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원망했다. 배고픔, 목마름, 정탐군들의 부정적 보고 등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의 이유
오늘의 본문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으로 시작된다.
(사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여기서 '내 길'은 사람이 걷는 일반적인 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온 포로로서 겪은 모든 어려운 일들을 의미한다.
'송사'는 억울한 일들을 재판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뜻으로서,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은 정당한데 자기의 그러한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부당하게도 외면당하고 있다는 원망이다.
'여호와께 숨겨졌고 하나님께 벗어낫다'는 말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역시 원망이다. 왜 이렇게 원망했을까?
첫째 이유, 하나님의 침묵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지 수십 년이 지나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고통에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침묵하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거듭 거듭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계속해서 예언을 전했다. '70년이 차야 하니 바벨론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라'는 메시지였다. 오늘 본문의 앞쪽인 '사 40:12~27'에서도 해방자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감격의 말씀들이 포로된 유다백성들에게는 감동이 되지 않고 와 닿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말씀이 따로 있었기에, 그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속적 경고와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말씀이 들렸기에 듣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귀가 둔하거나, 그 말씀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대해 침묵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때가 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시험에 들 때도 있고, 평생 지켜온 신앙이 헛된 것으로 보일 때도 있어, 그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우리도 종종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둘째 이유, 두터운 현실의 벽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들의 포로 생활은 변화가 없었고 원수인 바벨론은 갈수록 건재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변화가 없고 나는 여전히, 아니 아마도 영원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남아 있어야 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두렵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이 흘러나오게 된다. 공회전 하는 자동차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 40:1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렘 29:11 미래와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씩이나 하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계에는 기간과 목적이 있다.) 우리는 내가 지은 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내가 받는 징계는 크고 무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욥 23:8~10 내가 가는 그 길을 오직 주가 아시나니....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책망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이스라엘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두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것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신다. 그 이유는 원망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 14:11 멸시하겠느냐 나를 믿지 않겠느냐)
왜 원망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될까? 그 이유는 '원망은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1세대들이 원망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도 살인과 간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이었다. 원망은 이렇게 큰 죄이다. (고전 10:10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
그런데 우리는 원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가? 원망은 불신이며 거역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을만큼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 원망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원망하는 자는 도전할 수 없고 전진할 수 없다.
김은호 목사님 주일 설교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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