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4:7-10, 16, 요한복음 21:17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
오늘 우리는 본문 아가서에서 한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왕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내가 너를 사랑하였구나." 왕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술람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해서 아가서 여기저기 설명이 조금씩 나오긴 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의 여인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1장에는 그 여인을 묘사하는 몇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1장 5절에는 그녀를 묘사하면서 "게달의 장막 같다"라고 묘사합니다. 게달의 장막은 유목민들의 텐트였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연결하여 만든 까맣고 볼품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거친 피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들에서 일을 하고 포도원을 가꾸고 양을 치던 여인이어서 어쩌면 그녀는 외적으로 피부가 많이 거칠어서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중동의 햇빛에 늘 노출되어 있어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거칠었음을 단적으로 암시합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런 여인과 왕의 사랑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묘사하는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낯이 간지러운 내용도 나오지만 아름답습니다. 조건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는 이제 7절과 10절에 오면 정점에 이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7절)"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더 향기롭구나"(10절), 완전 콩깍지 아닙니까? 이것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신랑의 사랑 노래였다면 그 사랑의 노래를 들은 신부가 화답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16절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의 특성은 사랑의 노래가 들려지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화답하는 사랑 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만들고, 다른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그 사랑 이야기를 감격하여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그렇습니다. 이야기에는 '미메시스, 모사 기능'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습니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부활 사건에는 우리 주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릴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요,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성립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내던져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당신의 몸을 친히 나눠주신 사랑을 보게 됩니다. 맛보게 됩니다. 만지게 됩니다. 그분은 조용히 다가와 그늘지고 춥고, 답답하고, 외로운 우리의 주름진 인생에 사랑의 햇살을 비춰주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그에게 다시 덧입혀 주셨습니다. 부활의 축복을 다시 그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보여주셨습니다. 그 가슴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아침 상처투성이인 그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그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사랑 이야기로 감격한 그가 주님을 향한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을 때 그는 죽는 주리까지도 아름답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섬실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대단한 조건을 갖추었고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사랑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행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 만큼 삽니다. 그만큼이 우리 인생이고, 그만큼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전부 주셔서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오늘 주일을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미소 지으실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 쓰고 가는 이야기이기에 정말 잘 써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드리는 찬양이 마지막 찬양인 것처럼 그렇게 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작년 11월, 연구 학기로 미국에서 보내는 동안 뉴욕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0대 후반인 그분은 토요일 저녁이면 예배팀과 주일 예배를 위해 준비모임을 갖곤 한다고 했습니다. 거의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하고 직장에서 교회로 달려온 성도들과 함께 준비된 김밥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주일 예배를 위해 1시간 정도 함께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드려질 예배를 위해 2시간 정도 리허설을 하고 나면 자정이 훨씬 넘는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돌아간 후 목사님은 교회당에서 밤을 꼬박 지새워가며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하며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달려온 성도들과 두 시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들려주시는 그분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저는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연재하는 글을 써 보내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책도 펴놓고 컴퓨터도 켜 놓았지만 단 한 줄도 글을 써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설교를 위해서 밤을 지새워본 적은 있었지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예배를 나올 성도들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지만 한 줄도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종일 그 찬양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 이야기는 이어져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사랑 노래는 이어져야 합니다. 그동안 주님을 향한 참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들며 달려왔고, 그 사랑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교회로 이 날까지 달려왔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사랑 이야기도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 어떻게 기록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 이야기, 정말 잘 써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 노래, 정말 잘 불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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