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페이지는 일종의 placeholder로 작성합니다.
즉, 기독교 기본 교리의 여러 주제들을 먼저 적어 놓고, 향후에 이에 대해 정리되는 생각을 가필加筆 하려는 의도입니다. 언제나 미완성임을 이해 부탁 드립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탐구를 통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답을 주기 원하실 때에만 그분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자연계시가 아닌 특별 계시다. 그리고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고 완성된다.
자연계시/일반계시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향과 확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면, 특별계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와 그분의 본성에 관한 최종적인 권위와 확신을 제공한다. 성경을 통해 자연계시의 진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춰 주는 '신령한 안경'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칼뱅)
하나님의 구원 행위들
다른 종교들이 신화나 자연의 주기에 근거한 반면, 히브리-기독교는 역사적 신앙에 근거를 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셨다.
역사라는 계시 (계시의 역사). 계시와 성경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계시라는 커다란 신적 행위의 한 부분이다.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 부활 등의 역사적 사건들도 포함한다. 특히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크고 분명한 계시다. (구원 deliverance, 구속 redemption)
성경의 영감
성경은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우선적인 목적과 기능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딤후 3:15)
삼위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
자존성(독립성), 영원성, 광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 불변성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 - 지정의
지적 속성 (지식과 지혜), 도덕적 속성 (선함, 사랑, 은혜, 자비, 인내, 거룩함, 진실함, 의로움), 의지적 속성 (주권적 의지와 능력)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
The decree of God, 즉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작정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뜻하신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자유롭고 변동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조성하지 않으셨으며, 피조물의 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셨고, 자연법칙의 자유나 유연성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성립시키신다.
창조, 섭리, 선택에서 하나님의 작정이 관련된다.
이미 결정되고 고정된 것이어서 인간은 자동적 기계이며, 이렇게 작정하신 하나님은 별로 상관도 관심도 없으셔서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도록 방치해 두신다고 말하는 이신론理神論을 경계해야 된다.
예정
예정하다(predestinate)는 로마서 8장과 에베소서 1장에 나온다.
예정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결정이다. 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인격적으로 예정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행하신다.
예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고, 예수님은 많은 형제자매의 맏아들이 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도 아끼지 않으심을 통해 그분이 우리를 위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구원을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그리스도께로 즉시 피하라'라고 칼뱅은 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담대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의 시작은 '창세 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에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아버지 사랑의 계시와 복음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하신 설교'에서부터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예정은 자유로운 은혜의 선택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의미다. 우리가 그분을 대적할 때도 우리를 위하신다. 오직 은혜 (sola gratia)이기 때문에 오직 믿음 (sola fide) 일 수 있다.
창조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전제다. 우주의 기원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자라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주장이다.
'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yom)는 특정한 시간의 양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문맥에서는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성경은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음을 확인시킬 뿐이다. 넓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지만, 이는 말씀이시며 영원하시고 만물을 만드신 성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창조 과정에서 물 위에 운행하시며, 공허하고 형태가 없는 곳에 질서를 가져오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었다.
창조 교리의 핵심에는 무한히 자유하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그 존재에 있어 스스로 만족하시며 사랑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의 발산 결과로 우주가 생겨났다는 장엄한 선언이 있다. 창조와 구속의 활동들은 영원한 아들이신 성자 안에서 서로 만나 결합된다.
천사
교회에서 천사에 대해서는 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칼뱅도 조심스러워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성경의 이야기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천사의 중재적 역할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성경은 천사를 예배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엄격하게 책망했다 (골 2:18, 계 19:10)
사탄과 마귀들
우리는 사탄의 능력을 조심해야 한다 (벧전 5:8) 우리는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 사이에 놓인 먹잇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탄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피상적 판단의 먹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만 사탄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없다면 사탄은 우리를 집어삼킬 능력을 소유한 더러운 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있다면 사탄의 능력을 과대평가할 이유도 없다. 사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유하지 않다. 하나님을 좌절케 할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위험은 우리의 능력으로 사탄을 좌절시키려 하는 것이다.
섭리
섭리(providence)는 '앞서 보다, 미리 보다, 미리 계획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pro + videre의 합성어이다. '계획을 실행하다'는 의미도 있다. 섭리는 구속과 성취의 기초가 되는 교리다.
기적
기적 = 표적(세메이아) = 능력(뒤나메이스) = 이적(테라타)
인간의 기원과 본성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나서 자신의 창조주를 알고 사랑하는 능력에 힘입어 세상을 다스리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지/정(마음)/사랑(의지)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 (이마고 데이 imago Dei)이다.
창세기 1장 27절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또한 창세기 1장은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점이다. 몸도 악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보다는 열등하다.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시편 8편에서 '인간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는 '극단적인 낮아짐'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개정개역 및 새번역에서는 이마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엘로힘)'으로 번역했다. 결국은 이 '엘로힘'은 하나님과의 직접 비교라든가 천사와의 직접 비교가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존재'라는 해석이 적절해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몸과 혼과 영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살전 5:23) 말씀은 생기를 주는 원리인 혼(프시케)과, 영(이마고, 프뉴마)의 이중적인 측면으로 인간의 영을 본 것으로 해석하며, 삼분법이나 이분법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인격(全人格)적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말로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인간은 진화할까? 수용하기 어렵다. 심리주의는 어떻게 대할까? 인간은 심리의 영향을 받지만, 강압되고 억눌린다는 의미에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성경적 견해다.(이 부분은 좀 더 생각이 필요해 보인다.)
행위 언약
에덴에서 만들어진 관계를 행위 언약이라고 부른다. 아담은 무죄 상태에서 이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는 이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를 행했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역사를 약속/율법/은혜 등의 세대로 구분하는 접근인데, 여러 오류가 있으므로 수용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 주의, 실존주의에 대해서는 좀 더 이해를 하되, 현재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알고 넘어가자.
죄의 본질과 기원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데 부족하거나 혹은 그 법을 어기는 것이다.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요일 3:4)
죄의 기원은 유혹에 의해 피조물 스스로 의지적으로 타락함이다.
원죄, 전가, 무능
은혜 언약
타락 후의 은혜, 하나와 다수, 아브라함과의 언약, 시내산의 언약, 이스라엘과의 언약, 신약의 새 언약....
언약의 통일성, 언약의 중보자, 특권과 책임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 거룩한 삶을 향한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위격: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성육신 incarnation - 말씀이 육신이 되어.
가난을 위한 부요함
그리스도의 위격: 자기 비움론
빌 2:7 '자기를 비워' 헬라어 '케노오'에서 유래하여 자기 비움론(kenotic theory)이 생겼다. 자기 비움 = 케노시스
그리스도의 위격: 죽음, 부활, 승천
벗어남. 변화산에서 '떠나가심(decease)'에 대해 얘기했는데,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 이 단어가 헬라어로는 '벗어남' '출발'의 엑소도스(exodos)다.(눅 9:31)
말씀 선포 = 케리그마 = 부활이 핵심 메시지였음.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 제사장, 왕
의/중보/주권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사역이며 직분이다.
기름 부 음 받은 자 = 그리스도
중보 = mediation
속죄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다.(요 3:16)
인간의 죄.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고전 15:3)
형벌적 대속 (penal substitution), 탕감(remission)은 간과하심(passing over)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승리 (고전 15:55~57)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
구약의 제사장적 제물,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
그리스도의 지속적 사역 :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의 의미에서는 분명히 완성되었지만, '끝났다 피니스'라는 의미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계속 간구하고 계신다. 구약에서 희생 제물의 중요한 순간은 제물을 죽일 때가 아니라 그 피로 행해야 할 일을 행할 때이듯이,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히 7:25)
그리스도의 중재를 공유함 - 루터에 의하면 속죄의 제사와 감사의 제사를 구분했다. 예수님의 단번 희생에 의한 속죄의 제사를 감사하는 우리의 반응의 제사가 예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의 사역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모든 중요한 일은 성령의 사역과 어떤 모양으로든 관련되어 있다. 신적 계시, 성경의 영감, 물리적 세상의 창조, 그리스도의 잉태, 영적 섬김을 가능하게 하심, 성도들에게 영생을 주심, 성도들 안에 내주 하시며 세례를 베푸심, 기적들, 영적 은사, 예언 등등
구약에서도 성령이 나타났으며, 그리스도와 성경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구원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크다. 성령의 내주 하심, 성령 세례, 성령 충만 (갈 5:16)
모든 구원받은 영혼은 성령으로 거듭났다. 모든 부흥은 성령의 역사이며, 모든 영적 진리는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고, 모든 거룩한 성품은 성령에 의해 거룩해진 것이다.
일반 은총
(눅 16:8하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일반은총 vs. 특별은총
교회와 세상 :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잃어버린 상태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아직도 하나님은 세상에, 세상과 함께 계시며, 일반 은총의 다양한 흔적을 사랑의 증거로 제공하신다.
유효적 소명
실물 소명 vocatio realis - 말씀이 아닌 사물(자연, 역사, 양심 등)을 통해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반적이고 외적인 소명으로는 누구도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소명 vocatio verbalis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 속에 실제적인 효력이 발생하려면 말씀소명이 인간 내면의 생각과 의지와 마음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효적 소명 vocatio efficax'이다.
성경이나 개개인의 경험으로 볼 때,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 가운데 소수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주님도 친히 말씀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
성경은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모든 인류가 죄책이 있어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구속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눈멀고 죽은 자로서 자신을 거듭나게 하거나 회심하게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비관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하고 범죄 한 사람은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자로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바 된 소망 없는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교통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을까?
신약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답변을 제공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능한 능력과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상속자가 되도록 유효적으로 부름 받는다고 분명하고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를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비교해 보라. 고린도전서 1장 26-30절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는 아무 육제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들과 신약 성경의 다른 선언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이 “부르심'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참되고 역동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행하시는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우며 유효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의 부르심"(히 3:1)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이 이 부르심의 온전하고 충분하신 원인이며 근원이자 실행자가 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를 이루시는지는 인간의 이해 너머의 영역이며, 따라서 왜 말씀 소명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에게만 이 일이 일어나는지도 인간의 이해 영역을 넘어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복음서에서 부르심'은 단순히 '초청'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서신서에서 이 단어는 대체로 '소환 혹은 요구'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동시에 '유효케 함, 원인이 됨, 지배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신서에서 부르심(칼레인)은 본질적으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정하다'라는 의미다.
죄인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부르는 유효적 소명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거룩, 은혜, 그리고 하나님 지혜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영역에 서 있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에서도 생명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능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유효적 소명의 놀라움을 어떻게 인간의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신적인 행위를 분석하거나 묘사하려는 것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며, 심지어는 잘못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신적인 신비를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듯 우리는 그분이 잃어버린 바 되어 소망 없는 죄인들을 참된 생명으로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통해, 그리고 이 신적 부르심의 열매들을 봄으로 하나님의 이러한 신적 행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죄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의 연합을 파괴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주이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름 받았다(고전 1:9. 고전 1:23, 24 참조), 따라서 유효적 소명이란 구속되지 못한 자들의 영적 눈먼 상태를 거두어 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영접할 수 있게 하는 신적 행위다. 인간의 지성은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뚫을 수 없는 벽을 쌓은 죄와 영적 무지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졌고, 새로워진 마음과 의지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끈끈한 교제 안에서 구주와 연합되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에 우리는 마음대로 방황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했지만, 그분의 유효적 소명을 동해 우리는 지금도 "나를 따르라"라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시는 그분에게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초청이 아닌, 그리스도께 듣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위인 이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와 삼위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교제는 영광스럽게 회복된다. 그분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는 진실과 자유 가운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적인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유효하게 인도된다.
유효적으로 부름 받은 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가 그렇게 돈독해지면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유 1절), "거룩한 형제들"(히 3:1),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살후 2:13),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 칭함 받는다.
이렇게 그분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되는 놀라운 특권은 결코 우리가 이룬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마땅한 권리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아무 공적이 없지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기(고전 1:9) 때문에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조명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고(엡 1:18), 오염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죄에 대한 깨달음과 참된 회개로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시며, 우리의 허물 많고 죄악 된 의지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인간은 비인간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제가 자유로워져서 새롭고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옛날의 무능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는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죄의 효력이 사라지고, 이제 우리의 지성은 헛된 것을 따르지 않고 진리를 이해하며 (고전 1:23, 24 참조) 복음을 믿는(살후 2:14), 신뢰할 만한 도구로 새로워진다. 따라서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 의지는 참된 거룩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원인이기 때문에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 9:15).
그러나 이 유효적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신자들을 깨어나게 하고 변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베드로의 말로 표현하자면,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다(벧전 2:9).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우리를 유효적으로 부르시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말씀 소명과 유효적 소명(vocatio effica)의 관계도, 유효적 소명과 중생의 관계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유효적 소명에서 하나님이 공적이나 준비됨, 또는 인간이나 인간적 수단의 가치에 따라 행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다(벧후 1:3), 삼위하나님 자신이 이 소명의 유일한 원인이며 수단이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효적 소명은 지금과 영원히 풍성하고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고, 신자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필요한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하나님의 유효적 소명은 전능자에 대해 나중에 생각해서 덧붙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목적에 근거한 것이다. 바울의 유명한 말 가운데 이 진리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요 10:27-30 참조),
신자들의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오……(롬 9:11, 23, 2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유효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소명이 신자들의 인격적인 책임을 무효화하거나 폐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딤전 6:12)라고 말했고, 예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고 하셨다.
유효적 소명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근거한 것이라는 믿음은 이교적인 운명론도 아니고, 도덕적 해이함이나 영적 교만, 종교적 무감각의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이 자신에 대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포대를 항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선물을 주기 때문에 (계 17:14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도록"(엡 4:1. 벧후 1:10, 11 참조) 신실하게 부름 받았다.
결론
따라서 성경은 유효적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주권적이고 자유로우며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임을 가르친다. 또한 죄책을 가진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 그 소명에 의해서 그들의 공로 없이도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력 있는 구원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또한 믿음에 거하면서 유일하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그분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우리의 엄숙하고 불가피한 인격적 책임도 분명하게 선포한다.
우리는 신적 부르심 과 인간적 책임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신 이가...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벧전 5:10, 11) 하신다고 한 베드로와 함께 즐거워한다. 또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가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 14. 요 10:27-29 참조)라고 한 바울과 함께 감사한다. 그리고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이와 연합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계 17:14)이기 때문에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중생
하나님의 낳으심(begetting), 위로부터 낳음 (begetting from above) =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이 역사로 들어와서 인간 내면의 존재를 만나시고 새롭게 창조하셨다. (요 3:3)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요 3:5)
하나님의 낳으심(거듭나게 하심)은 영과 육 사이의 대립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빛의 자녀들'을 '어둠의 자녀들'에게서 구별하실 수 있다는 것이 신약의 기초다.
하나님의 낳으심은 역사의 '시작'으로서, 그 이후 가장 힘든 위기를 지날 수도 있고,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낳으심은 하나님에 의해 보전되고 견고해져서 연약과 패배를 통과할 수 있고, 그 길을 가로막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을 통과할 수 있다. 거듭남을 '생명의 임함'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 그 길을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을 잊으면 안 된다. 거듭남을 추상적이고 심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창조하시고 낳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회개와 회심
대하 7:14 - 도덕적 개혁의 유일한 길은 죄의 회개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repentance)의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메타멜로마이'는 가책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메타노에오/메타노이아(명사)'는 일반적으로 죄 사함에 필요한 필수적인 마음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죄와 하나님 등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다, 다른 태도를 갖다'는 의미다.
회심(conversion)은 '스트레포/스트로페(명사)'인데 대개 접두사 '에피'를 붙여서 '돌이키다'는 뜻의 능동태를 사용하였다.
하나님을 향해 삶을 돌이키지 않는 회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며, 회개 없이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삶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회개와 회심은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겠다는 분명한 이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합당한 헌신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역사적 결정 이전에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은 필연적이다.
믿음
믿음과 지식 : 지식 자체가 신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지식이 신뢰의 전제 조건이 된다.
신념(belief. 지적 동의)과 신뢰(trust, 의지하여 맡김)
믿음과 이성 - 인간이 타락했다고 이성조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성이 믿음에 도움이 된다.
믿음과 사랑 - 모든 사랑의 밑바닥에는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요일 4:10, 19)
믿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 말미암아(through).
'구원에 이르는 믿음 saving faith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요일 5:11,12)'과 '살아 있는 믿음 living faith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 10:38, 갈 2:20)'을 구분해야 한다.
신비적 연합
'신비적 연합'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혹은 그분의 신성에 완전히 잠기는 것(흡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교통에 대한 경이로움'의 제안이다. 이기적 묵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전인적으로 공급받은 동력의 결과다.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교제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가장 높게 표현되었다. 포도나무와 가지, 양떼와 목자, 형제 등.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갈 2:20
Sursum corda! 마음을 높이 들라
Regem habemus! 우리에게 왕이 있다. 만왕의 왕, 주의 주가 계시다.
이신칭의
'칭의'의 히브리어는 '짜덱'이고 헬라어는 '디카이우'다. 이 말들은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법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의는 주입된 것이 아니라 전가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내부의 죄성으로 인해 구원을 의심하면 안 된다.)
그러면 법적 허구인가? fictio juris? 사람이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단순히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것으로 여기시고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그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로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완전하다. '의로운' 사람만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은 '무죄, 유죄' 판결을 내리시는 것이 누구의 의에 근거하느냐...이다. 우리의 의로는 의롭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는 의롭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고후 5:21)
그리고 이 칭의의 통로는 오직 '믿음'만이다. 칭의는 '죄 사함'을 포함하며,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확립되고 변하지 않고 지속될 지위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선행은 칭의와 관련하여 '선포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으로 의로워진 자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빌 2:12,13)
양자 됨
칭의 = 화해 = 은총으로의 회복 = 양자 됨
아들 삼기 = 휘오데시아 = 이스라엘 = 성도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롬 5:2)
성화
로마 교회의 칭의는 성화와 갱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믿음의 열매인 행위 안에서 행해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완성되고 온전해져서 번복되지 않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는 거룩한 삶에 대한 관심을 갖는 데 해롭다는 이유였다.
이 도전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성화'의 교리로 대응했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칭의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서는 것이라면 성화는 마음과 삶의 거룩함과 관련이 있다. 죄에 대한 미움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우리의 믿음을 통해 갖게 된다.
확정적 성화 vs. 점진적 성화 : 성화를 철저하게 점진적인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도는 성부에 의해서 성자와의 교제로 부름받았다(고전 1:9).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는다. 즉, 성도는 죄와 결별하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처럼 확정적이다. 성도들의 예수님과 함께 부활 승리의 성취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이것이 확정적 성화이다.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지을 수도 없다고 한다. (요일 3:6,9)
성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을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상태는 점진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성화되어가는 과정이 점진적이다. 성화는 단순히 죄를 씻는 것이상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적극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엡 4:13) - 죽은 자들에게서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 안에 은혜와 선, 진리와 지혜, 의와 거룩함이 가득차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그 자체다. 단순한 외적 흉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을 부여 받아 닮아가는 것이다 (요 1:16)
확정적 성화의 매개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이고,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 즉 성삼위 하나님이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신다.
성화는 성령께서 친히 이루시는 일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면제되거나 형식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함에 격려와 자극이 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의지와 행함에 있어서 우리의 일에 에너지를 공급하신다. 우리의 일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지표가 된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견인堅忍은 일반적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신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마지막 구원까지 지키신다는 칼뱅의 교리를 설명하는 전문용어로 많이 사용된다. 즉,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다.
견인에도 불구하고 배교는 가능한가?
은혜에서의 신적 주도 때문에 '이론적으로' 인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하기 때문에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이탈을 막는다는 주장이 있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신실치 못함을 이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자들의 확신일 뿐, 하나님은 '믿음 없이'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확신케 하신다. 신자의 확신은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염려의 원인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신자는 이 위협들을 혼자 맞닥뜨리지 않는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참으시고 성도도 참는다는 견인 교리에서, 하나님은 신자들의 견인을 통해 견인하신다. 그럼에도 신자의 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의 본질
교회는 성경이 선언하는 구속(redemption)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죽으심은 교회를 구원하기 위함이었고 (엡 5:25)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그의 교회를 사셨다. (행 20:28)
본질적으로 교회는 단순히 인간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서, 공통의 구주를 신뢰하고 성령에 의해 성취된 연합 안에서 주와 하나 된 죄인들이 나누는 '교제'다.
교회의 생명은 '언약'에 근거한다.
보편교회 vs. 지역교회
유형교회 vs. 무형 교회 : 교회는 무형이고 참 교회는 이미 하나다. 교단의 통합을 통해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연합을 인식하여 초교파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무형의 교회는 그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일 때 가시화된다.
교회의 행정
섬김의 사역 - 집사와 전문가에게 위임이 필요함
가르침과 다스림의 사역 - 장로들에게 위임
교회의 직분
교회의 권징
세례와 성찬
이 예식들은 상징적인 가치만 가지고 있을까, 직접적으로 영적인 은혜를 제공할까?
세례의 개념은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 물로 씻을 것을 요구하는 구약의 율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레 14:8) 세례 요한의 세례도 이러한 용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요한도 알고 있었다시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의해 바뀔 준비과정이었다.
(롭 6:4~6)는 세례의 핵심 구절이다. 세례의 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노아가 홍수의 물을 통과하여 안전에 이른 것처럼 우리로 새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위험을 상징한다.
'밥티조'라는 헬라어는 '적시다, 거꾸러뜨리다, 담그다'라는 뜻이다. 잠김 방식은 동로마 교회에서 정식으로 제정되었고 서로마 교회도 중세까지는 이를 채택했다. 물이 부족한 경우에는 물을 붓는 '관수례'가 허용되었고, 중세 후반에는 물을 뿌리는 살수례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세례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합당한 세례 후보자의 문제이다. (군대에서 남발되는 세례의 의미에 대한 논란을 생각해보라.)
성찬
주님이 죽으시기 전날 밤, 주님이 제정하신 기념 잔치다. 초대 교회에서 성찬은 예배의 중심이었고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성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 언약의 인 침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 안에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공급되고 그분의 힘이 신자들 삶의 근원이 된다.
성찬 참여는 감사와 정직으로 떡과 잔을 받는 신자들에게 국한된다. 죄가 전혀 없는 상태는 선제 조건이 아니지만, 부부의한 무관심이나 의지적으로 회개치 않은 사람은 이 잔치를 누리면 안 된다. 명백한 죄도 성찬에서 배제되는 근거가 된다.(권징의 가장 끔찍한 단계가 된다.)
은혜의 다른 수단들
하나님의 말씀 = 참된 설교와 신실한 청종, 그리고 신자가 날마다 사용하는 하나님 말씀 성경도 은혜의 수단이 된다.
교제, 기도, 예배 :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공적인 행위로서 기도도 은혜의 수단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문을 닫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 훈련이지만, 모든 신자는 어디에서 기도하든 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기도하지 않는다. 성경의 약속들이 기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영혼을 성경으로 채우면 신자는 기도하게 되고, 기도는 성경으로 인도한다.
기도를 포함하는 공예배도 아주 훌륭한 은혜의 수단이 된다.
성령의 일반 은총 - 찬양시, 자연
일과 섬김
특별한 인간 관계들
죽음과 불멸
죽음
부활
운명
재림: 천년 왕국에 관한 관점들
모든 자의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 - '파루시아' 행 1:11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 막간 (the Millennium) - 천년왕국설
후천년설 - 그리스도의 재림은 천년 왕국이라고 부르는 의와 평화의 기나긴 시대 끝에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
무천년설 - 계시록 20장을 상징적이고 영적으로 해석하고 지상에서의 천년 왕국은 생략하는 주장
전천년설 - 천년 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 땅에서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시작할 것이며, '휴거'와 그리스도께서 신부와 함께 이 땅으로 오실 '계시'라고 부르는 단계로 나눈다. 천년 왕국 끝에 사탄의 강한 저항이 잠시 있고 그 다음에 악한 자들의 육체적 부활과 마지막 흰 보좌 심판이 따라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년 왕욱 이전에 임할 '환난의 때'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르며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마 24:44)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복된 소망'이다. 마라나타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 심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믿음은 기독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다.
죽은 자의 부활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 '최후 심판'이다.
지속적으로 거역한 사람들의 영원한 정죄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질을 판단받기 위해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은 거룩한 삶에 강력한 자극이 된다.
종말론과 윤리학이 분리될 수 없다. 종말론과 복음적 관심도 분리될 수 없다.
마지막 상태: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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