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김 마라나타 선교사
- 중동아랍권 선교사 (2007년-현재)
- 마라나타 프론티어스 미션 대표
- 영화 「순종」 주인공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로 격려하자.
나는 레바논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 마라나타 선교사이다. 내 아내 이름은 손 아멘이다. 우리 부부의 이름이 마라나타와 아멘이듯이,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에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마라나타'에 대해서 신부된 성도의 반응은 '아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다. 딸 셋과 막내아들이 있는데, 네 아이의 출생지는 사역지에 따라 각각 다르다. 결혼 후 선교 사역지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레바논 국경의 '자흘레'라는 곳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고 있다.
모태신앙, 하나님을 떠나 살다 돌아와 선교사가 되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동생 중의 하나가 '다운 증후군'(염색체 이상 질환으로 전형적 얼굴 모양을 가지며 지능 저하가 있고 감염성 질환에 잘 걸림)을 앓고 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나는 자라면서 그 동생으로 인해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다른 진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에서 나를 만족시키는 진리는 찾을 수 없었기에 그 공허함으로 인해 폭음을 하다 보니 마치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한 '친구의 친구'로부터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짧은 신앙고백을 듣고, 이것이 진리이며 인생의 빛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따라 다시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만 예배마다 가장 먼저 가서 가장 앞자리에서 가장 큰 소리로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나를 만나주셨다. 그동안 교회를 떠나 산 것에 대해 예수님께 혼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나를 따뜻함으로 안아주시며 오래 기다렸다고 하셨다. 그 따뜻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서너 시간을 뒹굴며 울었다. 예수님은 다운 증후군을 앓는 내 동생을 나보다도 예수님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다. 동생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동생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동생을 낫게 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 훨씬 소중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동생과 함께 서로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내 인생은 변화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너무 행복해서 날마다 춤을 추고 소리 지르며 찬양하며 다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또 다른 공허함이 나를 찾아왔다. 이제 예수님을 위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생기는 공허였다. 내 인생에 대한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비전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서 젊은이들이여, 조금 늦게 가도 괜찮다. 막연한 두려움과 조급함으로 정신없이 빨리 가려고만 하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말씀해주시기를 구하는 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님께 여쭤보니 '선교'라고 하셨다. 그래서 필리핀으로 단기 선교를 갔는데, 그곳 선교사님의 모습이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원래 목사님이나 선교사님과 같은 목회자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생활에 자유도 없고 하나님께만 얽매여 사는 것 같아서 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하나님도 잘 섬기고 싶은 혼합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본 선교사님의 모습이 불쌍하기보다는 너무 당당하고 멋있어 보여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귀국 후에 목숨을 걸고 비전을 주시기를 기도할 때, 마지막 순간에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장면과 말씀을 내게 응답으로 주셨다. 목사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풀어 주셨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 너무 두렵기도 했지만, 또 감당할 수 없는 기쁨도 함께 있었다. 그 두려움 속에서 '시 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가운데 높임을 받으리라.' 말씀을 응답으로 받았다. 그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선교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 여러 해를 선교 사역을 하는 중에 때로는 여러 해동안 열매를 맺지 못해서 지칠 때도 있지만, 낙심될 때마다 이 말씀이 내게 위로를 주고 믿음을 회복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심을 믿어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자.
대학을 휴학하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선교를 갔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국가들을 선교하기 위해 러시아를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던 중에, 2003년에 이라크 전쟁(미국 911 이후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시작하여 2011년까지 지속됨)이 발발하면서 러시아가 아닌, 중동으로 선교를 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아래 말씀을 응답으로 받아 마치 초상집과 같은 이라크로 들어갔다. (전도서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2003년 8월의 전쟁 이후에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반응하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순종하며 이라크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 후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라크가 아닌, 요르단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요르단에서 난민촌에 살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섬겼다. 그 후, 이라크에서의 1년을 거쳐 지금은 레바논에서 10년째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고 있다.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을 섬기다
레바논, 중동의 스위스, 그곳의 시리아 난민들
레바논은 인구 677만에, 경기도 크기의 작은 나라인데 레바논은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가나안 땅의 일부이다. 나는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레바논 국경의 '자흘레'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레바논이 위험한 중동 지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레바논은 '중동의 스위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땅이다. 레바논에는 해발 3000m 되는 산이 많다. 우리 집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눈 쌓인 헐몬 산이 보인다. 오히려 레바논에 있는 우리 난민 친구들이 내가 한국에 올 때마다 위험한 곳으로 간다고 걱정해 준다. 레바논에는 3500년 된 백향목(이름 뜻-하나님의 나무)도 있는 좋은 곳이다.
시리아 내전과 난민
시리아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주변 국가 및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슬픈 상황을 갖고 있다.
(2011년 실업률과 부정부패, 정치 억압에 항거한 평화적 시위가 시작된 후 군사 세력의 개입에 의한 폭력 유혈 상태, IS무장 세력의 가담,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 등이 얽혀 심각한 내전으로 커졌고, 병원/학교 등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어 시리아와 레바논을 비롯한 주변 국가로 수백만의 난민들이 피난함)
난민촌의 어린이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이 되어가고 있어서, 우리는 난민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 모든 어린이들은 특별하다. 그들은 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한국동란 이후 어려웠던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복 주셨듯이 시리아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레바논도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다.
선교는 특권이다.
나는 레바논 난민촌에서 고생을 하거나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비전을 나눠주시고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며 선교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왜 특권인가? 그곳에, 그 일에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로를 시리아 친구들에게서 보고 얻게 된다. 300명의 어린이들이 내가 학교에 가면 내게 뛰어 오고, 나를 위해 울어주며 서울에 오면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로 인해 내가 무엇을 그들에게 주기보다는 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 난민촌의 어린이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크게 감사하며, 아침마다 꽃을 꺾어다 주며 사랑을 베푼다.
국가부도 레바논, 그곳의 난민촌....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
레바논은 2020년 베이루트 폭발 이후에 거의 국가부도의 상황에 있다.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1500불이던 공무원의 월급이 70불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민생이 파탄 나서 청년들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고 있다. 하물며 그 안에 있는 난민촌의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어렵다. 레바논에서는 난민들을 추방시키려 하고 시리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유럽으로 가는 길도 막혀 버려 이쪽도 저쪽도 모두 소망이 없는 난민촌의 상황이다.
난민촌의 한국식 뜨거운 기도가 출구가 되었다
'야~랍, 야~랍, 야~랍!' 우리말로 '주여, 주여, 주여'다.('야~'는 아랍어에서 호격呼格 기능을 한다. 예수님을 부를 때는 야~예쑤아, 성령님은 야~루흐알라.) 이렇게 주여 3창을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한국식인데, 레바논의 난민촌에서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 한국의 뜨거운 기도를 배워 기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기도가 무너지면 세계 선교도 어려워진다. 레바논과 난민촌의 청년들이 소망이 없으니 한류 대중문화에 목숨을 건다. 한류가 선교의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 레바논이 중동에서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인데, 중동 사람들은 요즘 특히 한국 사람들의 외모를 부러워해서, 코가 높고 눈이 큰 중동 사람들이 한국 사람처럼 코를 낮추고 눈을 작게 하는 성형 수술을 하고 싶어 한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이것은 청년들을 향하신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청년'은 육체의 나이가 아니다.
중동의 기후로 비추어 볼 때 '새벽이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슬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아 강우량이 매우 적은 그곳이지만, 일교차가 심한 사막에서 새벽에 내리는 작은 이슬을 머금고 풀과 수백 년 된 백향목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벽이슬은 '척박함 속에서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그 야성'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이다. 내 삶에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매일 주시는 그 작은 은혜를 붙들고 날마다 주님께 헌신하는 그 야성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청년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청년입니다." 옆 사람을 서로 격려하자.
청년의 야성을 기도 중에 회복하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자.
요르단에서의 5년 사역 후에 한국으로 안식년을 나왔는데, 나를 파송했던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고 후원교회들도 사라졌다.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끊어졌다. 요르단에서의 5년 사역을 했으나 아무 열매도 없었고 다른 선교사들과의 관계도 어려워졌기에 모든 것이 헛것이 된 것 같았다. 절망 중에서 깊이 기도하다가 요르단의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의 영적 성공의 야망을 위해 사역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실패함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했다.
모든 후원이 끊겨 다시 선교지로 나갈 방법이 안 보일 때, 어느 대기업에서 이라크로 보낼 지역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 회사를 통해 이라크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회사 생활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대기업의 '정직원'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선교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해서 매니저 역할을 주었고, 보수도 졸지에 억대 연봉이 되었다. 그전에 요르단 사역기간은 이른바 faith mission였기에 보수를 받지 않고도 감사하며 살았는데, 억대의 연봉을 받게 되니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없을 때는 누구나 겸손하지만 진짜 영성과 실력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드러난다. 억대 연봉을 받게 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했다.
이라크 정부의 고위층을 만나는 것이 그 대기업에서의 내 일이었는데, 어느 날 한 고위 인사가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뇌물의 은어를 사용해서 '종이'를 가져오라고 한 요청을 이해하지 못해서 '돈'이 아니라 진짜 'A4용지'를 가져갔다. 기가 막혔는지 화도 내지 않고 껄껄 웃더니 향후로는 뇌물을 요구하지 않겠다며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 후로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악한 것에 대해 미련한 것이 주님의 축복이다.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핍박 가운데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을 그들도 찾게 된다. 대기업 리더십 입장에서 보면 똑똑한 사람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으나,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한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다. 그것이 다니엘의 이야기이고 느헤미야의 이야기다. 이 마지막 시대에 다니엘과 같은 세상을 이기자.
너무 보수가 좋아서 그 대기업을 사직했다. 더 이상 그 생활에 안주하면 선교는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세 자녀를 두고 있는 내가 무작정 사직한 것을 두고 나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다시 벼랑 끝에 서자'는 선배의 격려 속에 용기를 내어 사직을 했지만, 여러 달이 지나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길도 열어주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운데 자녀들을 바라보면 너무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편도 비행기 값'만 주시면 레바논으로 가겠다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단번에 모든 길을 열어주셨다.
"네가 하는 것 아니다. 내가 한다. 너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아라. 돈 없고 후원 단체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선교 못한다고 했지만, 내가 어떻게 하는지 바라보라"
일단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자, 그 이후로도 내 인생 가운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선교의 길을 열어가셨다. 400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게 하셨다. 코로나로 학교 문을 닫아야 할 때도 캐니다의 권사님이 기도 중에 도움을 주시고, 여러 후원이 있어서 이 어린이들을 계속 섬길 수 있었다. 내게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 걸고 예수님만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이 복을 주셨다. 우리의 고난은 축복이다. 세상에 우리가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붙들게 된다. 시리아 청년들도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오직 천국 소망만 바라보고 예수만 붙잡고 일어나고 있다.
무슬림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은 전략이나 편법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가 어렵다고 한다. 맞지만... 어머니의 기도로 우리의 믿음이 지켜졌다. 나는 신앙을 떠나 방황할 때도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언젠가는 예수님께 돌아갈 것을 믿었다.
중동은 오히려 부흥하고 있어, 시리아 친구들이 날마다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부모 세대의 헌신으로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다. 부모를 비난하기보다, 이제 우리 청년 세대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다.
간증 동영상:
나는 20세 야스민이다. 어려서 시리아 전쟁이 시작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시리아를 떠나 레바논으로 와야 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집도 없이 난민촌 천막에서 살아야 했다. 선교사님을 만나 여자 청소년 학교를 열었다. 남자들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우리가 선교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고 무슬림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고 거기에서 딸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너무 목말랐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위로를 얻었다. 세례를 받는 것이 죽을 수도 있어서 두려웠으나 꿈에 에수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았다. 시리아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고 싶다. 여권과 비자가 생기면 수많은 난민들이 넘어가 있는 터키로도 가고 싶다. 이 난민촌에서는 교회에서 친구들과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교회는 우리의 피난처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상황이 어렵지만 눈을 들어 열방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과 세상의 주관자 되심을 알게 된다. 자신의 문제에 파묻혀 있지 말고 눈을 들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우리가 청년의 야성으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소서. 우리도 인생의 나이와 삶의 환경을 초월해서 청년의 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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