지 못했다. 늘 과도한 사역으로 지쳐있던 김 선교사는 잠을 잘 때면 기절하듯 쓰러졌다가 아침이면 간신히 눈을 뜨는 상태였다. 밖으로 나온 박상원 선교사는 눈물을 쏟았다. 한숨과 푸념을 쏟아놓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던 박 선교사의 귀에 어떤 한 음성이 들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잠시 기절을 했는데,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프리카로 불렀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음성은 이어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먼저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이 부끄러웠던 나의 지난날의 모습들이 한줄기 빛 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도저히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적의 시간
그런 박 선교사를 툭툭 친 사람은 남편인 김 선교사였다. 우연히 잠이 깬 김 선교사가 박 선교사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다 울기를 반복하는 박 선교사를 발견한 것이었다.
“남편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황달병과 말라리아 약을 다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죽어도 감사, 살아도 감사였습니다. 그날 밤 과거의 나는 죽고 온전히 거듭난 나만 남았습니다. 백일 동안 철야를 하며 하루 한 끼만 먹었습니다.”
아마도 상식적이라면 죽었어야 했을 것이다. 황달병과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이 모든 약을 끊고 백일 동안 철야를 하며 하루 두 끼를 금식했으니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선교사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몸이 가벼워지면서 힘이 생겼다. 가슴은 온통 감사와 은혜로 흘러넘쳤다. 인도인이었던 담당의사는 몇 달 만에 검진을 받으러 간 박 선교사를 보고는 아직도 안 죽었느냐며 깜짝 놀랐다. 검진 결과는 완치였다. 기적이었다!
회심의 섬광
엔지니어였던 한 선교사와 철없이 남편을 따라나섰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또 한 선교사는 그렇게 아프리카를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는 복음과 빵을 필요로 했지만 복음과 빵 못지않게 보건과 교육을 필요로 했다. 부부는 이를 위해 아프리카대륙선교회(ACM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들이 28년간 아프리카에서 한 일은 중앙과 남부 아프리카 7개국에 500여 개의 교회와 신학교, 기도원을 세운 일이다. 동시에 전쟁과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겪은 박해와 시련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김 선교사는 ‘한국에서 온 목회자가 어린아이의 피로 성찬식을 한다’는 한 사교집단의 음해로 추방 위기에 몰리기도 하고, 풍토병과 폐병, 심장병으로 생과 사의 기로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선교지로 가다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야말로 오직 주님 손에 이끌려 죽음의 아골 골짝으로 돌진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런 김 선교사에게 2009년 주어진 언더우드 상은 한국교회가 준 작은 위로이자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제 두 선교사 부부는 SCU 개교와 함께 새롭고 원대한 의료 선교의 비전을 꿈꾸고 있다. 세계 최고의 AIDS 발병 국가에 세운 최초의 의과대학은 스와질란드 의사들을 양성함으로써 이 나라에 새로운 빛을 가져올 것이다. 그 빛은 외롭고 고단했던 한 엔지니어의 가슴에 한 순간 ‘번쩍’하고 피어났던 회심의 섬광, 그 작은 불꽃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복음의 파도로 온 아프리카 대륙에 물결쳐나갈 것이다.
------+---------
에스와티니(구 스와질란드) 최대 일간지 ‘타임즈 오브 스와질란드(Times of Swaziland)’가 최근 한국인 김종양 선교사를 한 면에 걸쳐 크게 보도했다. 김 선교사는 내년 개강을 목표로 에스와티니 첫 의과대학인 ‘에스와티니 기독 의과대학(EMCU)’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김 선교사는 인터뷰에서 “에스와티니의 모든 국민이 의료혜택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1일 대학 사무실에서 티메오티 시멜라니 기자가 진행했다.
신문은 김 선교사가 1988년 에스와티니에 온 이후부터 국민에게 교육, 의학, 영적인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선교사는 아프리카 8개국에 600곳 이상의 교회를 설립했고 100여 명의 고아를 돌보며 아프리카에 많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1946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얼마 후 아프리카 선교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1985년에 말라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아프리카 대륙 선교회(Africa Continent Mission) 만들어 사역을 시작했다. 미국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아 박상원 사모와 두 자녀인 아들과 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두 자녀도 한국과 캐나다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난 1976년 김 선교사는 엔지니어의 꿈을 키우고자 독일로 갔지만, 미국인 선교사 브라이스 목사를 통해 선교사역에 눈 돌려 영국 웨일스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의 삶을 걷기로 결심한다.
김 선교사는 신학교 졸업 후 아프리카의 말라위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지만, 파송 후원단체로부터 3개월 동안 선교활동비를 받지 못하고 맨 땅에 헤딩 식의 선교활동을 하게 됐다.
그 뿐 아니라 스와질란드에서는 의과대학 설립과정 중 현지 정부의 약속 불이행으로 약속된 운영비 지원이 취소될 어려움에 처했으며, 스와질란드 현지 국영방송에서 어린이 피로 성찬을 한다는 허위 보도에 경악하기도 했다.
---------------------------+-----------
아프리카 대륙선교회 김종양 선교사의 드라마 - 기술자의 꿈 키워 독일로, 미국인 브라이스 목사를 통해 선교사로 방향 전환
김 선교사는 지난 1976년 독일어 학원에서 만난 브라이스목사로부터 “신학공부 해서 선교사가 되세요. 세상에 전문 엔지니어는 얼마든지 있지만 선교사는 부족합니다.”라고 취약한 선교실태를 들었다. 당시 김 선교사는 최고의 기술을 배워 성공한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독일에서 연수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종교와 무관했던 김 선교사는 한국병원선교회 소속 파독 간호사들의 전도로 처음 복음을 접했다. 김 선교사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국병원선교회 수련회에 참석한 뒤 삶의 전환점을 찾아, 병원선교회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스목사는 김 선교사의 헌신과 열정을 보고 선교사 될 것을 권유했다. 이후 김 선교사는 독일 신학교에 진학, 아프리카를 선교지로 정하고 영국 웨일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김 선교사는 영국 웨일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하나님의 성회 세계선교회와 병원선교회의 파송 받아 지난 1985년 11월에 선교지인 말라위로 떠났다.
---------------+-------------
아프리카 대륙선교회 김종양 선교사의 드라마 - 말라위에서 첫 선교활동 시작, 병원선교회 회계담당 실수로 3개월 동안 선교비 못 받아
김 선교사는 말라위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해프닝처럼 주신 시련을 경험했다.
김 선교사는 말라위 선교활동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나도록 선교활동비를 받지 못해 빈민촌의 원주민 집사 가정에 머물게 됐는데 집사 가정에서 원주민가족과 함께 기거하는데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원주민 집사의 집에는 밤마다 모기 때가 달려들었고 바퀴벌레와 도마뱀이 온 방을 기어 다녔으며 음악 마니아들이었던 말라위 사람들은 깊은 밤에도 카세트를 고음으로 틀어대 김 선교사는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라위의 음식문화는 한국의 음식문화와는 다르게 손으로 밥을 먹는 음식문화다. 김 선교사는 항상 손을 씻고 밥을 먹었다. 하지만,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여럿이 모두 손을 씻는 습관으로 때로는 다른 사람이 먼저 씻은 물에 손을 씻어야 한다. 그래서 이미 물이 더러워졌어도 그 물에 씻은 손으로 밥을 먹어야만 했다.
김 선교사는 한 집에 살면서 자신의 심경을 알았던 원주민 집사의 위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처음 깨달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활동에 전심을 다했다. 김 선교사는 복음과 기도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말라위 사람들이 치료받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 속에도 김 선교사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물질이 부족했으며 몸은 점차 허약해지는 가운데 체력적인 한계를 경험하게 됐다. 김 선교사는 생활비가 없어서 더 이상 선교 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극심한 궁핍 가운데서 하나님께 선전포고 하듯 부르짖었다.
“이제 얼마 후면 제가 이곳에 온 지 100일이 됩니다. 만일 100일 안에 약속된 선교비를 보내주시면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아프리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도 선교비를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말라위를 떠나겠습니다. 만일 제가 아프리카를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또한 저에게도 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김 선교사는 말라위 선교생활 99일째가 되는 날에도 사서함을 확인해봤으나, 선교활동비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결국 김 선교사는 100일째 되는 아침에 오늘도 우편함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면 아프리카를 떠나겠다고 다짐하면서 사서함을 열어봤다.
그런데 바로 김 선교사가 떠나던 날 독일병원선교회에서 보내 온 500달러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김 선교사는 자신의 수표가 아닌 잘못 보내진 수표라 생각하며 우체국 직원에게 문의했다. 하지만 우체국 직원은 김 선교사 앞으로 보내온 수표 두 장이 더 있다며 500달러 수표 2장을 건네줬다.
상황을 알아보니, 병원선교회 회계담당자에게 사서함 번호가 잘못 전달됐고 독일에서 보낸 선교비가 3개월간 다른 사서함으로 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프닝으로 같은 상황에서 김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과 환경이 모두 그 분의 세밀한 계획안에 있음을 믿고 감사하며 더 열심히 선교 활동에 전념했다.
김 선교사는 말라위에서 아프리카 대륙선교회를 창설했고 원주민 목사와 함께 섬기던 60여명이 모이던 작은 원주민교회는 2년 만에 4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으며 말라위의 여러 지방에 30여 교회를 개척했다.
'Jesus Christ > 다니엘 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세19. Day 5. 기도자에게 주시는 3가지 선물 (왕상 18:41-46) (0) | 2019.11.06 |
---|---|
단세19. Day 4.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편 3:3~5) (0) | 2019.11.05 |
단세19. Day 3. 마침내 정신이 들었다 (사도행전 26:25) (0) | 2019.11.03 |
단세19. Day 1. 영적 기념비를 세우라 (여호수아 4:1~9) (0) | 2019.11.01 |
단세18. Day20. 하나님의 영광 (고린도후서 4:3~6) 김명선 간사 (2) | 2018.11.20 |
단세18. Day19.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사야 61:1~3) 헬렌 김 선교사 (0) | 2018.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