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박영선 목사
고난은 형벌이나 실패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인간을 '책임' 있는 성숙한 존재(하나님의 파트너)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자 '고등 교육'입니다.
제1부. 질문의 재정의: 우리는 왜 고난 받는가?
1. 기독교 신앙의 본질: '대등한' 파트너로의 초대
* 우리는 "왜 고난이 있는가?"라고 묻지만, 이 질문은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가?"로 바뀌어야 합니다.
*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종'과 '주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대등한 인격적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눌 파트너'로 부르셨습니다.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세상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여러 일들을 통해 우리를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가가 근본적인 질문이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건너뛰고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만 남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본래의 뜻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날마다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빠져 버렸고, 그 현실 속에서 복을 받아 만사형통과 평안 만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두 번 다시 하나님을 찾아와 구차하게 간구하지 않도록 제게 복을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에는 항상 고난이 필연적이며 그 고난이 심지어 복이 됩니다. 그 과정을 출애굽에서부터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 '자유'의 필연성: 파트너의 조건
* 대등한 관계는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자발성은 '자유'가 주어져야만 가능합니다.
믿음과 사랑뿐만 아니라 '순종'도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 사랑, 혹은 신앙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 나를 포기하고 맡기면 그다음엔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순종'마저도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자발성을 가지고 자발적인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자유를 가진 존재가 올바른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는 언제나 열려 있는 가능성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하시면, 우리가 정당한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는 우리의 '실력'의 문제가 됩니다.
*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필연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포함합니다.
* 고난은 이 '자유'를 가진 우리가 '책임'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훈련장입니다.

제2부. 출애굽의 비유: 구원의 '신분'과 성숙의 '수준'
1. 애굽 (노예 상태)
* '애굽'은 자유가 없는 대신, 먹고사는 것에 대한 '책임'도 없는 상태입니다. 시키는 일만 하면 생존이 보장됩니다.
2. 홍해 (구원의 '신분')
* '홍해'를 건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노력 없이 '신분'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3. 광야 (훈련의 '수준')
* '광야'는 진짜 문제입니다. '신분'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수준'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 그들은 '자유'를 얻자마자 현실적 고난(물, 음식, 적)에 부딪혔고, 즉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습니다.
* 이는 '책임'져야 하는 '자유'보다 '책임' 없는 '노예 상태'가 낫다는 고백입니다.
4. 결론: '광야'는 필수 과정
* 구원은 '신분'의 즉각적인 변화와, '수준'의 평생에 걸친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은 '노예 수준'의 우리를 '자유인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광야'라는 훈련 과정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출애굽 사건을 단순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쉽게 풀려나 여러 기적 속에서 행복한 나라로 갔다'라고 요약하기에는, 우리가 잠시 들여다보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그 백성들은 물론 그것을 오랫동안 기대하고 소원했던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이었으니 자유를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가 그들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 바로가 항복하여 그들을 풀어주지만, 다시 마음이 변해 홍해 앞까지 쫓아옵니다. 건널 수 없는 바다와 뒤쫓는 애굽의 병사들 사이에서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자리에 빠져 울부짖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가? 잘살고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고 해놓고, 왜 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느냐?"라고 원망하자, 모세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오늘 너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 그들은 바다를 건너 해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에서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원망하고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길이 고단하다는 여러 이유가 그들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기도 하며, 메추라기로 고기를 먹이시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드디어 약속의 땅 앞, 가데스 바네아에 서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고 그 보고를 받는 장면이 민수기 13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땅을 정탐했던 12명 중 10명이 "우리는 못 들어간다. 그들이 겁난다. 그들은 너무 강대하고 우리는 그 땅을 빼앗을 실력이 없다."라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 핑계는 곧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잘살고 있던 애굽에서 왜 끌어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죽음의 자리로 인도하는가?"
이 불평 속에서 잘 아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백성 대다수가 원망하며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하자,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너희는 다 이 광야에서 죽으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그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고, 그 세대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다음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지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꺼내실 때도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시키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홀로 열 가지 재앙으로 간섭하시고 바로를 항복시키셨으며,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모든 원망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저들이 반항하고 원망하자 "그래, 너희 결정대로 너희는 못 들어간다.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라."라고 엄한 심판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전에는 모든 불평과 원망에 대해 눈감으시고 답을 주셨는데, 왜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만은 이토록 엄격하게 판단을 내리셨을까요?
출애굽은 따지고 보면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애굽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방에서 나가려면 어딘가 갈 곳이 있기 때문이며, 그 갈 곳에 가려면 반드시 여기서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 애굽에서 꺼내실 때는 하나님이 하셨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우리 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출애굽 사건이 갖는 중요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고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만, 그렇게 해방된 사람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문제는 '너희 스스로가 대답하고 나아가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제3부. 비유: '쇼생크 탈출'과 자유의 두려움
1. 영화의 핵심: '구원'과 '허락'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는 쇼생크라는 감옥에서 주인공이 탈출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영어 원제는 '쇼생크 리뎀션(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쇼생크 구원', 즉 '감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쇼생크(Shoshenq)'라는 이름은 애굽의 한 왕조의 이름입니다. 쇼생크는 바로 시대 이후 몇 대 뒤의 왕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삭(Shishak)'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쫓겨 정치적 망명을 했을 때 찾아간 인물입니다. 따라서 '쇼생크 리뎀션'이라는 제목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는, '애굽(세상)이 구원을 얻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화 안에는 '앤디'라는 주인공이 종신형을 받고 들어오고, 그 안에 먼저 들어와 있던 '레드'라는 죄수가 있습니다. 앤디는 감옥에 들어와서도 다른 죄수들과는 구별되는 태도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다른 죄수들에게 매우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멋지게 탈옥을 감행하는데, 그 장면이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결론을 내지 않고 조금 더 이어집니다. 모두가 감옥을 나가는 것을 소원하지만 나갈 방법이 없는 그곳에서, 죄수들은 체념과 원망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나이 많은 한 종신형 죄수가 가석방으로 먼저 출소하게 되는데, 뜻밖에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받게 됩니다.
왜 그는 감옥을 나갔는데 자살을 했을까요? 레드(모건 프리먼)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볼 때 저 담이 장애물로 보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 담을 의지하게 돼." 그런 통찰력 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레드 역시 가석방을 받게 되어, 앞서 나갔던 사람이 묵었던 여관, 그가 일했던 자리, 즉 정부가 마련해 준 직장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일을 하는데,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손을 들어 매니저를 쳐다보자 매니저가 묻습니다. "뭐야?"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합니다. "화장실 같은 데 가는 걸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공원 벤치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는 레드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두렵다. 나는 평생 허락을 받고 살았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소변도) 한 방울 안 나와. 나는 여기가 무서워." 그러면서 권총 파는 가게 앞을 서성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나는 돌아가고 싶어. 저 권총을 꺼내서 누구 하나 쏘고 돌아갈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감옥 '밖'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무엇이 무서운 것일까요? '자유'가 무서운 것입니다. 자유가 왜 무섭습니까?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 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책임져야 하거든요.
저기(감옥)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저긴 들어가면 정체성이나 책임은 다 필요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는 곳입니다. 아이를 키울 걱정도, 도둑질을 당할 걱정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 '쇼생크 리뎀션'이 우리를 찌르는 지점입니다.
'애굽이 구원받는 이야기'라 함은, 우리는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만 생각하지만, 애굽 역시 나중에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는 구원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탈출함으로써, 그 죽음으로 묶인 세계가 뚫리고 열리는, 즉 애굽의 구원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제는 '쇼생크 구원(Redemption)'입니다. 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과 같은 맥락입니다.
* 평생 감옥에서 산 '레드'는 가석방 후 자유를 얻자, 화장실을 갈 때도 "허락"을 받으려 합니다.
*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유'가 두려워 "나는 여기가 무서워... 돌아가고 싶어"라고 고백합니다.
2. 자유의 역설
*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친 이스라엘의 심리입니다.
* '책임 없는 속박'은 '책임져야 하는 자유'보다 심리적으로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고난은 우리가 이 '자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책임지는 자유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고난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무슨 책임입니까? 책임을 져야 할 정체성, 책임을 져야 하는 의미와 가치들에 대하여 '현실'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제 걱정할 것이 없게 된다.", "모든 근심 걱정을 예수께 갖다 맡기면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런 말씀들이 피상적으로만 이해되어서는,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세상은 줄 수 없는 진정한 정체성과 운명, 그리고 우리 인생과 현실이 가지는 모든 도전들 앞에서 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즐기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왜 있느냐'는 질문은, '학교에 갔기 때문에' 고난이 온 것과 같습니다.
'학교에 갔다'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톰은 학교를 다니고, 그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인 허클베리 핀은 '거지'입니다. 허클베리 핀은 학교를 안 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돌아다니고 싶을 때 돌아다닙니다. 톰이 볼 때는 허클베리 핀이 더 자유스러워 보이고, 자기는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최고로 바라는 것은 허클베리 핀처럼 되는 것입니다. 학교를 안 가는 것이 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를 가는 것이 인간이 훌륭해지는 데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훌륭해진다'는 것은 학교에서는 아직 막연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훌륭해진다는 의미는 단순히 성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기생들을 가진다는 것, 같은 반의 친구를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큰 자산입니다.
학교는 다니면 다닐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점점 복잡해지고, 자녀들은 반드시 물어보는 질문을 합니다. "학교 안 가도 돼?"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중학교를 가야 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길로 인도됩니다. 공부를 잘하기는 어렵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금 직접적으로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으며, 무슨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춘기를 요즘은 중학교 2학년 때 겪는다고 합니다. 학교에 가면 사춘기는 하나도 다뤄주지 않고 공부만 다룹니다. "어느 대학까지 갈 수 있나", "넌 갈 데가 없다"와 같은 꾸중 속에서 사춘기를 겪습니다. 집에 가면 부모가 알아주기나 합니까? 학교 가면 선생님이 알아주기나 합니까? 그저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끼리 깊은 문제를 나눠야 합니다. 자살을 논하고, 가출을 논하고, 원망하며 "나는 왜 태어났나"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면, 마치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쩌시려고 그러는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정탐꾼을 보내서 봤더니 거기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도 않더라."라며 끝없는 방황을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이나 신자가 방황하는 것이나 동일한 방황입니다. 정체성,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력은 없이, 끊임없이 도전과 시련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고 숙명인 셈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대등한' 관계를 맺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성경의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이며, 우리의 선택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하며,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 혼란, 그 긴장,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니야?", "만사형통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종교심으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다시 찾아오지 않게 모든 복을 주세요."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을 찾아오지 않아도 됩니까? 표현은 그렇게 안 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함으로 과거를 청산할 테니, 다시는 죄짓지 말게 하시고 마음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걷는 길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이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성경적인 과정, 즉 고난의 과정, 도전의 과정, 우리의 정체성과 '어떻게'를 묻는 과정,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를 깨우치는 과정을 외면하게 되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이 그저 원망과 비명으로만 표현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괴로워서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그것밖에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죽지 않고 견디겠다는 표시입니다. 울면 죽지 않습니다. 정말 죽게 되면 웃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운다거나 비명을 지른다거나 괴로워한다는 것은 견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부 '망한 것'으로, '소용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4부. 구약의 인물들: '수동태'로 받는 훈련
고난 속에서 거의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더 많습니다.
1. 요셉 (Joseph): 승리가 아닌 '단련'
* 흔히 요셉이 '비전'을 붙잡고 고난을 '이겨냈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시편)은 다릅니다.
* 성경은 "그가 종으로 팔렸다", "그의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 (혹은 쇠사슬이 그 혼을 뚫었다)고 '수동태'로 기록합니다.
* 요셉은 억울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당하면서'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단련' 당했습니다.
* 그가 모든 의미를 깨달은 것은, 총리가 되어 형들 앞에 섰을 때, 비로소 과거의 꿈을 기억해 낸 그 순간이었습니다.
* 교훈: 고난은 우리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수동적으로' 빚어지는 과정입니다.
시편 105편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전부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에는 차꼬를 차고 그 몸은 쇠사슬에 얽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17-19) 이후 "저를 자기 집의 주관자로 삼아... 백관을 임의로 제어하며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시편 105:21-22) 이처럼 모든 것이 수동형입니다.
즉, (흔히들 요셉을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라고 미화하지만) 요셉은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억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기가 막힌 꿈, 즉 형들이 자기 앞에 무릎 꿇는 꿈을 꾸고 잘난 척했다가 팔려서 애굽에 갔고, 거기서도 무고를 당해 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도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하신 바와 같이, 그가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요셉은 쇠사슬이 그 몸을 맸다는 표현(시 105:18)은, 성경의 주석을 보면 그 '혼'을 묶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혼'이라는 뜻입니다. 몸이 쇠사슬에 묶인 것이 아니라, 직역하면 '쇠사슬이 그 혼을 뚫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혼비백산'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풀려나서도, 그는 자기의 꿈과 자신의 결과를 연결하지 못합니다. 그는 거기서 애굽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자식들의 이름도 신앙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형들이 가뭄이 들어 양식을 사러 와서 자기 앞에 엎드려 양식을 비는 것을 보자, 옛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구나. 우연히 이 결과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그때부터 준비하셨구나!'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나를 여기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누구는 좀 더 쉽게 살고, 누구는 보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주시는, 그 모든 것보다 심한 경우를 통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도 외면당하고, 조롱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으십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우리는 "고난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성경의 말을 좀 더 깊이 의미해 보아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예수님이 찾아가셨을 때, 그 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길게 얘기를 나누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미련한 자 들아! 메시아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런 의미에서 고난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여러분은 단순히 '고통'으로만 이해하시는데, 고난은 '공부'이기도 합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며, 더 어려운 자리까지 대접받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대신해 주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훈련하여 우리가 '대등한' 자리에 이르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고난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건 어떻게 이해해야 돼요?", "그런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해요?" 하는 물음에는 어떤 지혜가 필요하겠지만, 큰 흐름, 큰 의도, 큰 약속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그때의 위로와 분별 같은 것은 상담적 차원이나 격려의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겠으나, 이 근본적인 이해는 어떻게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숙제하고, 예습하고, 복습하시고, 개근하십시오. 자기 인생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괴로워하십시오. 어떤 것들은 나이가 좀 더 들면,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장하면, 앞에 있었던 벽 때문에 안 보였던 것들이, 벽을 허물어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키가 크면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산행을 하면 산을 올라가지 않습니까? 자기가 올라가는 산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 100m를 올라갔을 때 고생한 것이, 그다음 100m를 올라간 것과 똑같아서 반복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 100m나 그다음 100m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차이를 보게 되느냐 하면, 100m쯤 올라가서 고갯마루의 숲 밖으로 나올 기회에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야가 트입니다. 그다음 100m를 올라가서 다시 고갯마루를 만나 내려다보면, 아까와는 달라집니다. 없던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커가는 눈금들을 성경은 많은 역사를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거의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합니다. 요셉 얘기를 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까지 얘기하지 않습니까? "다 안 해도 좋아. 가르치는 동안만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라고. 졸지 말고." 그것만 해도 중상(중간이나 그 이상)은 갑니다.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그것밖에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죽지 않고 견디겠다는 표시입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울면 죽지 않습니다. 정말 죽게 되면 웃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운다거나 비명을 지른다거나 괴로워한다는 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부 '망한 것'으로, '소용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 죽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행복의 개념이 다릅니다. 아무 걱정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무생물입니다. 사람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은 의미와 가치에 관한 어떤 의혹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곱게 찾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찾습니다. 그가 바로 구원 얻은 사람입니다. '엄마'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신분'과 '수준'의 두 차원이 있습니다. 이 둘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입니다. 시작하자마자 신분이고 운명입니다. 그리고 '수준'은 길러져야 하고 커야 하는, 그다음의 과제입니다. 그동안 신분만 강조한 것이 '구원파'입니다. 신분이 완성되는 것과 같이 수준도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지금 그 문제와 연결되는 히브리서 6장을 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에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는 얘기는 "예수를 믿었으면 앞으로 더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시점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기도에 응답하셔서 복을 주실 수 있다고 가르치며 순교 시대와 부흥 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대가 끝나고 지금 현 시점에 와서 보니까, 교회들이 그다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되자, "교회는 왜 코로나 시대에 좀 더 적극적인, 그들이 믿는 어떤 초월적인 책임이나 증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 '앞으로 나아가는 문제'들에 대해, 본문은 "한 번 믿고 타락하면 끝장이다"라는 식으로 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첫 강의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출애굽 사건과 같습니다. 애굽을 나오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나왔고, 지나온 다음에 애굽 군사들이 따라 들어왔다가 홍해 물이 다시 차서 다 죽어버렸습니다. 홍해를 되짚어 돌아가서 애굽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라는 질문이 꼭 나오는데, 천국 갔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그들과 함께 죽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물론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므리바 사건에서 실수를 하고 하나님이 "같이 죽어라"라고 명하십니다. 모세는 그 뜻을 알아듣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온 책임자로서 그들과 함께 죽는 것이 맞고, 그 죽음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모세가 거기 함께 죽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 광야 생활을 실패할 확률이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실패도 선을 이룰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기독교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는가는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한 번 예수를 믿었다면 그 구원은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결국 우리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는 아닌가 보다"라는 자책과 절망의 과정을 얼마든지 겪는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예수께서는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약속까지 그때 이미 받았습니다. 더 무섭게는,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답하여 큰 칭찬을 받고 교회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이후) "주여, 저는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어마어마한 꾸중까지 들었지만, 그는 결국 최고의 사도가 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 자유로운 실력, 즉 권리와 책임을 다 아우르는 실력을 만들어 가는 일에 있어서, "나는 내 할 일 다 했으니 이제부터 다 네 책임이다."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성경의 약속들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실패나 좌절, "여기가 끝장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끝장이 아니라는 증거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고 하는 장면이라든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포기할 수 없었던 그런 심정이라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이,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반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예수에게서 모두가 절망한 자리, 모두가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한 자리가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2. 엘리야 (Elijah): '승리' 너머의 '역사'
*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을 이기는 극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이세벨은 여전했고, 그는 도망자가 되어 로뎀나무 아래서 "나만 남았다"며 절망합니다.
* 하나님은 불과 바람(그의 성공 방식)이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와, "가서 다음 세대(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일상적인 '역사'를 명하십니다.
* 교훈: 우리는 '승리'로 역사가 끝나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를 넘어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고난은 우리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감당할 실력자로 우리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신앙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아합이 왕이었을 때, 갈멜산에서 아합이 따라가고 있는 우상숭배를 꺾고 하나님께로 그 백성을 되돌리기 위하여 벌였던 하나의 전투입니다. 갈멜산에서 아합이 기르고 붙잡고 있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여호와를 믿는 엘리야가 대결하여 엘리야가 이깁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궁에 뛰어들어 왔으나, 당시 북왕국을 붙잡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권력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그 큰 승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을 꺾지 않고 놔두셨습니다.
게다가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까지 덤비니, 엘리야가 낙심하여 도망을 갑니다. 호렙산까지 도망갑니다. 지나오는 광야 길에서 그가 로뎀 나무 밑에 누워서 "난 제 할 일 다 했으니,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죽여주십시오."라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를 먹이시고, 두 번이나 그렇게 하신 후, 40일 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느냐?" "하나님, 제가 왜 왔겠습니까? 아합이 몽땅 다 죽이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나까지 죽이겠다니 내가 무슨 수가 있습니까?" "너, 굴 앞에 나와 서라." 그가 나가 서니까 다시 물으십니다. "엘리야, 너 왜 여기서 있느냐?" 이것은 평범한 질문이 아닙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내가 왜 여기 있겠습니까?" 전에 했던 대답을 반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상하게 답을 하십니다. 그 앞에 강풍이 불어 바위를 쪼갤 만한 바람이 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고, 지진이 일어나는데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불이 내리는데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갈멜산에서 끝장을 냈으면 싶었던 거지?" 왜냐하면 그다음 주신 말씀에 힌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가서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삼고, 예후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엘리사를 네 뒤를 잇게 하라. 역사를 계속하자."
"너는 갈멜산에서 역사를 끝장내자는 거였지? 우상 섬기는 놈들은 다 죽이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너는 그것이 심판이요, 역사의 끝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나를 잡아당긴 것이고, 나는 역사를 더 끌 것이다. 그러니 가라."
아람이라는 나라는 그때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왕국이었습니다. 거기에 그 대를 이을 왕을 세우라는 것이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악한 나라였고 하나님을 섬긴 왕이 없는 나라였으며, 남왕국 거기도 적대적인 주적 중 하나였는데, 그 후대를 이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또 세우라고 합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지 않아서 일어나는 혼란, 마치 권력이 전부이고 폭력이 전부인 것 같은 역사를 "계속해라." 이렇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니까 '역사가 왜 있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됩니다. 왜 이렇게 난리 법석을 떠는 역사를 하나님은 연장하실까요? 우리가 앞에서 들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고, 자유에는 '권리'와 '책임'이 있는데, 권리를 주장할 것이냐 책임을 주장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첫 번째로 허락됐던 시대가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저들이 자유로운 백성으로 들어와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거기는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되듯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권리부터 사용한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라가 다 망했습니다. 현대의 제일 큰 문제도 이기주의입니다. 각각의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없는 민주주의가 되었습니다. 책임이 없는 민주주의는 결국 가장 큰 혼란으로 갈 수밖에 없고 자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열왕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왜 왕을 세웠는데도 이 꼴인가? 왕을 세웠다는 것은 '권력'을 준 것입니다. 자유에 더하여 권력까지 주었는데, 이 권력이라는 것이 '폭력'으로 갈 것이냐, '섬기는 데'로 갈 것이냐라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권력이 왜 폭력과 섬김으로 나뉘는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두 제자가 "주의 나라 임하실 때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누가 앉을지는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것이고, 너희가 잘못 알고 있는데, 내 나라는 섬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섬기는 나라다." 나라의 정체성을 밝히신 것입니다.
자유를 가지면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섬기라는 것입니다. 권력이 되어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싸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왕들이 전부 실패합니다. 권력을 잡는 데에 혈안이 됐고, 그러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열왕기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왜 열어 놓으셨을까요? 우리는 몇 가지 성경의 비유들을 이런 차원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을 놓친 것이 많은데, '탕자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이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해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 다 털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이고, 모두가 그의 돌아옴을 아버지가 기뻐한 것으로, 즉 '회개하고 돌아오자'로 그 비유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나아가서, 맏아들이 째째하게 굴었던 대목까지 가야 합니다. 맏아들이 동생의 파티를 열어주는 것을 보고 분을 내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네 동생이 돌아왔잖니. 들어가서 같이 즐기자."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도 없고,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다 했는데,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도 한 마리 안 잡아 주시고, 모든 걸 다 창기와 함께 말아먹은 놈이 오니까 소를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내 것은 다 네 것 아니냐? 뭐가 불만이냐?"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상당히 높은 것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권력입니다. 우리의 지위입니다.
그러니까 훈련은, 자유는, 결국 섬기고 다스림에 있어서의 이 '하나님의 후사', '기업을 이을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목적하여 훈련을 시키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좋아하고, 천국을 고통이 없는 곳, 다 좋은 곳으로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남겨서 칭찬을 받습니다. 마지막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말합니다. "저는 주인이 엄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것을 손해 볼까 봐 묻어 놨습니다. 자, 당신의 것을 받으십시오."
거기서 주인의 꾸중은 생각해 볼 만한 것입니다. "내가 엄격한 자인 줄 알았다면, 너는 이것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얻게 하지, 왜 파묻어 났느냐? 네가 아는 그 잣대로 하자. 넌 벌 받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그 앞에 칭찬받은 두 종은 시킨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주인의 일에 참여'합니다. 자기가 주인을 대리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데, 마지막 한 달란트 받았던 하인은 주인이 무서운 분이라고만 생각했고, 주인이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그는 깨우치지 못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달란트 받아 묻어두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죄 안 짓는 것'이 전부가 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자책을 가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고, 내가 자책할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걸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버릴까 봐 겁을 내는 것입니다.
"한번 해 봐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경의 권유입니다. "네 인생을 살아라. 네 인생이 다른 사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왜 저 사람과 다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나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고, "네가 나중에 원치 않는 죽음을 죽을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쟤는요?"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답이 멋있습니다. "쟤를 왜 네가 걱정하느냐? 그가 영원히 살게 할지라도 그건 내 소관이고,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우리 각각이 하나님께 받은 고유한 사명이 있고, 각각이 다 특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서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려는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라." 이것은 무서운 얘기가 아니고, 얼마나 놀라운 자유에 관한 얘기인지 모릅니다. '그렇구나. 내 인생과 내 현실은 하나님 앞에 특별하구나.'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이제 열왕기를 통해 배울 점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역사가 계속되어 무엇을 제공하느냐 하면, 자유라는 것을 제대로 누리려면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선택을 잘하려면 분별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기도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 속에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많을까요?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늘 우리를 쫓아다닙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에 더 주목하는 이유는, 일단 잘하게 된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므로, 늘 불만스럽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고,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방법으로 40일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책임이 끝나고 그다음부터는 다 하나님 책임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10대, 20대, 30대, 40대를 차례로 살아보게 하십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나이 든 사람들이 얻는 지혜가 있습니다. 대학까지 공부시키면 끝인 줄 알았더니, 결혼시키는 것이 또 어렵고, 결혼시키면 끝인 줄 알았더니 손자 손녀가 태어나 또 다른 짐이 생깁니다. 손자 손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들딸이 찾아와 그것이 '우리 잘못'이라며 부모의 짐은 계속됩니다.
이렇듯 끝없는 책임을 통해 지혜가 만들어집니다. 많은 경우를 겪은 '베테랑'이 되어 숙련되고 성숙한 지혜와 분별력을 얻고, 마침내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묻는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이런 가치가 있구나', '인간은 이런 존재로 부름 받았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기도의 권능, 우리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기쁘게 항복하는 만족의 자리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의 중요성은, 시간을 길게 잡으면 '역사'가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간은 '전후(前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앞이 있고 뒤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초월적인 결과를 즉각 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면 '뚝딱' 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후를 만드신 것은, 앞과 뒤가 연결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앞'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오늘'이 우리에게는 늘 있을 뿐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오늘이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오늘은 짐이 두 배가 됩니다. 그런 당연한 이치들이 우리를 떠밀어서, 정당한 선택을 하는 실력 있는 자로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되려면 분별과 지혜가 생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나이(시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함과 성경의 증언들이 어떻게 어느 자리, 어느 경우에도 적용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는 이중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첫째로 '신분'이 바뀌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신분은 절대 불가역적이며 없어질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헤어질 수 있을지언정 그 관계 자체를 지울 수 없듯이, 신분은 즉각적이고 영원합니다.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의 확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고 안 믿고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를 지워야만 우리의 운명이 취소될 수 있는데,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운명은 영원합니다.
문제는 "그런데 왜 내 모습은 이 꼴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준'에 관한 싸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 뿐 아니라 반드시 '기르는' 것처럼, 수준은 다른 문제입니다. 육체적으로만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시키고 인문학적으로 키워 '인간이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를 문화와 예술, 삶의 구체성을 통해 겪게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기르실 뿐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후사(後嗣)', 즉 유업을 이어받을 자로 기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믿었는데 하나님이 기대만큼 안 해주신다" 혹은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며 수준의 문제로 신분까지 흔들리곤 합니다.
"예수를 잘 믿고 싶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과거 부흥 시대에는 전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며, 마음이 평안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그렇게 지음 받았기에, 생명이 사망을 거부하듯이, 영혼이 살아나면 더 높고 깊은 만족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에서 중단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집단이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다음은 만사형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한때 크게 유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죽으면 죽으리라' 같은 순교 신앙 외에,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산비탈에 농사짓는 신자가 윗 논을 갖고 있었는데, 아랫논 주인이 밤마다 물꼬를 터서 물을 훔쳐갔습니다. 분노한 신자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아랫논부터 채우고 네 논을 채워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순종했더니 아랫논 주인이 더는 물꼬를 트지 않았다는 감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살아보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 논 물 채우는 데도 이미 기진맥진한데, 언제 아랫논까지 채웁니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소원'이나 '이상'으로 자기 진심을 포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기를 지나 이제 "아이만 많이 낳는 것이 다가 아니라, 잘 가르쳐야 한다"는 후유증과 과제에 직면한 것과 같습니다. 아직도 "과거로 돌아가자"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교회사 속에서 일어났던 많은 시행착오와 좋은 유산들이, 오늘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작용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들마다 좋은 신앙고백을 갖고 모였지만, 실제로는 평탄하지 않고 시원스러운 발전이 없습니다. 가족과 똑같습니다. 매일 지지고 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그렇듯이, 교회도 끈끈한 연결성이 있어 이 세상의 어떤 도전이나 심한 절망도 이기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경험을 통해 분별과 지혜를 만들어 내시며, 우리를 수준 높은 데로 인도하시고 자유를 제대로 발휘하게 하실까요? 에베소서 5장 18절이 핵심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제5부. 신약의 비유: '화음'으로서의 성숙
1. 성령 충만: '방탕'의 반대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방탕'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회성 신비체험이 아니라, 욕조에 물이 차오르듯 '시간' 속에서 지혜와 실력이 '쌓여 올라가는' 과정입니다.
2. 결혼: '이중창'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오래 참음'(Love is long suffering)입니다.
*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 목적은 '화음(Harmony)'입니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소리, 즉 '이중창'을 만들기 위해, 상대의 소리를 들으며 내 소리를 조율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성숙입니다.
* 교훈: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딴 소리'(실패, 죄) 내는 것을 기다려 주시며, 하나님의 음성에 우리를 조율하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제6부. 욥기의 재해석: '도덕'을 넘어 '창조'로 (고등 교육)
1. 욥기의 전제 오류: '인과응보'라는 틀
* 욥기는 '의인'이 고난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인과응보'의 틀을 깨뜨립니다.
*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원인) 벌을 받는다(결과)"는 '도덕'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 욥 또한 "나는 죄가 없는데(원인 X) 왜 벌을 받는가(결과 O)?"라며, 같은 틀 안에서 하나님의 '불공정'을 항변합니다.
2. 하나님의 대답: '창조'
* 하나님은 욥의 도덕적 질문(Why?)에 답하지 않으시고,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악어의 힘을 아느냐?", "네가 땅의 기초를 놓았느냐?"
* 이는 "너는 '원인-결과'의 법칙에 갇혀 있지만, 나는 그 법칙을 만든 '창조주'다"라는 선언입니다.
3. 해석: '도덕'에서 '창조'로의 졸업
* 하나님은 욥을 '도덕법'(잘못하지 않기)의 수준에서 '창조법'(무에서 유를 만들기)의 수준으로 '졸업'시키고 계십니다.
* 이 '창조'의 논리가 신약의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원수 사랑은 '인과응보'의 도덕률로는 불가능한 '창조적' 행위입니다.
* 교훈: 고난은 '벌'(도덕)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적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로 빚어 가시는 '고등 교육'입니다.
제7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성육신'
1. 우리의 사명: '보냄을 받은 자'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우리의 사명은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세상 밖에서 '심판' (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 '문맥(Context)'과 '본문(Text)'의 비유
* '문맥' (Context): 우리가 세상과 공유하는 '현실'입니다. 이곳은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곳'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병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습니다.
* '본문' (Text): 우리가 그 '문맥' 속에서 품고 있는 '내용'입니다.
* 세상의 본문: "문맥이 곧 본문이다." (예: "세상은 불공평하니 나도 불공평하게 살겠다.")
* 우리의 본문: "문맥과 다른 본문이다." (예: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나는 '용서'와 '부활'과 '사랑'의 본문을 살겠다.")
3. 진정한 사회적 책임: "넌 뭐야?"
* 우리의 책임은, 동일한 '문맥' 속에서 완전히 다른 '본문'을 살아냄으로써, 세상이 우리에게 "넌 뭐야?"라고 묻게 만드는 것입니다.
* 이 질문이 바로 '전도'의 시작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성육신'적 책임입니다.
제8부. 결론: '어른'의 짐과 나이 듦의 가치
1. 업적(Achievement)이 아닌 존재(Being)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성숙입니다.
* '짐'이 많아졌다는 것은 불평거리가 아니라, 그만큼 '지위'가 높아졌고 그 짐을 감당할 '실력'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2. '어른'의 역할: 짐을 져 주는 자
* '아이'는 짐을 벗으려 하지만, '어른'은 자기 짐과 더불어 남의 짐을 함께 져 줍니다. "괜찮다", "내가 들어줄게"라고 말하며 '화음'을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3. 나이 듦의 가치: '산행'의 비유
* 목사님은 "철없던 3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나이 듦은 쇠퇴가 아니라 '지혜의 누적'입니다.
* 인생은 '산행'과 같습니다. 산을 오를 땐 발밑의 흙만 보이지만, 문득 '고갯마루'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올라왔는지, 시야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알게 됩니다.
* 최종 결론: 고난은 우리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평생의 고난을 통해 다른 이의 짐을 함께 지며 하나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성숙한 존재'로 완성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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