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 그 기록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요한은 7개의 '표적(Sign)'을 선별했습니다. 표적은 놀라운 '기적(miracle)'을 넘어, 그것이 가리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입니다.
7개의 표적 (The 7 Signs)
1. 물이 포도주로 (요 2장): 창조와 기쁨의 주님
2. 신하의 아들 치유 (요 4장): 시공을 초월한 생명의 주님
3. 38년 된 병자 치유 (요 5장): 참된 안식의 주님
4. 오병이어 (요 6장): 영원한 생명의 떡
5. 물 위를 걸으심 (요 6장):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6. 맹인의 눈을 뜸 (요 9장): 세상의 빛
7.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장): 부활과 생명
이 설교들을 통해 표적 너머에 계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1. 기적을 부르는 믿음 (Sign 1)
성경 본문 : 요한복음 2:6-11
세상에는 기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적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 기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우리가 가졌는가에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믿던 것이 일어날 때 우리는 기적이라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기적일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들이 깨질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자연의 법칙'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공허와 혼돈 속에 누가 이 경이로운 세상을 만들고, 누가 이 모든 자연의 법칙을 주도하고 계십니까? 욥기 28장은 하나님께서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고 물의 양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만드셨다"(욥 28:24-26)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모든 법칙은 더 상위의 법칙을 만나면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중력의 법칙은 자력(磁力)을 만나면 무력해지고, 부력(浮力)을 만나면 무거운 쇠붙이 배가 물에 뜨게 됩니다. 중력은 하늘을 나는 양력(揚力)을 만나면 깨어지기에 비행기가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 자연의 모든 법칙은 그분의 뜻 아래 복종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기적의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적을 부르는 믿음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의 흥이 깨지고 혼주가 망신을 당할 절체절명의 순간, 마리아는 즉시 아들 예수님께 나아가 얘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대답은 냉정하게 들립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여기서 '여자여'라는 호칭은 무례한 말이 아니라, 당시 여인을 높여 부르는 공손한 표현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뒤의 말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거리감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시기상의 거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첫째, 바른 관계가 빠른 응답을 결정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즉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분과의 깊은 신뢰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우리는 아예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을 만날 수 없습니다.
둘째, 주님은 주님의 때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요한복음에서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때'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셋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말을, 기도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것은 자기 논리에 빠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구할 때 관계와 때를 재고 구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첫 간구에 대한 거절은, 거절을 위한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믿음의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일시적 보류'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이 패턴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마 15:21-28). 주님은 여인의 간청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며 매섭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였을 때, 주님은 즉시 "네 믿음이 크도다"라며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간구하는' 더 큰 믿음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때가 아닌 것 같아도, 무조건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절처럼 들리는 대답 앞에서도, 마리아는 믿음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기적을 이루는 두 번째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내 인생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순종을 가로막는 두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기적'과 '뭉그적'입니다.
'이기적'은 자기 계산에 갇힌 것입니다. 내 이성에 맞지 않고,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뭉그적'은 자기 습관의 관성에 갇힌 것입니다. 힘들 것 같고, 귀찮아서 순종을 미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 '이기적'과 '뭉그적' 너머에 있습니다. 순종의 발걸음이 내디뎌질 때, 기적의 발걸음도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요 2:6-8). 하인들은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을 채우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고,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순종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라고 명하십니다. 물을 떠다 주는 것은 심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만약 그것이 여전히 물이라면, 모든 책임은 하인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이해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고, 어렵고, 심지어 내게 이롭지 않아 보여도 주님의 말씀이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성을 따르면 자연적인 일은 이룰 수 있지만, 초자연적인 기적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종의 실력', '순종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게 순종의 근육을 더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아는 것을 넘어 믿어야 합니다.
순종이 이루어질 때, 맹물은 극상품 포도주로 변했습니다(요 2:9-10). 이 기적의 놀라운 점은, 연회장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했던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는 사실입니다.
물은 언제 포도주로 변했을까요? 항아리에 부을 때였을까요, 떠서 갈 때였을까요, 아니면 연회장에게 전달될 때였을까요? 우리는 그 시점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 그 시점을 정확히 긋지 못할 때도 있지만, 내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그 시점은 모호할지라도 그 변화는 확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기적의 출처를 '아는 것'이 하인들의 한계였다면, 이 사건에 대한 반응, 즉 '믿음'은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기적이 일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담고 있는 '표적(Sign)'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인들은 기적을 보고 '아는 데서' 멈추었을 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기적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 곧 그분의 '신성(神性)'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적(Miracle)이 아닌 표적(Sign)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기적을 넘어 믿음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잔치에 초대된 우리 중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구경꾼으로 앉아 있는 '손님'이 있습니다. 잔치의 '연회장'처럼,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정작 은혜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는 사각지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인들'처럼, 기적을 체험하고 아는 것은 많지만, 거기까지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찾고, 기적을 넘어 그분의 영광을 보며 믿음까지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간구하며,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고, 아는 것을 넘어 온전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 믿음은 길 위에서 자랍니다 (Sign 2)
성경 본문 : 요한복음 4:46~54
성경이 성도를 정의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순례자(Pilgrim)'입니다. 시편 39편 12절과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우리를 가리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 칭합니다. 이들은 모두 정착민이 아닌, '길 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의 본질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길 위'의 인생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명하시며, 그를 안락한 집에서 거친 길 위로 부르셨습니다.(From home) 야곱 또한 1,600km가 넘는 머나먼 길을 걸어 "내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15)는 약속 하나를 붙들고, 길 위에서 순종을 배우며 그의 인생이 빚어졌습니다.(Back to home)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안락한 공간이 아니라, 거친 길 위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걸어갈 때 비로소 빚어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거리의 사람들(The People of the Way)"이라 불렀습니다. 오르그 리거는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추천서 내용 일부를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이들은 그 길을 걷지 않는다. 찬미할 뿐이다.
안락한 집을 떠나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불편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변화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는 동안, 여행자와 순례자는 주류질서가 만들어놓은 강고한 체제에 틈을 만든다. 그 틈 사이로 하늘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의 신앙이 안락한 교회당 건물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에 안주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의 길 위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을 보여줍니다. 여기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로, 남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성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속수무책인 '아버지'일 뿐이었습니다. 본문이 '그(the) 아들'이라 칭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외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걸어간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
(46절) 그는 가버나움에 있었고,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계셨습니다. (47절) 그는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청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고통 속에 머무르지 않고, 절박함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생의 그 절박함이 도리어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계속 강하고 평안했다면, 주님께로 향하는 이 길 위에 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게서 해답을 찾게 하였고, 그분께 나아와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떠나온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30km, 해변에서 산지로 올라가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에게 그 험한 길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기만 하면 아들이 나을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과 믿음, 그것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 첫 기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뜨거운 기도였을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기도는 진실합니다. 모든 수식어를 떼어내고 "살려달라"는 절규만 남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는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전에,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먼저 만드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지 말고, 그 고통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길
(48절) 아들의 생사가 달린 아버지에게, 예수님의 첫마디는 뜻밖에도 냉정하게 들립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는 표적보다 '믿음'이 더 중요함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고 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가 원했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50절)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신하는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능력을 보여주시길 원했지만, 주님은 '말씀으로' 역사하길 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는 것이 목표였으나, 예수님의 목표는 그 신하와 그의 가정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라고 했습니다. 원문은 '말씀 그 자체를 신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왔다가, 이제 말씀을 받고 '보냄 받는 길'에 섭니다.
돌아가는 30km의 길은,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더 큰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는 이 한마디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표적과 기사 대신 '말씀 중심'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에서,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깊은 협곡 앞에서 믿음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가 발을 내딛자, 비로소 길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보이는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은 가장 밝게 빛납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며,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그 책의 사람(People of the Book)", 즉 성경의 사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듯이, 오늘날의 성도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그 책)'을 붙들어야 합니다.
셋째, 기쁨이 충만한 길
그가 집에 채 도착하기도 전, "도중에" 종들이 마중 나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묻자, 종들은 "어제 일곱 시"라고 답합니다. (53절) 그 시각은 정확히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신 '그때'였습니다. 얼마나 전율이 흘렀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한 것입니다. 그의 남은 발걸음은 이제 근심의 길이 아닌, 기쁨과 찬양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의 길은 마침내 기쁨의 길과 만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역사(役事, work/action, reality)'가 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셋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빠른 응답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 거절처럼 보였으나, 실은 아들을 '즉시' 살리신 가장 선하고 빠른 길이었습니다.
넷째, 우리가 믿을 때, 비로소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53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가족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었습니다. 한 사람의 고통과 순종이 온 가정을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가 삶의 고통 가운데 주저앉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을 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의 길을 걸어갔을 때, 온 가정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이처럼 '번식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지난 10월 29일은 ODC 입당 예배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전날인 토요일까지도 준공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모든 날짜가 공표되었기에 예배를 미룰 수도 없었습니다. 수요일 예배가 시작되고, 제가 10시에 설교를 위해 단에 올라설 때까지도 허가는 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설립 목사님의 축사가 이어질 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확히 제가 설교를 위해 단에 올라서던 10시에, 예배 중에 준공 허가가 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길 위에서 자랍니다.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고 험난할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길의 끝에서, 아니, 그 길의 "도중에" 우리는 반드시 기쁨의 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Sign 3)

(Sign 4)

(Sign 5)

(Sign 6)

(Sign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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