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준 목사님의 '믿음을 의심하다'라는 책을 제 나름대로 요약했습니다.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가?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낚인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문자나 이메일에서 무료로 좋은 물건을 준다고 해서 링크를 누르고 들어가면 불법 앱을 설치하여 해킹하거나 이메일 주소나 전화번호 등 스팸을 보내기 위한 정보만 수집하고 그 복잡한 과정의 뒤에는 상품은 없거나 추첨으로 나중에 제공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표현도 그런 낚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쉽다면 왜 굳이 구원받는 것이 매력적이겠느냐...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결론으로 들어가게 되기도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적인 동의만 하면 인생관이 완전하게 변화할까요?
믿음은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며 믿음에는 대상과 내용이 있으므로, 감정 요소뿐만 아니라 지적인 동의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사자굴 앞의 다니엘처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곧 경제적 손실, 사회적 왕따를 뜻한다면 신앙의 고백만으로도 세례의 자격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때의 기독교 신앙 테스트 사건들의 경우처럼요.
그런 시련의 때에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마음으로만 여전히 믿으면 될 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로 끝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생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라도 부인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또는 권장되면서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고백만으로는 정말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 2:19)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동의는 귀신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신뢰를 위한 지적인 동의를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동의하겠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해 따라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전제로 한' 지적인 동의인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참된 구원이 있음을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겠다는 지적인 동의'인 것입니다. 믿음을 싸구려 믿음으로 '불완전판매'하면 안 됩니다.
갈 3:26도 문맥을 살피면, 행위나 신분, 즉 지적/종교적 배경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으로'의 반대 개념은 '자신의 행위나 배경'입니다.
또 믿음이 통로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한 구원을 신뢰하는 것이지, 자신의 지적인 동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으로'가 강조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 일에 동의하는 지식이나 확신의 감정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이 지적으로 이해/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적인 동의가 반드시 지적인 이해를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는 심각한 문제는 '아직은 맡기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녀가 신랑감에 대해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혼으로 인해 감당할 희생이 더 두려운 경우일 가능성이 높듯이,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의지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로마서 1장.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하여져서 오히려 정욕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의 반대말/대조에 대해서도 성경 내에서도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불신', 야고보서에서는 '의심', 히브리서에서는 '보는 것',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가 믿음의 반대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구원의 전제조건이 '행위'인 것은 동일한데 인간의 순종적 행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순종적 행위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성경의 믿음은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의 순종적 행위로 보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은 '믿는다고 인정만 하면'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지적인 동의와 신뢰의 요소가 모두 포함됩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우리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요약
믿음은 1) 지적 동의, 2) 확신과 소신, 3) 신뢰 등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의 진정한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문제를 흑백논리나 대립논리로 접근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빌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을 근거로 세상 지식과 학문이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칭의교리가 '다른 것은 하나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개혁의 슬로건
'오직 믿음'은 '오직 성경'과 함께 교황의 권위와 교회 전통의 절대화에 대한 저항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믿음 외의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지만, 믿음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도 필요하고, 성경 묵상도 필요하고, 구제도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구원의 수단이 되지는 못하지만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은 교회의 횡포와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오직 믿음'을 강조하여 교회의 횡포와 지도자들의 부패를 조장하거나 합리화하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믿음'을 '종교적 행위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할 때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구원에는 영향이 없으니까 교회 세습도, 교회 지도자의 무례나 실수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설득 논리로 '오직 믿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정말 믿음이면 될까?'라고 말하면, '믿는다고만 말하면, 정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신뢰해 의지하는 것을 뜻하므로, by definition, '아무렇게나 살아도'와는 모순이 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성경은 행위의 불필요성이 아닌 불충분성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에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기에 불충분한데, 그 부족분을 '그리스도의 의로 채우는 행위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히기로 하셨습니다. 즉, 의의 주입 infusion이 아닌 전가轉嫁 imputa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순종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대신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순종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좋은 것, 행위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나, 은혜는 좋은 것이지만 율법은 나쁜 것이라는 도식적 이해는 잘못입니다.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 행위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행위로는 할 수 없다'이어야 하지,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로 이해하면 잘못입니다. 특히 세상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나 삶의 습관을 합리화한 것이면 절대 안 됩니다. 따라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 참 믿음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행위로는 안되지만 행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 행위가 아닌 믿음일까요? 자기 믿음을 자랑해도 될까요?
그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교회 공동체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정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요구될 수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믿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자랑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잘못입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 불가항력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특정 사람들의 소신을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믿음의 내용'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순종, 즉 하나님의 은혜'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가 믿음의 내용이 되어서 강조가 되는 잘못으로 믿음이 또 하나의 행위의 자랑으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치병을 고치는 신약이 나와서 그 약을 먹어 나았다면, 그 약의 효과를 놀라고 선전해야 하지 그 약을 먹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공감이 가나요? 엡 2:8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뿐만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의 내용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은 우리의 믿음인가, 예수님의 신실하심인가?
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는 오직 의인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두 해석이 최근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든, 바울은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나 결정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은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 말은 '내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로!'를 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 외에 다른 것은 하나도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다른 것이 요구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죽은 믿음?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
(벧전 1:3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은 가능성이 아닌 확실성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복권(福券)은 위험성이 있으므로 죽은 소망이지만, 합격증서는 확실한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가능성이라면 고난 중에 즐거워하기 쉽지 않고 영생이 가능성이라면 현재의 안일을 포기하기 어렵지만, 보지 못한 것을 믿음으로 바라봄으로써 '산 소망'을 갖게 되면 현재의 삶과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활동적인 소망이 됩니다.
죽은 믿음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약 2:26) 이때 야고보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활동적일 수 있는가'를 말했습니다. 즉,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살아 있네~~' 할 때의 '살아 있음'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면 믿을게요?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얘기에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셔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라고 제가 중고등부일 때 교육전도사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고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진실로' 믿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우리가 오히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맞받아치거나 보면 죽을까 봐 못 보여 준다고 답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믿음의 다른 한 면이라서,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활동적이지 않아서 (inactive) 우리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무신론자들
하나님의 존재를 놓고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논쟁을 한다면, 각자의 주장을 증명해야 할 부담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철학적 사변으로는 끝이 없는 논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의 진실성을 갖고 논쟁을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해야 할 부담은 신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음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언제나 진실하게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제적 무신론자처럼 보입니다. 극심한 고난과 세상의 유혹 앞에서 하나님이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고백이 진실하다면 고백은 사라지거나 죽지 않습니다. 단지 선행에 대한 고민이 있고, 행동이 있고, 그렇게 살아내지 못함으로 인한 불편함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믿고 살아도 구원받느냐는 물음의 답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아닙니다. 굳이 야고보 식으로 대답하자면, '당신의 믿음은 활동적이지 않아서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일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가짜'라는 것이기보다는,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뿐만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이에 '신뢰'를 더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두 질문 모두에 대해 답은 '믿음'입니다.
바울이 주로 이야기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 saving faith과, 야고보가 주로 말한 살아 있는 믿음 living faith이 답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죽은 믿음'은 본질적으로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 있네!'라는 말을 듣자는 권면입니다.
요약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란,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활동적이지 않아 그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짜 믿음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수 있나요?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믿음은 시작일까요, 아니면 끝일까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발생한 일로서 회심을 통해 그 주권적 은혜를 확인한 순간 구원이 확정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곧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날까지 살아가야 하는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믿음
(막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대답은 예수님의 꾸지람에 대응하여 죄송하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영어로 보면 더 대조가 됩니다.
I believe; help my unbelief! (ESV)
이 역설은 온전히 믿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긴장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믿음
믿음에 의해 구원이 단번에 임하더라도 구원받은 성도로 세상을 살아 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는 한, 신뢰를 흔드는 시련과 불안은 불가피합니다. 이 아버지의 외침은 믿지 않는 사람의 외침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와 함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을 붙들고 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요약
믿음은 과거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끝이요, 주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시작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지 못할 일이 없을까?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절대자 하나님에게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말씀에서 믿는 자는 무엇을 믿으면 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드시 병이 나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일까요?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니면, '정신일도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의미합니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다 다르므로 어떤 공식이나 노우하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원리를 찾아야지 공식을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도 모든 문제가 믿으면 해결된다는 공식이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초청입니다. 능력의 주체인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하실 인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요약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는 위대한 사랑의 선언입니다.
일을 달성시키는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이 선물인가요?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선물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가능해지는가?' 하는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할 때, 혹은 이 구원이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라서 인간의 행위나 공적을 자랑할 수 없음을 말할 때 믿음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은 통로입니다.
구원을 받은 후,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 내야 할 때, 인간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할 의지적 결단을 강조할 때 믿음은 조건이었고 명령이었습니다.
믿음의 요구는 사랑의 요청입니다.
절대적인 결과적 필요 Absolute Consequent Necessity : 절대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것으로 여기기로 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는 뜻.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기도할 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관계를 확인하기 원하시는 주님이 기도를 '결과적 필요'로 만드셨기 때문일 뿐,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주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주시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은 그것 없이는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는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성도의 누림을 위해서 요구하신 조건입니다.
믿음의 요구는 사랑의 요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으라'는 명령과 요구도 사실은 선물이고, 선물의 확인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믿으라'라고 하며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의 요청에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요 우리에게도 복이 될 것입니다.
요약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났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통로 역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믿으라'는 요구는 하나님의 요청과 명령이지만 이 또한 선물입니다.
믿음은 자라는가?
(고후 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믿음은 순간의 선택입니다
믿음이 인간의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인가?
믿음이란 한순간의 결정으로 생기는가, 아니면 성장 과정을 통해 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성경은 믿음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아니오 중의 하나입니다. 믿음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유/무의 문제입니다.
자라나는 믿음
칭의에 있어서 믿음은 유무의 문제이지만, 이 믿음을 살아 내는 과정에서의 역동성을 생각한다면 믿음의 성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라 가야 합니다.
'믿음의 자라 감'이라는 말이 마치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들려서 마땅치 않다면 '믿음 안에서 지식의 자라 감'이라고 말해도 좋고, 믿음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지성의 발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약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믿음 안에서 '지식'이 자라 간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경험이 좀 더 풍부해지고 간점의 스펙트럼이 넓어져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 계획에 대해 더 넓고 깊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란?
(마 17:29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마태복음에서 겨자씨만 한 믿음
예수님이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신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은 어떤 믿음의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은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겨자씨만 한 믿음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을 더한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해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듯이 말입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믿음이 작은 것인가?
(마 14:31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독선자와 위선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위험합니까? 독선자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고, 위선자는 거짓말을 하는 줄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의심의 정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존재하는 의심의 정체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기 고백의 진실성을 못 믿는 것입니다. 자꾸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물결을 잠잠하게 하신 이 사건은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
원래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믿음과 의심을 함께 말씀하셨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 상태가 큰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믿음이 '나는 할 수 있다'라면 그것은 정신 통일이나 자기 욕망의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작은 자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파도를 보고 흔들리는 자라는 말이고, 의심하였느냐는 말은 책망이 아니라 당시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원래 믿음이 적은 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환난에 담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혹 앞에 서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 흔들리는 순간이 믿음이 작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작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믿음이 작은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불안의 상태가 불가항력적인 실존의 상태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는 말씀은 '내가 있으니 괜찮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즉, 요구가 아닌 위로입니다.
요약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말씀의 의미는...
이 의심의 정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자기 고백의 진실성을 못 믿는 것으로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라'는 뜻이 아닙니다. 꾸짖음이 아니라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는 환난 앞에서 흔들리는 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작은 상태는 환난 앞에서 흔들리는 순간, 즉 불가항력적인 실존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인가?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과 믿음
믿음이 어떤 일에 대한 마음의 확신을 의미한다면 반대말이 '의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맹목이 가장 좋은 믿음이 아니라면 의심도 건전한 생각의 활동일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통일된 마음의 상태, 즉 정신 통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후반부를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기도할 때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갖고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고난 중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상태는 별반 느낌이 없는 평안한(무덤덤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일에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의미입니다.
강한 믿음, 약한 믿음이 따로 있는가?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강함이 되어 주시는 분임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진정한 성숙은 독립이 아닌 절대 의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원죄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힘을 소유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으니 강함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능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강한 믿음,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강한 믿음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강하게 살려고 애를 쓰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강한 자는 누구일까요?
강한 자는 바울처럼 제물로 바쳐졌다고 음식이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우상은 단지 돌이고 나무일 뿐이라는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고, 약한 자는 그래도 제물을 찜찜하고 양심에 걸려서 먹을 수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함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강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강함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강함을 말씀하십니다.
요약
강한 믿음,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믿음 안에서 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삶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려는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지 않고 우리의 강함이 되어 주십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하나요?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진정한 회심은 지갑의 회심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회심한 성도도 여전히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재물에 연연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노진준 목사는 '진정한 회심은 욕망의 변화를 가져온다'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우리의 원함이 아니라, 주님의 원함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살고 싶어 집니다. 우리는 회심 후에 그렇게 변화하고 싶은 의지는 있으나 변화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각적인 원함과 궁극적인 원함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궁극적 원함이 있더라도 자고 싶고 놀고 싶은 즉각적 원함이 있기 때문에, 공부하고 노력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욕망은 해야 하는 책임을 수반합니다.
오늘 영어 격언이 브라우저에 떴는데, 다음의 내용입니다.
You will never always be motivated, so you must learn to be disciplined.
자기 주도로, 스스로 동기와 목적에 이끌리어 공부하면 좋지만 언제나 항상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획을 세우고,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욕망은 책임을 수반하니까요.
기도하면 된다는 말은 옳은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나, '믿음으로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결국은 구해도 안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회심과 기도는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의 욕망은 회심으로 인해 변화합니다. 과거의 욕망을 그대로 두고 기도를 생각하면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기복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 구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거나 그것에 의해서 존재의 가치가 결정될 것처럼 생각하는 기복신앙은 문제입니다. 너무 큰 무게를 두면 그것은 심각한 왜곡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내면에는 '궁극적인 원함'과 '즉각적인 원함' 등 2가지 욕망이 싸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믿음으로 구하면 산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거나 그 노하우를 아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궁극적인 원함이 아니고 우리가 보고 싶은 현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요술사 시몬의 원함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의 의미
이 땅에서의 개인의 형통과 안정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편함과 아픔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요술방망이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구하겠지만, 그때조차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인생의 목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가능하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편하고 쉽게 인생길을 가는 방법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기도할 때 용서하라'가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는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은 집을 달라고 구했으니 받은 줄로 알고 가구부터 미리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우리는 주님의 다스리심을 가장 궁극적으로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다스리기 위해 때로는 재물도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시고, 산을 바다에 던져지게 하실 수도 있지만, 혹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발생하지 않아도, 거기에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2:20)
요약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진정한 회심은 욕망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신자의 궁극적인 원함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기적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시적인 믿음이 가능한가?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보다는 당장에 처한 급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도움을 청한 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를 기독교에서는 '일반은혜(은총)'이라는 교리로 대답합니다. 구원의 은혜 saving grace와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일반은혜 comon grace가 있다는 교리입니다. 일반은혜는 죄를 억제시키고 외부적인 질서와 의를 증진시키지만, 구원의 은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도록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 줍니다.
따라서 일반은혜가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일반은혜의 증거로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주님이 병을 고치신 사건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일반은혜로서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는데, 다른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병자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시고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의 믿음은 일반은혜 가운데 이웃을 돕는 선한 마음이었을 뿐,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고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혈우병을 앓던 여인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졌고, 주님의 능력이 나가서 병이 나았고, 예수님 앞에서 고백한 이후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셔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의 구원은 병을 고쳐 주신 것이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것은 아닌 것을 막 5:34 말씀의 흐름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병 고침을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해졌지만, 그때 곧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는데, 맹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고 믿었고 자기들 눈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믿음대로 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는 분량만큼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믿으니 그렇게 돼라'는 말씀입니다.
즉 마태복음 9장의 기적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의 교훈을 갖게 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역사하는 믿음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 때 믿음이 언급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일종의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니지만, 그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saving faith는 아니더라도 working faith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요약
구원의 은혜와 일반은혜는 별개입니다. 일반은혜를 받았다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병자가 낫게 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자를 낫게 해 주신 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동의'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지체자나 치매 노인에게도 '동의'를 요구하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동의'가 필요하지만, 지적인 동의가 구원의 절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데 어느 정도의 지식이 요구될까?
믿음이 단순한 지적 동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지적인 요소가 믿음에 있음을 확실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할까요?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적어도 사도신경의 내용은 믿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천지 창조,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 탄생, 고난과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지옥이 있느냐, 언제까지 있느냐 등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진위 판단과는 거리가 먼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단 논쟁을 벌이다 보면 마녀사냥도 가능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천년왕국설, 사후의 몸과 영혼의 상태에 대한 교리,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한 입장 차이는 정도의 차이는 수용하되, 종류의 차이는 거짓과 참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특히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입장들이 기독교 범주 내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믿음에는 지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엇이든지 진실하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믿음일 수는 없지만 (지식이 지성은 자극할 수 있어도 의지를 자극할 수는 없지만) 지식이 신뢰의 선제 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말도 잘못이지만, 구원에 지식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믿음은 이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못하실 일은 아니라고 믿지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을 수는 있습니다. 삼위일체, 예정, 부활도 이해는 안 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걸림이 되어서 자신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불가해함을 불가해함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과 별개임을 기억하십시오. 지식을 넘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약
믿음과 지식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믿음에는 바른 지식이 필요하지만, 지식이 반드시 이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해함을 불가해함으로 인정하는 것은 믿음과는 별개입니다.
자꾸 들으면 믿음이 생기나요?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기도 그 자체를 절대화하거나 기도해주는 사람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지만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성령이 사용하시는 수단이지만 성령을 움직이시게 만드는 수단은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의 주체이시지 기도가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그대로 또는 그때에 비로소 성령이 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기도를 통해서 원하시는 대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원하심이 기도를 선행하기 때문에 기도를 해서 낫는 사람이 있고, 기도를 해도 낫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의 일하심에 어떤 공식이나 노하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언제, 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몰라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한 사람을 의지하게 되지요. 사실 그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비록 자주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도구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사람을 절대화시키지 않으면 기도라는 방법을 절대화시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그 말은 자칫 하나님을 불완전하신 분으로 만들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뀐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전지 하시며 선하신 분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깜박 잊어버리거나 잘 몰라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하심과 주권적인 계획이 선행될 때 하늘 보좌를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도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가 가능해질 겁니다. 더욱 위험한 경우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거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고, 주어진 기능을 절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서 설교라는 행위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로 본다면, 이것은 오류의 소지가 큽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의 절대적 권위를 교황에게 부여했을 때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설교자의 권위가 강조된다면 다시 개혁이 필요합니다.
설교자는 구약의 선지자일까요? 그 사역방식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선지자와는 다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자기가 준비한 설교의 담대한 전달'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해 자기의 생각이나 원함이 방해가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이 그 설교를 통해 드러나도록 해달라는 의미여야 합니다.
청중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자꾸 들으면 믿음이 생길까요?
듣는다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지성을 깨운다고 의지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들음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많이 들음이 믿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더 굳어지거나 굳은 마음이 더 노골화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들을수록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할 명분만 더 갖게 되었으니까요.
모든 사람을 향한 복음으로의 초청을 '일반 소명 calling'이라고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유효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서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기지만, 말씀을 듣는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먼저 복음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억울해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핑계일 뿐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이니, 지금이라도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을 굳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라는 권면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결단은 가능하지만, 자꾸 설교를 듣다 보면 나중에는 믿음이 생긴다는 의미는 오도의 여지가 있습니다. 당장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이 믿음의 유보를 하는 것을 방치하는 안일한 태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다니며 들음을 통해 교회에 익숙해지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것이 큰 위험이 됩니다.
복음을 들어보셨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단순히 설교를 통해서 편해지는 종교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 믿던 사람도 설교를 자꾸 듣다 보면 저절로 믿음이 생기게 되어 있느니 일단 교회만 나오면 내버려 둬도 된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또 내가 전하기만 하면 들은 사람은 틀림없이 언젠가는 믿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요약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은, 믿음은 설교가 아니라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설교/개인전도/복음전파 등을 하지만 상대방이 반드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복음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어야' 가능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나요?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 (휘포스타시스 = 본질, 확신, 실체)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믿음이란 그 고백이 삶 속에서 가시화되어 아주 구체적이고 실재의 것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칭의의 믿음'과는 다른 믿음, 또는 믿음의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도 믿음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믿음인데, 여기서는 후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삶 속에서 그분을 붙들고 그분과 동행하며 기꺼이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열악한 환경을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고난이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도, 세상을 이기는 비결도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눈앞에 큰 파도가 일어날 때마다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며 살아내려니까 고난당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우리를 위해 부끄러움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어떤 상황에서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험한 인생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막연히 하나님이 잘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님과 연합해 이 땅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약
믿음 vs. 기도 vs. 병
믿음의 주체는 '병 낫기를 원하는 나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로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병이 낫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병고침을 위해 기도하되, 고난 중인 사람을 붙들어 주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병이 나을까?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이 말씀은 기름에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약도 함께 사용하면서 기도하라는 것도 아니며,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온전히 믿고 성령께 의지해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장로들이 기름을 바르며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고, 그 고백에 공동체가 동참하겠다는 공동체적 사명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병이 낫나요?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병이 죄로 인한 것이라서 죄를 회개하고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하면 낫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특징인 서로 죄를 고백하고 죄인들을 용서해서 받아주는 일과,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해서 그들을 붙들어 주는 일을 잘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에서 구원은 '고난 중에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있을 때 아내나 친구나 가족의 도움이 큰 위로가 되듯이, 교회도 그중의 하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의 기도란 단순히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이지, 마음의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계획에 따라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붙들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주실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고난 중에 우리를 버리실 리가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기도가 함께 갑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기도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도록 함께해 줍니다. 그것이 또한 공동체의 기도이고, 공동체의 사명입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한다고 병이 낫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도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나는 자격이나 처지가 아니라고 주저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그냥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체가 고난 중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고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우리도 고난 중에 있는 지체들과 함께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싶습니다. 그래서 심방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지 않고 '고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너무 안쓰러워 함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병고침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만큼 함께하며 아픔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약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났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믿으라'는 요구는 하나님의 요청과 명령이지만 이 또한 선물입니다.
믿음을 은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은사 = 선물 =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가르침/다스림/섬김 등처럼 그 현상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은사입니까?
은사에 대한 오해들
은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은사는 사역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은사는 영구적이 아닙니다. '은사의 발견'도 가능합니다. 은사는 ability(능력) + availability (효용성)입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 언제나 더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고전 12:7,11) 자기가 받은 은사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은사의 다양함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함입니다. 따러서 더 귀한 은사란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도 아니고 자신의 공적에 의해 주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은사인가요?
믿음이 선물인 것은 확실하지만, '사역을 위해 주신 임시적인 여건과 재능'이 은사라고 본다면 믿음은 은사가 아닙니다. 믿음은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고, 믿음은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을 은사라고 했습니다.(고전 12:9) '믿음의 은사'는 그다음에 나오는 여러 은사와 연결해서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믿음이라는 해석도 있고, 환난과 고난을 견디는 남다른 능력을 믿음이라고 본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단지 그런 마음의 상태가 교회에 크게 유익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은사라고 부른 것이라고 생각해볼 뿐입니다.
은사로서의 믿음의 특징
은사로서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저분은 믿음이 좋아요, 믿음이 있어요'라고 할 때는 아마도 '은사로서의 믿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은사이기에 그 믿음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부러워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과 비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를 성숙함,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생각하면 보이는 현상 때문에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은사의 활용
은사로서의 믿음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당신이 남들보다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현재 여러분의 상황에서 여러분이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를 항상 원하니까요. 은사로서의 믿음이란 이런 섬김을 위해 성령이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약
은사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역이 따르고, 영구적이지 않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나누어 주십니다.
바울이 말한 '은사로서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는 다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과 고난 중 견디는 믿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메는 것이 무엇인가요?
(고후 6:13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 말씀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경건한 모습이고 믿음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의 근거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준다는 사명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돌아 나와야 하나요? Amish처럼 살아야 할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면 안 되나요?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린도 전서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엄격하게 책망해서 권징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고전 5:9~10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 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렇지만, 고린도후서에서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되나요?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우려되는 것은 율법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세계관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가면 안 되나요?
이 말씀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세계관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종교 행위의 담론이 아니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교회에만 열심인 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도전과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가치관이 믿는 자들의 가치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이고, 아무런 유익이 없음에도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돈을 섬기면 하나님을 잃고, 하나님을 섬기면 돈을 잃으니 양자택일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물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놓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돈을 수단 삼아서) 자기 자신이 주인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은 믿지 않는 자처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즉 돈과 권세와 명예와 쾌락이 최고인 것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약
'멍에를 멘다 = 가치관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할 때는,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은 의심이 아닌가요?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우리는 사람의 속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신앙) 고백에 의해서 교인이 되는데, 행동이 고백과 맞지 않으면 당연히 고백을 의심하게 되지만, 누구도 확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는 심지어 바울의 정통성까지 문제를 삼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갔던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사태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슬픔의 편지 The Letter of Sorrow'라는 준엄하게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써 보냈는데, 너무 신랄해서 편지를 보낸 후에 바울 스스로 많은 근심과 후회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디도의 보고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이 형제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다면 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형제이기에 책망도 가능하고 언쟁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행위적으로 믿음에 합당한 모습이 잘 안 보여도 교회가 출교를 결정할 때까지는 그들이 형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이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믿지요. 그렇지만 너무 자신이 없어요.'라는 답변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다음 얘기는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없는 것을 알아요. 얼마나 두려운지도 알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전히 주님이시지요?'
이 경우에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은 의심의 행동이 아니라 확인의 행동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하냐고 물을 때,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인의 그 말이 기쁨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 있는가를 매일 점검하는 것은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위험 때문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한 구원은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말하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요약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는 것은 테스트다? 아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는 것은 주님이 자신의 구주이신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맞다.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왜 복된가요?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믿음에 초이성적인 면이 있는 것은 맞지만, 반이성적일 수는 없습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기능이 있지만, 무조건 믿으라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참된 지식과 포괄적 지식
다 알아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믿을 만큼, 즉 신뢰할 만큼의 진실한 지식은 필요합니다.
도마의 의심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지만,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도마는 보고 싶었습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말은 불신의 말이 아니라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도마도 부활하신 주님을 너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한데, 이 고백은 비록 보지 못했어도 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이성적 활동이라면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이후의 교회에게 단순히 (이성적 활동으로서) 의심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신앙의 근거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은 주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약
보고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은 잘못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믿음은 반이성적이라는 말은 잘못입니다. 지식이 있어도, 믿음은 반이성적이기보다는 초이성적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킬까요?
(눅 18:8하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답을 기대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질문이라고 해석됩니다.
강청하는 기도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원한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며 우리의 신음도 들으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강청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꾸 기도하면 하나님이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기도할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으로 고난이 편해지거나 두려워지지 않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만료 기간은 원하는 것을 이룰 때가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입니다. 인자가 다시 오실 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 순간까지 낙망하지 않고 주를 붙들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이 '내가 그 믿음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여정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약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과부의 강청도 재판관이 들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를 다 들으십니다.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은 공의가 아니라 과부가 자신을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찮아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서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낙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때까지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주님의 때까지 인내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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