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해서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셨지만, 태어나고 자라신 곳은 익산과 김제의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익산군 북일면에서 태어난 후 유아 때 군산으로 이사했다가 1930년대 중후반에 익산군의 '터질목'으로 이사하셨고 그곳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소천하실 때까지 사신 본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익산시가 된 이 지역은 만경강과 황등제 사이에 있어 왕기 평야의 끝자락이 야산을 만나는 곳입니다. 논은 집과는 좀 멀어서 한참을 들녘 쪽으로 걸어 나가야 논이 나왔고 집 근처에는 주로 밭들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전북 동쪽 지역의 높은 산중인 장수군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김제군 백산면 도도리로 이사오셔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평야의 한 복판에 있는 곳이어서 한국전쟁 때도 인민군이 전군가도를 지나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을 뿐, 어머니의 동네에는 인민군이 전혀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 때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제 친가와는 매우 대조적인 외가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만경강가에 있어 '한물 지는 것 (홍수)'이 걱정이었지만 논농사가 주된 일이어서 쌀이 무척 흔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친가 어른들은 해전(海田)이라고 하는 만경강 건너 완주군 삼례 옆 마을에 사셨고, 외할아버지는 그곳과 가깝지만 그래도 떨어진 곳을 찾아 자리 잡으셨던 것 같습니다. 도도리(道道里)라고 쓰지만 발음은 '돗도리'라고 세게도 했습니다. 이곳의 외가 앞에는 큰 방죽도 있어서 연꽃도 볼 수 있었고, 마당이 넓은 남향집이어서 여름철에 외가에 놀러 가면 뒤꼍의 울타리처럼 심긴 옥수수를 따다가 삶아 주시면 시원한 맞바람 속에서 만화책을 보며 맛있게 먹던 추억이 있습니다.
외가를 갈 때는 대개 이리에서 버스를 타고 전군가도를 타고 가다가 영상리 입구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전군가도의 남쪽에 있는 영상리와는 반대로 북쪽의 만경강 쪽으로 걸어가야 도도리가 나왔습니다.
그 도도리에서 더 만경강 쪽으로 북쪽으로 걸어가면 만경강 둑 바로 밑에 '됭계'라고 부르던 '동계'가 있습니다. 한 분 밖에 안 계시는 이모님이 사시던 마을입니다. 그 옆 방죽 건너편에는 '고잔'이라는 마을이 있었고요. 그곳 경로당에는 외할아버지의 공덕비가 있었습니다. 동계나 고잔이나 모두 '도덕리'의 마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도도리나 도덕리의 방죽들이 모두 메워져 농경지로 변했습니다.
이종 사촌들은 만경강을 건너 대장촌 또는 춘포에 있는 춘포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사촌 누이들이 장성한 후에 마을에 도강초등학교가 생겼었지만 지금은 다시 폐교되었습니다.(학교 이름은 도덕리와 강흥리를 위한 학교였기에 두 동리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왔는데, '도강'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강도'로 할 수는 없었기에 불가피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모 집에서 이리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전군가도까지 나가는 것보다는 만경강 건너 대장촌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 훨씬 가까웠습니다. (요금이 쌌습니다.) 전군가도로 나가는 길은 평범했지만, 춘포로 나오는 길은 여러 사연이 필요했습니다. 첫째는 어린 시절에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오후에 큰누나를 따라, 만경강 남쪽의 '대보(둑길)'를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해가 이마 위에 있다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점점 내려가 마침내 어둑어둑 해지는 것을 걸으며 지켜보던 광경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둘째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이 허술하던 당시의 만경강 다리(난간은 없이 그냥 상판만 있던 좁은 폭의 낮은 시멘트 다리)를 어둠 속에서 건너야만 했는데, 금방이라도 만경강에 휩쓸려 떠내려 갈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었습니다.
도도리나 동계는 지금은 모두 전주시 덕진구 도도동과 도덕동이 되었습니다. 행정으로는 김제군 백구면에 오랫동안 속해 있었지만, 생활은 전주 (만경강 북쪽은 익산)의 영향 속에 살았고, 만경강 다리를 건너면 익산군 춘포면이어서 그곳 학교를 다녀야 하는 등 3개 지역의 경계에서 애매한 시기를 보내다가, 1990년대에 전주시로 편입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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