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여러 과정을 거쳐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고, 우리의 미래를 알고 싶어진다. 그때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거룩한 양심에 따라 바르고 합리적인 결정을 해나가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기드온의 양털처럼 어떤 사인을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내면의 확신의 강렬한 느낌을 주시기를 원할 때도 있다. 때로는 기도하는 친구와 형제자매가 기도하는 중에 받은 '예언'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2022년 성탄절 김은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내가 확신하고 수용한 것은 '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고아처럼 자기 생각대로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지 말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의 전개 과정에서 나온 몇 가지 말씀은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시리아는 다메섹(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나라이고, 앗수르는 니느웨를 수도로 이라크 쪽에서 서진해온 거대 제국이었습니다. 시리아가 이에 맞서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남유다에도 참여하라고 하는데, 이를 거절한 남유다를 시리아가 북이스라엘과 함께 침공합니다.
하나님은 남유다 왕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수십 년 내에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징조든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고 오히려 앗수르를 의지할 계획이 있던 남유다왕 아하스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며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을 포장한 답변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목사님의 도움 말씀은, '구해야 할 상황에서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아멘입니다.
또 '확신이 없어 흔들리기 보다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는 것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입니다. 즉, 외적 징표나 내적 확신과 같은 징조를 유일한 하나님 뜻의 판별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기도와 묵상 중에서도 확신이 없으면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다 분명한 징조를 주시기를 구할 수도 있다.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문맥에서 하나님이 주신 징조는 '임마누엘 아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입니다. 잘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지만, 시리아의 침공에 대한 확신에서 시간적으로는 몇 백 년 후에 일어날 예수님의 탄생을 사전 '징조'로 표현하는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아서 더 살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탄절에 임마누엘의 의미를 되새기는 측면에서는 '아멘'으로 은혜롭게 화답합니다.
결국, 결론적으로 징조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되, 거룩한 양심에 따라 합리적 판단을 한다.
- 징조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기도할 수도 있고, 징조를 원하는 다른 형제를 정죄하지 말되, 징조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나 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 형식이나 방법으로 신앙을 포장하지 않고 예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담대하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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