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to God, Hand to Man.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OOO is an evangelical part of the universal Christian Church.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에 속한 복음주의 부분(교단, part)이다.
Its message is based on the Bible. 그 메시지는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Its ministry is motivated by the love of God. 그 '사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한다.
Its mission is to preach Jesus Christ's gospel and to meet human needs in his name without discrimination. 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차별 없이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
마음의 할례
신앙의 형식은 있는데 신앙의 삶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정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예수를 모시고 새롭게 된 사람이 참 기독교인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섞여 있다가 심판 날에는 구분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외에는 내가 의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신의 의에 대하여 파산 선고를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어 주신 그 의가 아니고서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왜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어떻게 신앙이 변질됩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보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으로 외식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롬 2:29)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지인 USA투데이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유럽을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유럽교회의 쇠퇴 이유로 저출산, 이혼율 증가, 복지 확대, 높은 교육 수준, 주 5일제를 꼽는데, 어느 교회 학자가 진단하기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전통과 의식만 남아있는 종교는 결국 몰락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유럽교회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전통, 선민의식만 주장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림으로 자연적으로 도태되었습니다.
한 사람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간증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보다 놀라운 간증은 없습니다. 나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심각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더 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단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느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떻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 예가 아담 사건입니다.(12절)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는 원죄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원죄가 내 핏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 개인의 일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똑같은 죄를 짓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표현합니다.(14절)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원죄의 원리가 작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14절)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가 일치하는 부분이 뭘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표성입니다. 두 분은 자기를 따르는 자를 대표합니다. 또 하나는 효과성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일치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두 가지입니다. 아담은 피조물 인간입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그 결과 사망을 가져왔어요.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 없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두 분 중에서 누가 더 영향력이 강력하냐는 겁니다. 의와 생명이 훨씬 강한 것입니다.(15절)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왔어요. 그 결과 심판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의 파워는 그것보다 더 강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의 힘이 강하지만 그 죄를 용서하러 온 하나 님의 권세가 더 풍성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죄인이지만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거냐? 이런 질문을 만민 구원설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우리는 본성이 같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요 1:12)그래서 구원은 자동적이 아니고 선택적이고 고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동적 죄인, 선택적 의인입니다. 의인은 자동으로 되지 않습니다. 선택해야 합니다.(17절)
우리 인생길에 두 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 라인 또 하나는 그리스도 라인입니다. 아담 라인이나 예수님 라인이나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라인에 있으면 죄를 안 짓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도 허물과 죄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의 힘이 더 큽니다. (21절)
죄보다 은혜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의로워진 사람은 뭐가 왕 노릇하나요?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죄와 사망의 힘보다 은혜와 생명의 힘이 훨씬 강함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의 승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은혜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승리를 믿고 담대히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으니 (롬 5:20) 죄를 많이 짓고 회개하면 은혜의 감격은 더 커질 것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절) 그럴 수 없습니다.(2절) 그 이유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즉 죄와는 아무 관계가 이제 없으므로 죄를 짓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영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식이 뭐냐? 그게 바로 세례입니다.(3절)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한 죽음의 예식입니다. 다른 말로는 주님과의 영적인 결혼식입니다.
그런데 연합의 내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4절)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듯이 나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여기서 장사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자신의 야망, 욕심, 혈기, 교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게 돼 있어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할 때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의문이 생길 겁니다. 이제 나는 죄에 대한 유혹을 하나도 느끼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지금도 불쑥불쑥 죄의 유혹을 받고 있고 어제까지도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흉악한 죄인도 죽으면 감옥에 구속되지 않죠. 기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와 나와의 관계는 종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죗값이 치러졌고,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장사되었기 때문에 죄와 나와의 관계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데 뭐가 끝났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죄를 짓는 거예요. 신분이 달라진 거예요. (7절) 더 쉽게 말하면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수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망의 권세가 휘두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9절) 옛날에는 사망의 권세가 나를 주장하고 종으로 부렸지만,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죄의 권세가 나를 종처럼 부려 먹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끌고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죄와 저주와 진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해방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죄의 종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양심과 기억을 믿지 말고 복음을 믿으세요. 어떻게 하면 죄의 종의 근성을 끊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자신은 죽이고 예수로 살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갈 2:20절) 나는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와 결별하고 반면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11절)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분 한분 한분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성화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까?
1) 죄가 우리 죽을 몸(mortal body)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고 우리 몸을 지배하려 합니다. 은혜로 의롭게 되었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치열한 영적 격전지입니다.
2)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성령의 소욕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화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3)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지체 중에서 3대 영적 고지는 생각, 마음, 입술입니다.
이제 우리 삶은 하나님께 드려진 인생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면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은 건강검진처럼 결과만 알려줄 뿐 치유는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 말씀 앞에서, 우리 안의 죄의 요소들을 날마다 죽이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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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콰이어의 에바브로디도들을 생각하며...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빌립보 교회는 선교비를 모아서 평신도인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내어 전달하게 하고 로마에 머무르며 바울을 돕게 했습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겨우 회복된 후에, 바울이 쓴 빌립보서(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감사의 편지)를 가지고 다시 빌립보로 돌아가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이 '함께 수고한다'라고 이야기한 '동역자同役者'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한 '전우戰友'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레이스 콰이어에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분들을 많이 봅니다. 아프든 건강하든, 물질이 풍성하든 가난하든, 노래를 잘 하든 못하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들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함께 섬깁니다.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교회를 세워가실 것을 믿고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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