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고 국어 선생님들의 추억
고등학교 시절 국어과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K선생님은 시인이셨습니다.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즐길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김영랑의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시를 표준말로 '밋밋하게' 읽으면 무척 나무라셨습니다. 전라도 고유의 발음과 억양으로 읽어야 했습니다. '워~매~ 단풍 들겄네~이~' 그 시의 첫 구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선생님의 칭찬과 꾸중이 달라졌습니다. 또, '피아노 치는 여인의 손놀림' 모양 짓을 하시면서 '햇빛 영롱한 바다 수면 위를 차고 오르며 펄떡이는 갈치의 춤'을 생각해 보도록 하셨고, '생각난다'는 자동사보다는 피동 보조 어간 '히'를 넣어서 '생각힌다'라는 맞춤법에 맞지 않지만 진한 의미를 주는 표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L선생님은 전형적인 수험생을 위한 국어공부 방법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단권화를 별도로 하지 않아도 L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적으면 충분했습니다. 다른 부분에도 그 공부 방법을 적용해서 각종 모의고사와 최종 학력고사에서도 성공적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갯들 저자 임영춘 선생님
오래 배우지 않았지만 '소설' 측면에서 강력한 영향을 준 선생님으로는 임영춘 선생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분은 자신의 목표가 분명해서 많은 시간을 소설 집필과 연구에 사용하시느라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신 기억은 없지만, 소설과 얘기를 통해 만경강변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갖게 해 주셨고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경천 저수지, 대아리 저수지 등 수리 사업 등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카리스마보다는 불룩한 배에 그저 '허허~' 웃음 짓던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아 있는 분이시지만, 소설은 참 감명이 깊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 해 동안 준비하셔서 제가 고1 때 '갯들'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내셨고, 자비로 출판하였기 때문에 원하는 학생들은 소정의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게도 해 주셨었습니다. (나중에 현암사에서 제대로 나온 것이 더 좋았겠으나, 처음 출판하셨던 대영사(?) 책 표지의 붉게 물든 해 질 녘 갯들 사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또 다른 책 '맥(脈)'도 수업 시간에 소개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보면,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늘 사용하지만 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는 흔히 나오지 않는 표현들이 참 많아서 신기했습니다.
'똘 ('도랑'의 전라 방언)', '나락' , '도락고 (도락꾸, 돌차, truck)'...
'갯들'의 배경이 된 동진강과 만경강 사이의 광활면 길은 가을철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드라이브하던 코스입니다. 김제에서 심포항 쪽으로 가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무척 많이 피어서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시던 길입니다. '마치 길 양 옆에서 환호하는 사람들 같다'시며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제 강점기 광활 간척지 조성 사업 - 갯들의 탄생
이른바 '산미증식계획'하에서 일제는 만경강의 상류가 되는 완산군의 높은 산지와 섬진강 상류에는 저수지(경천 저수지, 대아리 저수지, 운암호)를 만들고 하류에 있어 관리가 어려운 저수지는 메워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1923년부터 일본 재벌 아베 후사지로 [阿部房次郎]가 자기 자본 백만 엔과 일본 정부 자본 백만 엔으로 김제에 '동진 농업 주식회사'를 만들어, 당시 참모본부에 있던 육군 대좌 후쿠이를 책임자로 불러들여 3년간 제방을 축조하고 9년에 걸쳐 동진강가의 갯벌(개펄)을 간척을 해서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를 농지로 만드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린 것입니다. 이 간척지(干拓地)를 '갯들'이라고 했습니다.
간척사업에 참여했던 외지 사람들은 대부분 그 '개땅'을 그들의 꿈처럼 불하받기는커녕 이른바 '아베 농장'의 소작인으로 눌러앉았습니다. 수확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내고 굶주려야 했기에 그 비참한 자신들을 '개땅쇠(개펄에 사는 서민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가장의 손에 괭이(굳은살)가 박일 정도로 농사 및 노동 경험이 있는지를 심사하여 받아들인 이민들은 한 가구 당 다섯 필지라는 버거운 규모의 논을 경작해야 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탈출보다는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죽도록 일해야 했습니다. 아파도 논에 나와야 했고, 아기를 해산한 후에도 논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9개의 답구로 구성되어 있었고, 답구장(長)이 절대 권력을 휘둘렀는데 일본인도 있었고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제방은 1950년대의 유실 후 1960년대에 새롭게 구축된 것입니다.
이곳에 그리고 만경강가에는 '고잔'이라는 마을 이름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곶의 안'이라는 뜻으로 '고잔'이라는 해석도 있고, 임영춘 선생님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으로는 고산 등 산지 사람들이 농지를 얻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간척 작업에 참여했지만 소작인으로 눌러앉으면서 저 높은 산중의 고향을 기리는 마음으로 '고산 또는 고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갯들'에 묘사된, 방조제 축조 장면
“방조제 공사는 양쪽 끝에서부터 둑을 쌓기 시작해서 가운데에서 합친다. 인부들은 흙을 제방에다 짊어 나른다. 둑 석축을 위해서는 돌도 가져와야 했다. 돌을 실어오기 위해 배나 도록고를 이용했지만, 작업장까지는 오려면 역시 사람의 등을 빌려야 한다. 인부들이 날라 온 돌을 가지고 석축 기술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먼저 흙과 돌을 퍼부어 놓고, 군산형무소에서 죄수들이 엮은 멍석과 각 지방 농장 소작인이 엮은 덕석을 위에 덮고 말뚝을 박으며 계속 메꾸는 것이다. 방조제를 메꾸다가 중간이 파이면, 장대를 꽂아 깊이 팬 자리를 확인하고 그곳에 배를 여러 척 만들어 가라앉힌다. 그 위에 돌과 흙 바구니, 소나무, 돌을 쟁인 가마니를 쌓아서 철사로 묶는다. 방파를 위해 석축 위에다 멍석을 쌓고 또 그 멍석에 소나무로 말뚝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안에 또 돌과 흙을 마구 부어 넣는다.
사람들의 작업에 쌓인 흙 부대나 석축들은 바닷물로 인해 매번 원점으로 돌아갔다. 밀물이 많은 칠월 백중과 시월 보름, 정월 보름사리 때가 가장 위험했다. 총책임자 후쿠이는 계속되는 물살에 의한 실패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 싸움을 생각했다.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해치우는 것이다. 후쿠이는 돈을 아끼지 않고 공사장에 마구 뿌렸다.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사 진척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했고, 돈을 보고 전국에서 수많은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흙짐을 지고 오거나 돌덩이를 메고 오면 유례가 없는 최고의 인건비로 후하게 전표를 끊어 줬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는 인부를 모아 놓고 심지 뽑기를 하여 순차별로 돈을 주고 후대하며 공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자 인부들이 수도 없이 들어붙었고 밤에도 가스 불을 켜 놓고 철야 작업을 했다."
작가 임영춘 선생님의 말씀
나는 이 졸작품이나마 탈고하고 나니 이제 여한이 없다. 이 책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호남벌 서쪽 바다의 간척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다. 쌀이 황금 같은 당시에 왜인들이 우리의 옥토를 모두 탈취하고도 이곳 갯벌까지 개간하여 이민을 받아 노예화하였다.
이 고장에서 태어난 나는 어른들이 시달리다 못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고, 나 역시 개구리와 뱀이 썩은 도랑물을 먹고 굶주림 속에서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났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갈 곳이 없어 이 농장에서나마 행여 쫓겨날까 두려워했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수만은 걸식 낭인들 중에서 호구지책을 위해 육체를 전시하는 경쟁을 뚫고 선발된 농도들이었다. 그러니 사실 민족적인 고난상의 대표적인 집합소라 할 만하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제법 냉정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순수하고도 위대한 우리 민족의 긍지가 깃들어 있기에 보람찬 마음으로 원고를 메꿔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곳에 살았거나 내왕한 인물 중에는 조선총독과 그리고 농학박사들도 있었다. 그러기에 총독부 직할 시험장이 여기에 설치되었고 또 섬진강 운암호가 이 간척지 때문에 생긴 사실 등 실로 국가적인 차원의 사건들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수년 동안 자료 수집에 매달렸고, 탈고하기까지 4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러나 고이소 조선총독과 육사 동기요,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이 간척지 제방을 쌓고 농지를 관리했던 후꾸이(福井重紀)의 두 권의 저서 〈조수와 싸워서〉〈개척 7년 사〉를 입수치 못해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이 책은 다만 내 가정이나 이 지방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생각하면 역사적인 이 상황을 되살리기가 쑥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인간 승리를 한 우리 겨레의 참된 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어 나는 밤마다 붓을 들고 흥분에 떨었을 뿐이다.
끝으로 한 가지 밝혀 두고 싶은 점은, 이 책이 내 고장 향민들의 격려에 힘입어 금년 봄에 자비출판(自費出版)으로 펴냈던 바, 이를 입수한 현암사(玄岩社)가 아껴보아 준 탓으로 새로이 햇빛을 보게 되었으니 필자로서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그 후의(厚意)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나누어 갖게 될 줄로 확신해 마지않는다.
1981년 9월
임영춘 (林永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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