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福音)은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Gospel(God + Spell(뉴스))'이고,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좋은 소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 또는 천국에 관한 기쁘고 복된 소식이며 소리입니다.
이 복음서는 지금은 책이지만, 원래 책으로 써진 것은 눈으로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낭독자에 의해 읽힌 것이 청중의 귀에 들려지기 위한 것이라는 포인트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모나 D 후커'라는 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이 책들(신약성경의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서)이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활자로 인쇄된 글에 너무 익숙해서 신문이나 잡지가 없던 세상, 컴퓨터의 문서 작성 프로그램이 아니라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야 했던 세상, 단어 하나하나를 베끼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사본 한 권이 완성되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을 듣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살던 세상 또한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 세계에서 책은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몇몇 사람만이 책을 소유하던 시절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복음서 한 권을 베껴 갖게 되었다면 그 책을 보물로 여겼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 쓰였습니다. 후에 복음서들의 사본은 다른 지역, 다른 도시에 자리한 그리스도교 모임을 위해 만들어졌고 전해졌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배드리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그들은 낭독되는 복음서를 들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 놓인 커다란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p.15
복음서를 낭독용으로 번역한 성경책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낭독을 위한 대본으로서의 글은 문장의 호흡이 문어체보다 훨씬 짧을 것 같습니다. 후커 저자의 책 저술 목적처럼, 도입부(prologue)의 중요성과 마지막 (epilogue) 부분의 수미쌍관 등도 중요할 것 같아서 기억이 남아 있는 동안에 모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그저 녹음으로 듣기만 해서 초대교회의 그 효과가 살아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냥 문장으로 생각해서 번역했을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예수님에 대한 네 복음서를 모두 읽어, 아니 들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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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성(有聲) 영화를 거쳐 '동시 녹음'을 강조하는 영화와 함께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절에 유소년기를 보냈지만, 여전히 무성 영화와 변사(辯士)의 내용 설명을 위한 구성진 목소리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라디오 드라마(연속극)의 인기도 대단해서 '광복 20년'과 같은 성인 드라마뿐만 아니라, 소년 극장 '손오공'과 같은 드라마는 매일 15분(오후 6:45~7:00) 밖에 방송하지 않았지만 인기가 대단해서 '손오공 역의 성우 박영남 님의 성별'을 묻는 퀴즈에 누나들과 함께 엽서 응모하고 당첨되기를 기다리던 기억도 있습니다.
손오공이 주문을 외우면 여의봉이 늘어나고 동물이 변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습니다. 복음서도 그렇게 들어보면 참좋을 것 같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의 내레이션을 통해 귀로 듣고 상상으로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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