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설교, 악한 설교 (bad preaching) <김운용 교수>
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청중들 앞에 섰다. 그리고 설교를 그렇게 시작했다: "오늘 설교는 악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선한 사람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극히 악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사님의 설교요!"
위의 조크와 함께 그의 책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설교학자 데이빗 쉬라퍼(David J. Schlafer)는 오늘의 청중들이 "전혀 식욕이 없어서 느끼는 배고픔"(Hunger without Appetite)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설교에 식상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식욕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희망 마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설교에 대해 기대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려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게 했으며, 설교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한 일을 자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강단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이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과 말씀에 대한 갈증마저 결핍되게 하는 것은 한 두가지 요소 때문이라기 보다는 여러 요인이 작용해서 일어난 일이다.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라는 영화를 보면 미국에서 한참 반전 데모 현장에서 월남전에서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포레스트 검프가 우연히 반전데모를 하는 곳을 지나게 된다. 정복에 훈장을 차고 반전데모장에 나타난 그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으면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안 주최측이 월남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그를 단상에 세운다. 약간 지능이 부족한 그가 전쟁의 실상을 그대로 알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데모 반대자들이 마이크 줄을 뽑아버린다. 소리도 나지 않는 마이크 앞에 서서 그가 경험한 전쟁의 참상을 한참 동안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전달되지 않는다. 주최측이 서둘러 선을 다시 연결시켜 놓았을 때는 포레스트의 말은 다 끝이 난 상황이었다. 그의 전쟁 경험들을 열심히 나누었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는 말은 한마디도 전달되지 못하고 만다. 다만 마이크가 다시 연결되었을 때 청중들의 반응은 "꺼지라!"는 반응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설교자가 이와 같다. 사실 이러한 일은 강단에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 아무리 잘 준비된 설교라 할지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 마이크를 통해서 말하는 것과 같이 청중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설교가 되어질 수 있다. 설교는 행해지고 있지만 말씀에 대한 아무런 갈급함도 없이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굶주림 가운데 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경각심을 갖게 하는 상징적 메타포를 사용하여 웨렌 워어스비(Warren Wiresbe)는 "강단에서 춤추는 해골, 회중석에 너부러져 있는 송장"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설교들은 "상관성(relevance)"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설교자로부터 인해 생겨진다고 그는 간파한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중들에게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나쁜 설교"이다. 청중들을 실망시키고, 말씀의 사역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실망시킨다는 점에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악한 설교"이다. 그러므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Faith comes from hearing, 히10:17). 다시 말해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으며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면케 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말씀의 능력과 역사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도전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본문"으로부터 받아,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로 대두되어진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많은 설교의 장벽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을 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는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사역임을 천명하셨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준다. 오늘도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설교를 이해할 때, 이 사역은 교회가 포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부르심(calling)이요, 거룩한 위임(commission)이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사역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이며,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신인협력의(synergistic)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역이 바로 행해질 때, 생명이 부여되어지며,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어떻게" 이 사역을 감당해 갈 것인가이다.
그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문화는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dumbing down)"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의 예배와 설교가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서 깊이 도전을 받고 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물결은 설교 사역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향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산업(entertainment industry)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과 혼을 앗아가 버리며,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벗어나 포스트모던 가치체계로 나아가는 오늘의 문화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말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커뮤니케이션의 환경 역시 설교 사역에 있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인간의 지각기관(sensorium)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메시지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지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되는 매체 역시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복음적인 과제는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현대인의 정신과 지성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 위해 계속적인 방법론의 개혁을 요구한다.
다시 돌아보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
70년 이후 북미의 설교학계에서 태동되어 발전을 거듭해 온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은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오늘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할 것인가에 관심하면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해 왔다. 앞의 글들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은 무기력하게 만드는 문화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진행되어 가는 설교 사역에 활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형태라기 보다는 문화 사회적인 변화가 계속되는 한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방법이기에 우리는 결코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누를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설교 방법론들이 그 나름대로의 가능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 설교의 형태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설교 방법론이 만능일 수는 없고, 어느 누구에게나 그 치수는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신데릴라의 유리구두와 같이 그것을 신기만 하면 저절로 "왕자비"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변화하는 시대에서의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관심하게 해주며, 특별히 기독교의 설교가 오늘의 시대에도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들려지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변화하는 문화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청중들의 삶의 자리와 의식(consciousness)의 변화를 고려하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설교의 틀을 제시한다. 이러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은 주로 설득(persuasion)보다는 청중들의 영적인 차원의 형성(formation)에 초점을 맞추며, 단순한 말씀의 전수(transformation)보다는 말씀의 경험(experience)에 대해 깊이 관심하면서 방법론적인 틀을 구축해 나간다.
특별히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하고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 유형들이 포스트모던화 되어가는 오늘날의 문화 사회적 상황 가운데 서있는 한국 교회 강단을 고려할 때,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많은 도전을 한국 교회에 던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난 1세기 동안 누렸던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가 과제로 남겨진다. 지속적인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위해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의 추구할 때, 북미의 교회가 30여년전 우리와 비슷한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추구했던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위한 좋은 유비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설교 방법론에 대한 관심과 청중의 역할,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 그리고 설교의 언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한국 교회 강단에도 많은 도전과 유비를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하여
이러한 현대 설교학에서의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는 새로운 문화 사회적 변화의 시대 가운데 서있는 한국 교회 강단에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을 부여해준다.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시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들려지는 설교가 되어지며,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사항들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 추구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 청중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고려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청중은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passive receiver)로 이해되어져 왔다. 설교자가 준비한 말씀을 잘 전달해주면 청중들은 그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최종적인 종착지이며,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귀를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청중은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는 동반자(partner)이다. 설교를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the event of encounter)으로 이해해 볼 때, 그리고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보다 강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보다 깊은 헌신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청중 이해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현대 설교학의 중심적인 관심의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청중들이 수동적인 수령자들로 여겨졌다면, 설교자들은 청중들보다는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원천(source)이었다. 그는 높은 위치에서 말씀을 배설하는 권위자였으며, 메시지의 원천으로서 군림하는 동안, 청중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단순히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였다. 청중들은 설교가 전달되어 가는(transmit) 설교의 기착지(the destination of the sermon)였다. 이러한 설교자와 청중들의 관계는 "수도관의 메타포"를 통해서 가장 잘 설명되어질 수 있다. 수원지에 가득 담겨 있는 물이 수도관을 통해서 물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전달되어진다. 설교자는 수원지와 같이 말씀의 풍성함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빈약한 하위 장소로 옮겨 보내진다. 설교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이 관계의 구도는 자연히 명령적이고 권위적이며, 수직적인 설교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 패러다임은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단절을 야기하며, 기존의 권위에 대해서 저항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는 이러한 권위적이고 명령적인 체계는 배척받게 될 것이며, 비효과적인 방법이 되어질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발전과 함께,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와 청중들의 위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설교자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자리인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나아왔다. 그들은 청중들과 같은 지체이며,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중석으로부터 올라와 서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청중들은 설교자와 함께 말씀의 여정을 함께 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여정을 함께 해 가면서 서로 돕는 존재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는 자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서로 작용하는 공동 작업이 되어가야 하며 청중의 역할과 관련하여 상호 작용적인 설교(interactive preaching)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말씀의 수동적인 청취자가 아니라 말씀의 여정을 함께 해가는 파트너로 새롭게 청중들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술작품이 보는 관객들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처럼 설교는 청중들에 의해서 완성되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는 공동적(communal)이며, 상호 작용적(interactive)이어야 한다. 상호 작용적인 설교는 설교의 완성을 위한 책임을 함께 공유하도록 청중들을 초청하며,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한다. 먼저 청중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여정을 함께 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와 문화에 대해서 관심하며, 설교의 목표는 청중들의 귀에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다. 상호작용 설교는 복음을 함께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함께 서며,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좌 앞에 청중들과 함께 서있는 존재이다. 피동적인 청중으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로,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과 그 결론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하며 그 메시지의 결론에 함께 도달해 가는 청중의 참여가 있는 말씀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설교의 언어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언어는 존재를 형성하며(to form), 창조하며(to create), 변화시킨다. 언어는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커뮤니케이션 하시는 도구이며, 복음 증언의 가장 중심적이 도구이다. 복음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어진다. 또한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의 메카니즘을 그 핵심으로 한다. 설교에 있어서 어떠한 언어가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것 이상의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실체(reality)에 이르도록 도와주며, 사람들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적절하게 사용된 언어가 인지기관과 영성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experience)하게 해준다.
다른 비언어적인 요소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지만 설교 사역에 있어서 언어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며,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를 일어나도록 하는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들며,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되어 간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다른 비언어적인 요소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지만 설교 사역에 있어서 언어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이다.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들며,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되어 간다. 특별히 현대 설교학은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설교에 있어서 언어 신학적인 측면에 깊이 관심한다. 오늘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communication)할 것인가를 깊이 관심한다면 오늘의 청중들이 어떻게 듣는가와 어떤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지는 가를 깊이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전통적인 설교 이론들은 교리나 명제를 전달하는 명확한 언어(clarity) 사용에 대해서 관심해 왔다면, 현대 설교학은 참여(engagement)의 언어를 중요시한다. 전자가 논리적 합리성을 가진 언어의 메카니즘을 선호했다면 후자에서는 플랏의 언어로의 전환을 꾀한다. 사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 신학은 명확한 논리와 명제를 통해서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화랑과 같음을 외면해 왔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대 신학에서는 이야기와 같은 언어구조를 통해서 신학함에 깊이 관심 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명제적이고 논쟁적이며, 명령적인 산문(prose) 언어 스타일에서 이야기, 메타포, 상상력, 이미지 등이 중심을 이루는 시적 언어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시적인 언어라 함은 흔히 문학에서 말하는 운율이나 리듬, 박자를 맞추는 정형화된 시나 정형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시적인 형식을 갖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 움직임이 있는 언어를 의미하는 말로 쓰여진다.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고, 조직화되고, 이성과 합리성의 흐름을 뛰어넘어 생동감이 넘치는 살아있는 언어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월터 브르그만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고 시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이러한 시적 언어는 포괄적으로 설교 안에서 이야기 언어와 형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공헌을 하게 된다. 은유적(metaphorical)이고 상상력이 담긴(imaginative), 보여주는 언어들을 사용함으로서 설교자는 청중들이 우리 주변의 세계와 우리 안에 있는 세계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게 해준다.
그 동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용되어온 설교의 언어들은 전통적인 설교 이론이 추구하는 형태인 논리적이고, 논증적이며, 명령적이고, 분석적인 언어가 주종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언어는 좌뇌를 자극하여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여지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어떤 정보에 대한 지적인 지식의 축적을 돕는 언어이며, 지성에 호소하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진리의 세계를 형성하여 변화(transformation)를 일으키는 데에는 약점을 가진다. 그러나 우뇌 접근방식은 감정에 호소하며,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즉 귀로 듣는 말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응답하게 만들어 주는 언어이다.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 위해 어떠한 언어의 메카니즘이 사용되어야 하느냐는 설교자의 깊은 관심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듀크 대학의 설교학 교수인 리챠드 리셔(Richard Lischer)는 설교를 교회의 언어로 정의하면서, 설교가 사건(event)에서 구성(formation)으로, 예화에서 이야기로, 단순한 본문의 해석(translation)에서 본문을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설교의 언어와 깊이 관련하여 종합적인 이해를 제시한 것인데, 설교 언어가 구성(plot) 되어야 하며,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언어, 또한 단순한 성경에 대한 해설이나 정보 제시로 보다는 언어를 통한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언어체계를 갖추야 함을 시사해주고 있다. 설교 언어의 갱신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는 현대 설교자들에게는 가장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은 복음의 전달자들이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쇠진케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설교의 형태를 고려해야 한다. 설교의 형태는 설교 가운데서 무엇이 일어나게 할 것이지,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조직적인 계획(organizational plan)이며,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지배받아야 하는 것이다. 설교의 형태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설교가 흘러가는 방향을 결정지어지고, 그 흐름을 결정짓는 강의 제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해 왔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를 못했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설교 방법론에 대한 학대"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듣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설교의 효과성을 높여 주지만, 설교 방법론에 대한 무관심은 설교에 있어서 지루함과 설교에 대한 권태감을 야기하는 주원인이 되어진다. 이것이 단순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설교자를 꼬집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루함과 권태감은 설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며, 믿음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되게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에 고착되어 왔다. 전개방식은 주로 연역적인 방법을 널리 사용했으며, 논증적인 방법의 울타리 안에 안주해 왔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이러한 방법론적인 틀에 묶여왔다. 서구 교회도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래 거의 300여년 동안 이 설교의 틀에 안주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에 있어 틀을 가져다주고, 또한 활력을 갖다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려는 설교자는 마땅히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어떻게 말씀이 들려지는가를 관심해야 할 것이며, 인간의 의식 속에 "어떻게"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관심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현대 설교학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귀납적 설교, 이야기 설교,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등은 방법론에 관심한 현대 설교학계가 내놓은 결실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새로운 설교 방법론과 패러다임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게 하는 일에 관심해야 할 것이다.
설교의 완성: 설교자의 기도와 영혼에 대한 열정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혹자는 이러한 요소들만 고려된다면 설교는 "완성"되는 것이며, "들려지는 설교"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만족되어지는 것인가를 묻는다. 학문으로서 설교학은 경험과학적인 측면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모든 연구와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나 설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고, 증거하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설교는 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며, 그 생명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이다. "설교가 설교자보다 더 생명력이 있을 수는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하고, 죽은 설교는 듣는 사람을 죽인다. 모든 것이 설교자의 영적 성품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서 설교자는 최종적으로 설교자의 영적 준비에 관심해야 한다.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와 복음의 영광이 얼마나 잘 드러나느냐는 설교자의 영성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 경주한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골방을 통해서 완성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기도를 강력한 힘으로 삼고 있지 않는 설교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역에서 연약한 도구이며 이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무기력할 뿐"이라는 바운즈의 주장은 옳다.
기도와 함께 설교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복음과 영혼에 대한 열정이다.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이 설교자는 풍성한 식탁과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설교와 영혼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열정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도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임의로 생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열정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로 결정되어진다. 즉 설교자의 영성이 이를 형성해 준다. 거룩한 열정은 언제나 골방에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거룩한 열정은 하늘에서 기름부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심도 깊은 설명들이 주어지고, 뛰어난 짜임새로 설교를 구성한다고 해서 능력있는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능력을 설교에 부여하는 것은 설교자의 가슴에 복음과 영혼 때문에 타오르고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설교자의 말에 힘과 예리함,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설교자의 열정이다. 죽어 있는 회중들에게 그러한 충격과 자극을 일으키는 것도 바로 설교자의 열정이다. 이런 거룩한 열정을 통해서 설교는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져 나가게 될 것이며,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루펠 선교사 일행이 북극에 도착했을 때 짐을 내린 후 타고 온 배를 불질러 버렸습니다.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죽음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북극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능력은 땅에서 오지 않습니다. 더욱 머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변화하는 오늘의 삶의 세팅 속에서도 하나님이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 연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설교자가 최종적으로 고백할 것은 능력은 땅에서도, 머리에서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가는 말
작금에 이르러 한국 교회 설교는 급변하는 문화 사회적 변화 앞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은 붕괴되고, 전혀 새로운 상황이 태동되고 있으며,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 그리고 오늘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의 변화는 설교 사역이 점점 어려워지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오늘의 청중들은 메시지를 받는 방식이 달라지고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틀, 즉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세대는 자기 부모 세대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전통과 예배, 그리고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며, 또한 그들의 취향과 즐거움(entertainment)을 따라 행동하는 세대이다. 현대 전자매체의 영향하에 있는 오늘의 청중들은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권위적인 스타일, 직선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해 주는 메시지를 원한다. 이러한 변화하는 설교의 상황은 설교의 변화된 위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와 함께 우리는 "설교의 위기"들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 강단은 회복되고 개혁되어야 할 설교 갱신의 강력한 요구 앞에 서있다.
한국 교회의 지난 한 세기는 설교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설교 영광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도 설교의 영광은 계속될 것인가? 변화하는 새 시대는 그에 걸맞은 새 틀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의 쉬프트(paradigm shift)를 요청한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교회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존의 틀을 벗고 새로운 틀을 입어야 할 당위성 앞에 서 있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한국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현장을 앞서 경험하여온 북미 교회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 급격하게 변화되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설교자들과 설교학자들의 몸부림은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의 형성과 전환이 이루어지게 했다. 지난 40여년 동안 북미의 교회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와 설교의 위기를 함께 경험하면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움직임들과 논의들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설교의 혁신하여 이 시대 속에서 들려지는 설교가 되게 하려는 노력들이었다. 청중들과 교회가 믿음 위에 세워지며,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설교학의 중심 흐름인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들려지는 설교이게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설교의 형태와 구성, 그리고 설교의 언어와 보다 효과적인 매체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 추구에 대한 당위성과 유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설교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좋은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설교는 그 사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신학(contextual or local theology)의 관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상황을 위한 적합한 설교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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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서의 설교의 형태(2) - 이야기식 방법과 전개식 방법
들어가는 말
거대한 변화와 함께 옛 설교 방법론과 틀들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할 때, 설교학적인 형태와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추구는 설교를 새롭게 하고(renewal), 재구성하는데 있어(re-forming)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추구들은 70년대 이후 북미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 리차드 에슬링거(Richard L. Eslinger)는 "설교학의 코페루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현대 설교학의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설교와는 전혀 다른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설교의 형식(form)에 대한 추구, 청중에 대한 재 이해, 설교의 전개에 있어서 귀납적인 방법의 도입, 그리고 이야기의 재발견, 설교의 구성에 있어서 움직임의 추구, 새로운 설교의 언어 활용 등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의 중심에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별히 1970년대 초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의 기념비적인 책인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의 발간과 함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추구는 초창기에는 주로 거시적인 패러다임의 변환에 관심하였다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미시적인 부분에 관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거시적이라 함은 패러다임의 전반적인 틀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을 뿐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80년 초에 들어와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가 그의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서의 방법론적인 제시들이 선을 보이게 된다. 또한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방법론(phenomenological move method)을 제시함으로 또 다른 설교의 형태에 대한 제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월에서 소개한 귀납적 설교방법론이 전반적인 설교의 형태의 원리적인 특성을 제시했다고 한다면 이 두 학자들은 설교의 형태에 있어서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형태와 버트릭의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재발견
설교가 "전달될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되어질 수 있음을 감안하면서, 현대 설교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려지는 가에 대해 깊이 관심해 왔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들음(hearing)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청중들에 깊이 관심하게 될 때, 설교자들은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깊이 관심하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지으며, 설교의 자료들의 효과적인 배열을 도움으로 그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인이 되며, 설교의 효과적인 전달의 차원에서 볼 때 절대적인 요소이다.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틀을 결정지으며, 힘을 부여해 주는 요소이며, 말씀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추구는 이러한 설교의 형태에 대해 관심하면서 설교 가운데 이야기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관심해 왔다. 그래서 이야기를 도입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형태를 따르기도 하는데, 이야기는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복음서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어떠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가에 대해서 질문 받으셨을 때에도 그분은 신학적인 논리나 논지로 그 사실을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신학적인 논리로 규명하려 하시지 않고,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용하셨다. 왜 그분은 거의 이야기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일까? 이야기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마 13:34)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며(understand),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킨다(attention). 또한 이야기는 오래 기억하게 하며 (remember), 감성적인 부분들을 고양시켜준다(stir up).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택하신 이유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성들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설교학에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는데, 6-70년대를 지나면서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사용이 중심적인 이슈가 되어졌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설교에 있어 이야기 사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체계적인 방법론 제시에는 약하였다. 그러나 1980년도에 켄사스 시티의 성 바울 신학대학원의 설교학 교수인 라우리가 {이야기식 설교 구성}(The Homiletical Plot)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라우리는 전통적인 설교 형태가 가지는 약점을 비판하면서 이야기와 같은 구성 혹은 줄거리(plot)를 가진 형태의 설교 형태를 어떻게 준비하고 전달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야기식 설교 방법
라우리에게 있어서 설교는 "이야기와 같은 예술의 형태"(narrative art form)이다. 그러나 여기서 라우리가 사용하는 "이야기(narrative)"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이야기 설교(story sermon)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의 방법론에서는 설교가 반드시 이야기로 되어져야 한다기 보다는 "이야기와 같은"(story-like), 즉 "이야기체" 혹은 "이야기식"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야기의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라우리는 다소의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라우리의 설교 방법에는 이야기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교에는 이야기와 같이 줄거리가 있고, 플랏(plot)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움직임(movement)을 통해 진행해 간다. 이야기에는 처음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으며, 나중의 결론을 향하여 계속해서 움직여 간다. 즉 기, 승, 전, 결의 형태를 통해서 움직여 가는 것이 이야기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연속성"(continuity)과 "움직임"(movement)이며, 이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플랏이다. 그러므로 라우리에 의하면 설교는 어떤 정지된 공간에서 정체된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즉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in-time)이다. 이야기체 설교는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이 훨씬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과정을 걸쳐, 기대할 수 없었던 역전이 일어나게 되고, 대단원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가진다. 본문을 통해 청중들이 느끼는 어떤 필요가 설교를 구성하는 과제로서 역할을 하게 되며, 설교는 이러한 과제를 딜레마를 형성하여 서술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청중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함(ambiguity)이 심화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 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모호함을 형성할 것인가" 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모호함이 야기되고,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얼마나 제시되느냐가 훌륭한 설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청중들은 그런 모호함으로부터 시작된 설교가 나머지 부분에서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 가는지를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 따라서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서론에서 제기된 그 모호함을 해결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어떻게 구성(plot)되느냐하는 것은 성공적인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우리는 이야기식 설교 구성을 위한 기본적인 단계들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이야기식 설교가 움직임을 가지고 진행되기 위한 중요한 지침들이다. 물론 이것들은 최근에 발간한 그의 책에서는 다소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그 단계도 축소되었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초기의 이론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1) 모순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 평정을 깨뜨리라! (Upsetting the equilibrium)
이 첫번째 단계에서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청중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 설교의 주제 속으로 참여시키되, 모호함을 야기시킴으로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그들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단계이다.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세계의 모순점과 모호함이 제시되면서 청중들은 의혹감과 당혹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중요한 단계를 잘 개발하는 것은 설교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이 단계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내기 위해서 극작가들이나 방송작가, 혹은 소설가들의 접근 방식에 주의하는 것이 한가지의 도움을 얻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청중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든지 간에 그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세계로 청중들을 끌어들인다. 이와 같이 선포되는 설교의 첫 번 단계는 마치 여러 종류의 갈증이나 긴장을 소개하고 있는 연극이나 영화의 서두 장면과 유사하다.
이 단계를 준비함에 있어서 몇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먼저 너무 주제와 무관한 모호함을 제시함으로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핵심 줄거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청중들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라우리는 그의 실패담을 이야기한다. 요나서의 설교를 통해 "요나의 편협함과 하나님 사랑의 거대함"을 설교하기를 원했다. 그는 서론 부분에서 20세기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큰 물고기의 이야기를 과학의 시대에 듣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흥미를 위해서 사용한 그 서두는 모호함과 당혹감을 일으켰지만 그러한 깊은 당혹감을 가진 청중들을 그가 전하려는 주제로까지 인도하는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그 모호함과 의혹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단계에서 주의할 것은 줄거리의 해결점을 미리 말하지 말아야 하면서도 모호함으로 향하는 방향은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들은 줄거리가 진행될 방향과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지만 그들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청중들의 평형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일단 평정이 뒤집어지면 설교는 문제를 엄밀히 탐구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2) 모순점과 불일치를 분석하면서 그 모호함을 심화시키라! (Analyzing the discrepancy)
두번째 단계는 이미 보여진 모순점과 모호함을 분석하는 단계이다. 제기된 문제를 탐구하고 왜 그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면서 그 문제를 진단한다. 전체적인 설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단계로서, 라우리는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그 이후 단계에서 주어질 복음을 심도있게 경험하느냐는 이 단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근거도 제시되어질 수 있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인간 실존의 상태까지 심층 분석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 예화로 대치되어서도 안되며, 깊이 있는 진단이 주어져야 한다. 다음 단계에서 제시될 해결의 실마리를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로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통하여 설교자가 깊이 관심해야 할 것은 모호함이 주는 긴박감, 즉 서스펜스가 형성되어지고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라! (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이 단계는 라우리의 표현에 의하면, "아하!"가 터져 나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문제 혹은 모호함의 진정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복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전되는(reversal) 현상이 일어나고, 단순하게 지적으로 아는 단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뒤집어지면서 복음의 세계가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인 역전의 원리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처럼, 설교자들은 이 단계에서 역전의 원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복음을 경험하게 하라(Experiencing the gospel)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이제 청중들은 복음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진다. 그 이전 단계들은 이 단계를 위해서 존재한다. 모호함을 야기 시키고, 또 그 문제점들을 분석해주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복음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연기하였다가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라우리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단계에서 모호함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또 문제의 실마리가 정확하게 제시되어진다면 복음은 명료하게 경험되어지게 될 것이며, 청중들은 이 단계에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라우리의 방법에서는 이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2, 3 단계를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우리의 최근의 저서에 의하면 이 단계는 다른 단계와 함께 주어지는 유동적인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체 설교의 가장 핵심은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고,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5) 결과를 기대하게 하라! (Anticipating the consequences)
지금까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은 모순이 분석되었을 것이고,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서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제 설교의 플랏에 있어서 모호함과 팽팽했던 긴장감은 이완되면서 마음의 해답을 얻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렇게 주어진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미래로 투사되면서 결론을 이루어 가는 단계이다. 경험한 복음을 중심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언급하는 단계이다.
이와 같이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은 이야기의 플랏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이며, 설교가 진행되어 가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플랏된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 비교할 때, 청중들이 기대감과 관심을 가지고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the homiletical journey)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으로서의 복음을 강조하는 설교라는 점은 그것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우리는 이 설교 방법론에서 반드시 딜레마를 서술함으로서 설교를 시작하여, 그 혼동에 대한 심화의 단계를 거침으로서 청중들로 하여금 모호함을 경험하게 하고, 반전을 통하여 해결책을 찾아 나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설교가 서론 부분에서 긴장감을 전혀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의 역동성을 잃게 한다면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은 신선함을 제시해주는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청중들은 그들이 듣게 될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모호함이 어떻게 해결되어가는 가를 간절히 보기 원할 것이고, 청중들의 기대감과 참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상황과 설교 현장에 이러한 이야기식 설교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와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설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이 설교 방법이 한국교회의 청중들에게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인가는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주목해야 할 사항이지만, 이러한 설교방법론이 문제 상황에 봉착해 있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강단에도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기대되어진다.
전개식 설교
전개식 설교 방법은 밴드빌드 대학의 설교학 교수인 데이빗 버트릭이 제시한 방법으로 그 정식 명칭은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phenomenological move method)이다. 버트릭은 설교 형태와 청취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학적인 관계성에 깊이 관심하면서, 설교 과정 속에서 청중들의 의식 속에 무엇이 일어나는가와 관련하여 설교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성들에 대해서는 그의 명저, {설교학}(Homiletic)과 다른 저서에서 정교하게 설명해 준다.
버트릭에 의하면, 300여년 가까이 설교학계를 지배해왔던 논리적인 설교학(rational homiletics)은 급속하게 변화되어 가는 시대 가운데서 사람들의 인식의 방법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역동적인 방법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설교가 오늘의 시대 속에서 들려지는 말씀이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설교자들의 임무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태동되고 있는 새로운 인간 의식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의 시대적인 특징들과 신학적인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버트릭은 설교는 정적인 장으로서가 아니라 가상과 사건의 움직임이 있는 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설교는 정물 사진으로가 아니라 활동사진(motion-picture)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하려고 하는 진리에 대한 서술들이 에피소드들로 연결되어 이야기와 같이 움직임이 있고,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움직여 가면서 생생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따라 메시지를 전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도 그러한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도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대화하고, 정보를 나누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설교는 성경본문을 대할 때, 정적인 장으로 보았으며, 설교자가 정한 명제를 보증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어지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특성을 버트릭을 추출식 해석학(hermeneutics of distillation)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방식은 진리를 정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광활하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단순한 명제를 위한 진술 정도로 전락시켰으며, 이러한 사실들은 본문을 유기체로 보다는 정체된 정물화(still-life picture) 정도로 전락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설교는 성경에 관해서(about)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게 하는 것(speaking of Scripture)이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움직임 속에서 전달되어지는 것(truth in motion)이기 때문에 설교가 어떤 말씀이나 이미지, 사건들을 동적인 방식으로 전개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진리 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해 가는 언어의 움직임이다. 계몽주의 이래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틀에 사로잡혀 온 전통적인 설교 방법론(captive voice)은 이제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야만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의 해방"을 부르짖는다.
버트릭은 좋은 설교의 형태는 카메라와 같이 작동하는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여 세워졌느냐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들은 인간 의식의 렌즈를 통해 보여지고, 관찰되어진다. 사진 작가가 어떤 물체를 필름에 담으려고 할 때, 배경을 고려하고, 보다 넓은 정경을 담을 것인지, 근거리에서 찍을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즉 구조를 결정하고, 보는 각도를 선택하여, 셔터를 눌러 그 정경을 필름에 담게된다. 그리고 그것이 담아졌다면 또 다른 정경을 담기 위해 비슷한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자들도 일련의 장면을 만들어 청중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해하게 함으로서 그것을 청중들의 의식(consciousness)속에 인식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청중들이 그들의 마음의 필름 속에 말씀의 이미지가 심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청중들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설교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how sermons happen in consciousness)"에 깊이 관심해야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설교 방법론은 현상학적 방법으로 불리어 진다.
이러한 버트릭의 방법론은 관광 가이드의 메타포를 통해서 보다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단을 안내해 가는 가이드가 어느 지역을 안내할 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려줄 때, 관광객들의 의식 속에는 그에 대한 영상이 맺히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서 또 비슷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광경들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그렇게 관광을 마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지나온 장면들이 분명한 영상으로 맺히게 되고, 마치 파노라마처럼 자리잡게 될 것이다.
버트릭의 전개식 설교 방법은 청중들이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분명한 영상으로 의식 속에 자리 잡도록 하는 구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청중들이 어떤 틀을 통해 어떤 사실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깊이 관심한다. 이렇게 설교가 개별적인 개념이나 요소들로 구성되게 되는데, 이러한 요소들을 순서에 따라 설명해 가기 위해서 배열된 언어의 모듈을 버트릭은 "움직임 혹은 장면"(move)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설교가 대지를 만들어서 어떤 명제에 대한 논증의 형태로 설교가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전개식 설교는 언어의 움직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장면의 "전개"(moves)에 의해 진행된다. 이런 움직임들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청중들이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련의 언어의 모듈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메시지의 결론을 향하여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진행해 간다. 그러므로 청중들 앞에 장면들이 펼쳐지고 그것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구조를 따라서 전개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버트릭의 설교 방법론을 "전개식 설교"라고 명명한다.
전개식 설교 방법은 청중들이 어떻게 듣느냐를 관심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4-6개 정도의 "움직임 혹은 장면"들을 갖는다. 이것은 청중들이 무엇에 집중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각 움직임들을 4-5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할 것을 요청한다. 각 "움직임"들은 세 가지의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여는 말" (opening statement), "전개"(development), "닫는 말" (closure)이 그것이다. "여는 말"은 아주 선명한 문장을 통해 이 움직임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움직임의 중심개념을 언급해 주어야 하며, 혹 중간의 움직임이라면 그 이전의 것과의 연결성을 꽤할 수 있으면 바람직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는 그 움직임이 가지는 관점(point-of-concern)이 선명히 제시되어야 한다. "전개" 부분에서는 중심 개념이 상세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명료화나 예증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무난하겠으며, 그것에 대한 반대 개념을 제시하면서 진행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그 장면에서 묘사하려는 중심 부분이며, "여는 말"과 "닫는 말"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앞 뒤의 요소와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닫는 말"은 마지막 문장에서 중심 개념에 대한 움직임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면서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청중들의 의식의 카메라는 셔터는 닫혀지고, 필름은 다음의 움직임을 위해서 준비 상태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각 움직임들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는 우리가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는 기술들이다. 모든 움직임들은 정교하게 디자인되어야 하며, 또한 다르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의 언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와 어떻게 적절한 움직임을 만들어(move) 설교를 구성하느냐(structure)가 중요한 관건이 되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를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를 통해 설교를 준비한다면, 본문 자체가 어떠한 움직임의 구조 속에서 되어있는 본문임을 알 수 있다. 부자가 나오고, 가난한 사람이 나오며, 두 사람의 위치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나오고, 부자의 애절한 간청이 나오며, 아버지 아브라함의 엄중한 대답이 나온다. 이 본문 자체가 5개의 움직임(move)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더 구체적으로 찾기 위하여 우리는 주석 작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적어도 주석의 단계를 가지면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즉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산해진미와 같은 음식을 먹고 있고, 대궐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직 아무런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지 못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남의 집 처마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에게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이라는 뜻의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부자집 쓰레기통에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이고 들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을 때에도 그것을 몰아버릴 기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성경은 이 두사람에 대해서 대조시키면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문"이라는 상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갑자기 그들의 처지는 역전되어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으며, 생전에 그는 부자집 음식찌꺼기로 연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아브라함이 청한 식탁에 앉아 있다. 이러한 주석작업을 통해 본문을 세밀하게 연구한 후, 이제 설교의 디자인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설교의 일련의 움직임들 사이에 설교의 서론과 결론이 위치하게 한다. 서론은 이 비유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서론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 두 움직임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들을 묘사해주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따라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움직임은 역전을 통해 놀라움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상하시는가? 부자는 그가 단순하게 부자였기 때문에 그는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움직임은 부자의 간청을 소개하고, 그는 이제 낮아졌고, 나사로를 우러러보아야 할 상황 가운데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부요한 상태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혀 모르고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은 이 지구 상 어디에나 있으며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음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외면했던 부자는 "멀리"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음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움직임에서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냉정한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에 놓여 있는 "큰 구렁"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이것은 안타깝게도 넘을 수 없는 종말론적인 영구적인 것임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본문은 비극적으로 끝나버리고 도무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를 결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우리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을 기회가 주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개방을 위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겠다. 오늘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의 무관심의 대문은 하늘에서, 그리고 하늘로부터 도무지 되돌이킬 수 없는 구렁을 만들어서 하늘의 대문이 닫혀지게 될 수 있음이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본문이 비유이기 때문에 본문의 움직임을 따라 구성했지만 다른 본문의 경우, 주제와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따라 다른 유형의 움직임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성경의 내용 뿐만 아니라, 이야기나 경험, 그리고 설명이나 예증들을 통해 움직임을 형성하여 설교의 시작부터 설교의 종결까지 나아가게 하는 움직임을 통한 전개의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버트릭의 방법은 우리가 설교할 때, 청중들의 의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 또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해주며, 언어가 가지는 힘과 무엇인가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깊이 관심하도록 해준다. 또한 설교자에게 상당한 융통성을 부여해 줌으로서 설교의 전개 과정을 창조성을 발휘하여 구성하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나가는 말
70년대 이후 논의 되어온 현대 설교학에서 제시되어온 대표적인 설교 방법론들을 지난 호에 이어서 세 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설교가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설교의 형태들이다.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의 방식을 따라 연구되어 제시된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아직 낯선 방법들일 수 있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하는데 일익을 감당할 방법론들이다. 그러나 이 방법론들을 가능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 설교의 형태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설교 방법론이 만능일 수는 없고,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맞는 치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마치 신데릴라의 유리구두와 같이 그것을 발에 맞추어 신기만 하면 저절로 왕자비가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이나 전하는 메시지, 혹은 본문의 형식을 고려하면서 오늘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데 유익한 방법들을 추구하는 것은 말씀의 선포자들이 계속해서 관심해야 할 내용들이다. 또한 대지설교 혹은 논리적인 설교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 일에 관심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것을 글의 목적으로 삼았지만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따라 설교의 방법론을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게 다듬는 것은 후속되어야 할 작업이라 하겠다. 특별히 오늘의 상황과 청중들을 고려하면서 설교의 형태에 대한 연구는 보다 효과적인 말씀 사역을 위해서 계속되어야 할 작업이다. 아무리 맛있게 준비된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 음식을 언제나 같은 그릇에 담아서 내놓지 않고, 어느 그릇에 담아 식탁을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음식이 훨씻 돋보이게 될 수도 있고,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훨씬 맛있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성찬인 설교는 반드시 들려져야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우리가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관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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