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해답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해답이시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여러 질문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의 '답'이다. 그것이 '福音'이다.
팀 켈러 목사님의 '인생 질문'을 읽고 마음에 감동이 된 내용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encounters with Jesus
회의론자 제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다 The skeptical student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나다나엘은 '교만'과 '멸시'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처럼....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적장자'보다는 동기 중에서 더 어린 사람들을 택하셨고, 다산 여인들보다는 자녀를 낳지 못해 멸시받던 여인들을 택하셨습니다. 기독교는 강자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부분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다나엘을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좋게 평하며 온유하게 대해주십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종교 박사 니고데모,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다
The insider and the outcast (따돌림 받는 사람)
우리는 내부자와 외부자를 자주 구별합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점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내부자와 외부자가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서울 사람과 시골 사람, 경상도와 전라도, 남자와 여자, 젊은 세대와 기득권 세대... 그 차이점에 주목하지만 공통점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몇 시간 비행기를 타기만 해도 그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오직 '한국인'만 남게 됩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죄, 죄인 등에 대해 내부자와 외부자를 쉽게 구별합니다. 허구의 도덕적 언덕에 올라서서 저 아래의 사람들을 판단할 때 더욱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기독교 입장에서는 언덕 위나 아래나 모두 죄인들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소외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화적 장벽을 일부러 뛰어 넘어 말을 겁니다.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그녀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 여인이 그동안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취해온 방법을 지적한 것입니다. 남자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갈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소외층에 국한된 얘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숭배합니다. 숭배의 대상이 선택일 뿐입니다. 돈과 제물을 숭배하면 아무리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충분한 소유란 없습니다. 몸과 미모와 성적 매력을 숭배하면, 나이 들어 노화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땅에 둗히기도 전에 천만번을 미리 죽게 될 것입니다. 똑똑해 보이는 지성을 숭배하면 자신이 늘 발각되기 직전의 미련한 사기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David Foster Wallace)
니고데모는 내부자였습니다.
그의 교만한 자기만족을 지적하시며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죄인이었으나, 내부자 니고데모도 예수님은 죄인 취급을 하십니다. 죄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빠를 사별한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다 The grieving sisters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예수님은 마르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며 하나님의 모습으로 서시지만, 곧바로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러 마리아와 함께 울음을 터뜨리십니다.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진리의 사역'을 베푸시고 마리아에게 '눈물의 사역'을 베푸십니다.
예수께서 비통히 여기며 무덤으로 가셨다는 것은 격분하여 울부짖고 으르렁거렸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린다면 종교 당국이 예수님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면 벌어질, 죽은 자가 살아나면서 벌어질 일대장관을 생각하며 웃으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죽음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의 비참함과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치르셔야 할 대가를 알고 계셨기에 분노하셨습니다. 그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힘없이 죽으신 것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베드로 Peter
안드레 - 베드로의 동생 Andrew
(큰) 야고보 James
요한 - 야고보의 동생 John
빌립 - 바돌로매의 소개자 Phillip
바톨로매 (나다나엘) Bartholomew of Nathanael
도마 Thomas
마태 Matthew
(소) 야고보
시몬 (알패오의 아들) - (소) 야고보의 형제
(유다) 다대오 Jude Thaddeus
맛디아 Matth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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