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목사 #약속은끝나지않았다 #할례
부흥의 본질: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우리는 교회에 사람을 가득 채우는 일보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하도록 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 우리는 ‘부흥’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목회자들은 교인이 얼마나 늘었는지,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를 부흥의 척도로 삼곤 합니다. 그러나 공동묘지에 시신이 늘어난다고 해서 부흥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에 단순히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참된 부흥일까요?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가 얼마나 충만한가에 달려있습니다.
예배의 관점 전환: 하나님의 임재 중심 - 웨인 코데이로 목사의 일화
하와이의 뉴호프(New Hope) 커뮤니티처치(웨인 코데이로 Wayne Cordeiro 목사)는 오랜 기간 자체 예배당 없이 학교를 빌려 예배했습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예배할 수 없게 되어 공원에서 예배하게 되었는데, 토요일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드려야 하니 비를 그치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으나, 주일 아침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전자악기와 스피커는 누전으로 터지고 예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좌절하며 기도하던 그에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웨인, 너는 어제부터 단 한 번도 ‘오늘 예배에 내가 함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비가 그치지 않아도 내가 함께하면 예배가 되지 않겠니? 비가 그쳐도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그게 예배가 되겠니?”
그날 이후 그의 목회는 조건이 아닌 임재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최고의 음향, 최고의 미디어, 최선의 준비를 추구하지만, 예배의 심장은 여전히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 예배에 계십니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화려한 시설이나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즉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 만나교회 사명선언문 첫 문장도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가 모든 사역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이 뜨거워지고 방언을 말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수많은 이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는 대로 척척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성령충만의 바로미터: 현상이 아닌 성령님의 다스림과 열매
옛 부흥회에서는 부흥사가 “불 받아라!”를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뜨거운 감정의 현상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 아래 드러나는 순종의 삶입니다. 역사 속 많은 이단은 대개 뜨거운 체험과 신유, 방언의 현상은 있었지만, 성령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비진리로 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마음을 알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좇아, 성령의 인도 안에 살고 있는가?”
주일 예배당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일상에서 성령의 통치가 보이는가가 진짜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부흥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조차도 교회 규모나 예산으로 서로를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마치 공동묘지에 시신이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부흥한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나 외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곧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환경을 최고로 만들고 최고의 시설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모든 선행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 충만이 뜨거운 현상이나 불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불을 받는 현상이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하에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삶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현상만으로는 참된 믿음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이단들이 현상적인 체험에서 출발했던 역사를 기억하며,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마음과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격적 기도 vs. 일방적 주문
기도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상대를 나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대상화(objectify) 하는 태도는, 관계의 인격성을 파괴합니다. 연애에서도 마음의 교류 없이 상대를 대상화한 채 접근하면 사랑이 아니라 소비일 뿐입니다. 심지어 범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필요할 때만 불러 욕구를 해결해 주는 수단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분을 사랑의 주로 알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듣고 응답하며 순종하는 상호적 관계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구하며(마 6:10), 모든 필요를 감사함으로 아뢰되(빌 4:6)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을 배우는 삶(빌 4:11–13)을 훈련합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그분 자체로 만족을 배우는 것—이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신앙의 길입니다.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공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도라면 합당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지니’(요술 램프의 요정)처럼 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격적 주이십니다. 합당하지 않은 소원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먼저 주님을 기뻐하는 상태를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우리 기도는 기도의 내용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다.”
"The function of prayer is not to influence God, but rather to change the nature of the one who prays."
인격적인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는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종종 일방적이고 비인격적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처럼, 무슨 소원이든 세 가지만 말하면 다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합당해야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다른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부끄럽지 않은 기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의 기도는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소원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지니처럼 내 욕망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할례 - 왜 여리고 앞에서 ‘할례’인가? 하나님의 백성 됨을 분명히 하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왕과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행한 기적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전열을 가다듬어 여리고를 정복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바로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인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최소 일주일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모든 군인의 전투력을 스스로 상실시키는 이 명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상식적인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단순히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라는 언약의 표식이자, 세상과 구별된 존재임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힘과 전략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먼저 확립하고, 그들을 지키시고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신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공, 건강, 부요함 등 세상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너는 나의 백성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즉 세상의 가치관과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친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할례를 받고 무력하게 누워있는 이스라엘을 그 어떤 대적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무엇을 포기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진정한 순종은 나의 계획과 욕망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례 1 -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힘을 빼신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여러 차례 깊은 무기력함을 경험했습니다. 아버지의 소천으로 갑자기 부임하게 된 만나교회의 빚과 세습 목회라는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부담감에 쉼 없이 달렸습니다. 출석 교인이 매년 천 명씩 늘어나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설교 도중에 강단에서 쓰러졌습니다.
공황장애, 우울, 수면장애, 이석증…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시간이 3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저 대신 이름난 설교자 12분이 릴레이로 강단에 서 주셨지만, 교인들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젊은 성도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유명한 분들의 설교는 TV를 켜면 봅니다. 우리에겐 ‘목자’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설교가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저는 요로결석을 여러 차례 겪으며, 온몸의 약함 가운데 주님의 손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약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강하심을 경험했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약함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게 하시려는 초대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을 빼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할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수치가 아니라 은혜의 무대입니다. 약함이 강함입니다. 왜냐하면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배우기 때문입니다.
사례 2: 금식과 무력함의 축복
젊은 시절, 우리 교회의 연례적인 특별새벽기도회를 큰 계획 없이 금식으로 인도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금식 후 3일이 지나자 예배 영상 화면에도 제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습니다. 성도들은 “광채가 납니다” 했지만, 저는 두려웠습니다. 5일째 되는 날, 너무 힘이 들어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전엔 제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임재의 도우심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신 것이 내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
무기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길갈에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단 서편의 가나안 왕들은 이스라엘의 강성함에 마음이 녹아있었고,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습니다. 지금 당장 여리고성을 쳐들어가도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뜬금없이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은 남자들은 일주일 정도 전투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보다 훨씬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얻을 많은 것들, 그전에 너희가 나의 백성인 것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기력하게 만드심으로써, '너희가 나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면 내가 너희를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김병삼 목사님은 자신의 삶의 간증을 통해 이 무기력함 속의 은혜를 증언하셨습니다. 목회 초기에 교회를 부흥시키고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공황장애와 여러 질병으로 무기력해지는 시간을 겪으셨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목자예요"라고 말해준 것이 큰 위로와 깨달음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요로결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묵상하고, 자신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붙들게 하는 은혜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셔서 우리의 힘을 빼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무기력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분명히 경험하게 됩니다.
축복의 재정의—관계가 먼저
우리는 건강, 성공, 재정, 직책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얻는 축복이 축복이지, 정체성 없이 얻은 성취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땐 신실하던 이가, 돈을 얻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병이 낫고 건강으로 하나님을 떠난다면, 무엇이 축복입니까?
임재 앞에서 축복의 정의는 세상의 정의와 다릅니다.
균형의 비밀: 율법적 밸런스가 아니라 임재의 민감함
우리는 영성/가정/직업의 균형을 애써 맞추려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균형 잡기보다, 임재 안에서 민감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좌우로 이동할 때 균형은 자연히 맞춰집니다.
“요즘 하나님께 멀어진 것 같지 않니?”—그러면 영성의 자리를 회복하십시오.
“가정이 힘들어한다”—그러면 가정과 직업을 살피십시오.
율법의 강박이 아닌, 임재의 감각이 우리의 자유를 낳습니다.
예배의 승부는 ‘전에’ 난다
예배의 승부는 예배 시간 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살아낸 삶에서 이미 납니다.
김포공항 근처에서 두 시간을 대중교통으로 오셔서 예배드리던 장로님은 늘 “은혜로웠다”라고 하셨습니다. 오고 가는 두 시간이 이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십자가를 보면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킨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주중의 대화가 살아낸 간증이 될 때,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가나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 변화: 유월절과 만나의 종결
할례 이후 성경은 두 가지를 기록합니다.
1. 유월절을 지켰다.
2. 만나가 그쳤다.
왜 만나가 그쳤습니까? 이제는 그 땅의 소산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만나라는 특별한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는 일상의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만 바라보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적을 지나 일상으로 돌아와, 임재를 일상에서 살아내는 신앙입니다.
삶의 영적 숨 고르기와 예배의 성공.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숨 고르기'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적 숨 고르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과 직업, 가정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꿈꾸지만, 목사님은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열려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성공은 예배 시간 자체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전 우리의 삶에서 결정됩니다. 삶의 치열한 믿음의 흔적 없이는 예배가 은혜로울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그친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적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당신의 ‘마음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스라엘에게 할례가 임재의 표식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임재의 표식은 무엇입니까?
순종 = 포기가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되길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서 이것을 포기했다.”—이 고백이 임재의 자리를 여는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식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임재의 표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 “너희가 나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라” 하셨사오니,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전투력과 계산을 내려놓고, 임재 아래 순종하는 백성 되게 하옵소서. 광야의 기적에 머물지 않고, 약속의 땅의 일상에서 임재를 살아내게 하옵소서. 때로 찾아오는 무기력함과 고통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영적 숨 고르기를 하며, 성령의 민감함으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난을 이해하고 이기는 방법 (1/2) (1) | 2025.10.29 |
|---|---|
| 야곱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0) | 2025.10.27 |
|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감사가 먼저입니다 (0) | 2025.10.26 |
| 행동하는 믿음이 있는가 (여호수아 2:9-11, 18, 21, 24) (1) | 2025.09.27 |
| 그 길은 순종의 길이었다 (0) | 2025.09.27 |
|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힘에 대하여 (0) | 2025.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