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교수 #잘잘법

정말로 천국이 있습니까? 하늘나라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너무나 명백하고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하늘나라의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점수를 매기면 10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천국을 말하다: 장소인가, 상태인가
천국(天國)이란 말을 분석해 보면 하늘(天)과 나라(國)입니다.
먼저 '하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는, 공기가 있고 구름이 떠가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스카이(Sky)'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계신 공간'으로서의 '헤븐(Heaven)'입니다.
주기도문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번역한 것은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heaven(영어), himmel(독어), ciel(불어), cielo(스페인어)
주기도문의 영어 표현도 'God in the sky'가 아니라 'God in Heave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물질적인 몸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물리적인 '스카이'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가진 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공간에 제약받는 분이 아니기에 굳이 어떤 공간 안에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표현해야 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때 '하늘'이라는 말을 가져다 쓴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에게 보편성, 초월성, 높음, 광활함, 그리고 무소부재(어디에나 계심)를 상상하게 하는 가장 적절한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거실에 계셔"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을 때, 우리는 '하늘'이라는 메타포(은유)를 가져와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라(國)'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나라'는 주권, 영토, 국민을 요소로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나라'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이었습니다. 즉, 왕이 자기의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가 곧 그 왕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결국 무엇입니까? 물리적인 '스카이'에 영향력을 끼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 즉 '하나님의 주권과 영향력이 끼치는 범위'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주 어느 곳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면, 이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니 '하늘'이라 불릴 수 있고, 하나님의 영향력이 이곳에 있으니 '하늘나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진짜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곳이 하늘나라 같습니다. 제가 무슨 욕심이 있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에는 더 재밌게 놀 수도 있고, 굳이 이 내용을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을 준비합니다. 이 방송을 제작하는 분들도 돈벌이만을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우리가 공부한 바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가치와 영광을 높입니다. 주기도문의 고백처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의 나라, 그분의 영향력, 그분의 사랑과 눈물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여기에도 하늘나라는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심지어 교회당에 와 있어도 하나님을 절대로 느끼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지옥의 현장일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하늘나라
물론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면 섭섭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진짜 의도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냐'는 내세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표를 끊고 들어가는 놀이공원 같은 곳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를 '금이 가득하고 보석이 깔린' 곳으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그 영광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기에 사용한 은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나요?"가 아니라, "죽어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나요? 우리의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과 바울은 명백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에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또한 그 무엇도, 심지어 사망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의 한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내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살아서 더불어 사는 천국의 삶을 누리며, 육체적 삶이 끝난 후에도 "나의 사랑 안에 너는 머문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우리가 육체적 생명이 끝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기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너무나 명백하고 당연하게 존재합니다. 문제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하늘나라의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100점 만점에 10점짜리 이해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모아보면, 사후 세계에 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했다면 더 많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씀, 즉 '여기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잔치와도 같은 우리의 삶에 대한 그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병상에 있거나, 혹은 여러 고통을 받는 모든 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끊기지 않는 하늘나라의 기쁨과 안락,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증언의 신뢰성과 역사적 사실
저는 성서에 있는 부활 증언들이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성경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믿으면 되지, 그 이상의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냥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다'라는 것을 지성적, 교양적, 역사학적 차원에서 알아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오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실'에 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사전적으로 '사실'이란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현재에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다'는 말은 학문적으로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있음'의 종류: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사실
'있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에 종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관찰 가능하며 계량화(높이, 재질, 면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다른 한편, 다른 '있음'도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반복적으로 관찰하거나 계량할 수 있습니까? 제가 "내 마음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을 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행동, 즉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들도 저를 보고 "저 사람 마음에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어"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호 주관적인 사실'이 됩니다. (만약 제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관적인 사실에만 머물 것입니다.)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
사실이라는 것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종이가 여기 있는 것은 객관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사실이며, 반복 관찰과 계량이 가능합니다.
둘째는 '역사적 사실'인데, 이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역사는 '단 한 번' 일어난 일이며 반복할 수 없습니다. 계량화하기도 힘듭니다. 우리나라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을 어떻게 계량하겠습니까?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두 차원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실증)이고, 다른 하나는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해석)입니다. 인간은 모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며, 해석 없이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역사성을 검증하는 방법론
그렇다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어떤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압니다. 만약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풀리는 문제보다 풀어야 할 숙제가 훨씬 더 많아집니다. 조선왕조 실록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역사적 자료들을 다 무시해야만 그 가정이 성립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없었다'라고 가정하면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없었다고 하는 것보다) '있었다'라고 가정하는 것이 개연성과 확률의 차원에서 훨씬 더 그럴듯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이처럼 개연성과 확률 위에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론은, 그것을 말하는 증언, 기록, 고고학적 유물들이 '일관성'과 '적절성'을 갖추었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여러 사료를 보니 일관성과 적절성을 갖추었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 등재됩니다.
부활의 증거 (1): 사도 바울의 변화
그럼 이제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사료와 증언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신약성서 전체가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신약성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부활을 정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을 지니고 사시다가 십자가형을 당해 돌아가셨고 무덤에 안치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은 없어졌고, 그분이 생전의 몸과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어떤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 증언의 핵심입니다. 즉,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부활장)을 보면, 게바(베드로)에게, 12제자에게, 그리고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바울이 증언합니다.
첫 번째 방법론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만약 바울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아집니다. 그는 유대교 신앙을 망친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열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류 집단에 속하여 권력과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핍박받는 소수자 집단으로 옮겨가,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전역을 누비며 선교하다가 전승에 따르면 순교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만약 바울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면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2): 제자들의 변화
두 번째, 제자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뒤 오순절에, 바로 그 사형이 집행된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너희가 죽인 예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라며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겁쟁이였던, 혹은 평범했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을까요? 숨고 도망가고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왜 자기 목숨을 아깝지 않은 것처럼 정면으로 나섰을까요? 그들에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집단적으로 착각했거나, 시신을 훔쳐다 놓고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자신들의 목숨을 거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실제로 부활을 목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까?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최소한 상호주관적 사실과 주관적 사실에 해당하며, 역사적 사실의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부활의 증거 (3): 복음서의 불일치
어떤 분들은 복음서를 낱낱이 비교해 보고 부활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전하는 부활 소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두 명의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 한 명의 천사를 만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세 명의 여인(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이 한 청년을 만나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끝납니다. (16장 8절 이후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여인들(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이 빛나는 옷을 입은 두 남자를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 등장하며, 그녀는 빈 무덤을 발견한 뒤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알리고, 그들이 돌아간 후 혼자 남아 울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진실임을 오히려 반증합니다.
인간은 아주 충격적이고 예외적이며 압도적인 사건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황과 달리 기억을 세세하게 하지 못합니다. 대신, 굉장히 중요한 '사건의 핵심(Core)'은 기억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세부 사항(Detail)'들은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만약 이 네 진술이 모두 완벽하게 일치했다면, 저는 오히려 누군가 짜 맞춘 것처럼 의심했을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목격자들의 서로 다른 증언에 따라 이렇게 세부 사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까? 저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훨씬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이 어떤 몸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의학적 상식, 인류의 상식으로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바는, 돌아가셨던 예수께서 이전의 몸과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시에 가진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충격적으로 본 그 사실을 가감 없이 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음을 확신에 차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 새로운 시대의 시작
만약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놀랍고 신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길을 가시다가 십자가형을 당해 돌아가셨을 때, 모든 희망이 끝난 줄 알고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살아생전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시작되었음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 부활의 소망에 참여할 수 있구나", "비록 목숨을 잃어도 하나님께서 새 생명과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러한 믿음과 소망이 생기자, 비로소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가 서로의 쓸 것을 나누며 훌륭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원래 훌륭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그 안에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되어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놀라움은 바로 '부활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소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를 출발시킨 사건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부활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부활은 소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의 이야기는 '소생'입니다. 죽었던 시체가 다시 일어나 이전의 삶을 살았고, 결국 세월이 흘러 다시 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죽음마저도 생명의 창조자이신 예수께서 극복하신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소생이 아닙니다. 그분은 육체로 죽으셨지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빈 무덤이 증명하듯 그분의 이전 육체는 사라졌지만, 나사로처럼 똑같은 육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 즉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기에 이전의 육체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그 신령한 몸은 이전 육체와 '연속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즉,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비연속성), 그분은 "내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내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상처(성흔)가 부활체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연속성).
또한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하시며(연속성), 심지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드셨습니다(연속성).
이처럼 부활체는 이전 육체와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갖는 신령한 몸입니다.
부활 신앙의 현대적 의미
초기 제자들은 이 부활 사건을 해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의 일반적인 부활 사상에 따르면, 부활이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들이 옳았음을 선언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시대'란 곧 '새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력의 마지막이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완전히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인'으로 인정하셨으며, 바로 이 부활을 통해 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챈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하셨다는 것 역시, 물리적인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승천'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된 그 영적인 공간에서, 이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려 한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신학자 엔티 라이트(N.T. Wright)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예수님의 부활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전 육체와 연속성 및 비연속성을 동시에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남은 상처(stigma)가 그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성스러운 흔적'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했던 흔적,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얻은 상처 같은 것들이 우리 부활체에도 남아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또한 비연속성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온전히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똑똑히 보고 들으며 감격하는, 그런 행복한 비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부활체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체가 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새롭게 재편됨을 알려줍니다. 천사가 하나님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이듯이, 우리도 부활했을 때 하나님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뵙고 그분과 하나 되며, 그분의 영광, 곧 그분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은혜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기뻐하며 부활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의 삶에 동참할 때, 우리도 그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한 성도님께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아내를 위해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교회를 오래 다녀도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현실의 부모조차 자식이 미워도 지옥불에 넣지는 않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히 타는 불구덩이에 넣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지옥을 만드신 것인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지옥의 뜻과 의미, 그리고 여러 견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말 '지옥(地獄)'은 땅 아래 있는 감옥을 뜻하는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크게 '하데스(Hades)', '게헨나(Gehenna)', '타르타로스(Tartaros)' 세 가지입니다.
'하데스'는 원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죽은 자들이 가는 중립적인 장소, 즉 '저승'을 의미했습니다. 특별한 처벌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구약의 '스올(Sheol)' 개념과 합쳐지며 처벌의 함의가 더해졌습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흰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했는데, 이곳은 과거 이방신에게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던 장소였습니다. 이후 쓰레기 하치장이 되어 늘 악취와 불과 연기가 났기에, 강한 심판의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타르타로스'는 베드로후서에 한 번 나오며, 악마가 사는 어두운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신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다 합쳐도 2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는 바울 서신에는 지옥에 해당하는 이 단어들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이 지옥 자체에 아주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님을 반증합니다.
지옥의 본질: 선(善)의 결핍
지옥이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도 '악(惡)은 선(善)의 결핍'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어둠이 빛의 결핍인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악을 선과 동등한 실체로 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지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천국의 결핍'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기고, 자기 삶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며 즐기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천국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결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고, 그분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으며, 그분의 다스림과 돌봄이 더 이상 없는 것, 그것을 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 스스로 만든 단절
요한복음 3장과 로마서 1장에 보면 그 지옥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상황이 됩니다. 왜냐하면 빛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빛이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거절한 삶이 곧 지옥의 삶입니다.
로마서 1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이 확연히 드러났음에도 하나님을 거절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허탄한 마음속에 살도록 방치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연장해서 이 본문을 읽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사하신 생명과 빛을 거절하고 탐심으로 인한 허탄하고 허무한 마음속에 사는 것, 그로 인해 자학과 가학의 폭력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스스로를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지옥과 같은 삶입니다.
지옥의 본질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과 운명이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 땅에도 있습니다. 천국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죽음 이후에도 그 교제가 끊기지 않는 것처럼, 지옥 또한 이 땅에도 있고 사후 세계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지옥은 경건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초월적인 분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며, 이는 곧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나타납니다. 지옥은 그 경건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하나님 없는 자리에 자기 탐닉이 들어섭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지옥이 되는 것이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형태가 자기를 탐닉하고 파괴하며, 나아가 타인을 착취하고 함부로 대하는 파괴적인 삶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에서 자기 친척들과만 즐겁게 잔치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가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성경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이 바로 지옥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절한 하나님, 그로 인한 자기 탐닉과 타인 파괴적인 삶 때문에, 나사로 역시 지옥 속에서 살았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거절함으로써 이 땅에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전이 일어납니다. 부자는 저승에 가서도 그 지옥의 본질, 즉 하나님과 단절된 삶이 무엇인지를 경험합니다. 뜨거운 곳에서 목말라 고통스러워하며, 이승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구걸합니다. 이승의 삶과는 정반대가 되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지옥입니다. 많은 이들이 저승의 그곳만 지옥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승에서 지옥을 만든 그 부자가 저승에서도 그가 구현한 지옥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지옥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지옥의 비유와 시적 진실
그렇다면 사후의 지옥이 문자 그대로 불이 타고 구더기가 죽지 않는 곳이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시적으로 표현할 때, 그 말은 진실이지만, 문자 그대로 내 마음이 호수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인의 진실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불에 탈 것이다'라는 말은 진실입니까? 진실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관계의 파탄을 의미한다고 풀이할 수 있고, 그 풀이도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안에서는, 시적 진실처럼,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상징은 그대로 진실입니다.
저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도 있고 사후에도 그 고통이 연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어둠 속에 머물며, 그 허탄한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나쁜 일들이 지옥의 현상이며 결과입니다.
지옥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
그러면 지옥은 어떤 종류의 지옥일까요? 현대 신학에는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전통적 견해'입니다. 이는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토록 계속되는 의식적인 고통으로서의 지옥입니다. 부자가 영원토록 의식하며 고통 속에 놓여있다는 견해입니다.
둘째, '절멸설'입니다. 많은 복음주의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조차 전통적 견해가 성서 전체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 견해를 따릅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이란, 지옥과 악인들의 존재 자체마저 없애버리는 것(소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보편 구원론'입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결국 이 우주 안에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그분의 아름다움이 우주를 채울 때 악인과 죽음의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혐오하고 증오하는 그 존재들조차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결국 제자리를 찾고, 이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넷째, '연옥설'과 연결된 견해입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가톨릭의 연옥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견해는 성서적 근거가 가장 빈약하다고 봅니다.
지옥에 대한 유일한 생각은 '전통적 견해'뿐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드라마를 볼 때, '보편 구원론'이나 '절멸설' 역시 충분히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무시하며 자기 탐닉적인 삶을 고집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관계를 단절하며 오는 허무와 좌절, 절망이 지옥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힘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옥이 전통적 견해인지, 절멸인지, 보편 구원인지는 확증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은 지옥에 대해 23번 언급할 뿐, 사후 세계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 견해는 모두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부딪히는 지점이 있기에 논쟁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중심 주제에 집중하라
저는 지옥에 관한 상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논쟁은 그대로 놔두고, 신앙의 중심 주제인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면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을 찾자고 제안합니다.
신앙 안에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것은 기독교의 범주 안에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믿음과 신조의 논의를 풍부하게 하면서, 그 외의 부차적인 것(지옥의 형태 등)은 서로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치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싸우기보다, 일치될 수 있는 풍부한 부분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조직의 목표가 갈등 해결에만 몰입되면 안 됩니다. 조직의 공통된 목표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옥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이단'이라 정죄하며 싸워봐야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복된 구원의 기쁨 안에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말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지옥이 그렇게 중요했다면 "때가 찼고 영원한 지옥 불이 있으니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선포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돌이킴'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일대일로 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 선이 있으면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이 따르는 것이지, 둘을 동등한 지위로 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른 고대 종교들과 달리, 저승 여행(하데스 여행)이나 하늘 여행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많기에, 다른 종교의 관심사를 가지고 성경에 자꾸 질문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에 대한 답이 별로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강조하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르는 것을 자꾸 관심 가지기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기쁨과 사랑입니다
저는 지옥에 대한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의 활력이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삶이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구현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부차적 주제'이며 '부록'입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위협이 강조되지만, 그것은 부록일 뿐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천칭에 올려놓고 일대일로 다루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일 수 있습니다.
지옥 문제가 신앙생활의 본질을 방해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기우와 같은 것이며, 본래 차지해야 할 비중 이상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상이 어그러진다면, 하나님께서 섭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돌보시며, 인간의 어떤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영광이 가득한 세상으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발생하는 지옥의 문제를 하나님의 본질(사랑,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어렸을 때 이북에서 피난을 오셨습니다. 배를 타고 넘는데, 어떤 분이 "교회 다니니? 시편 23편 아니?"라고 물었고, 함께 외웠다고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것이 신앙입니다. 두려움과 죽음 앞에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지, "너 이런 잘못 때문에 지옥 가야 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변덕이 있어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고, 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 죽을 때 천국 갈 자신 있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너의 불안을 왜 남에게 전염시키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 죄 안 짓고 실수 안 하고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악을 덮는다고 말하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자기 수준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낮추지 마십시오.
신앙은 이 우주의 근원에 '사랑'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했듯이, 썩고 부패하고 외면하고 싶은 '죽어가는 것'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사람을 조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 두려움과 불안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뒤에서 겨누는 총칼(두려움)이나 앞에서 흔드는 돈(이득)만이 아닙니다. 그 앞에 '꽃'을 두면, 즉 '아름다움' 때문에 움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두려움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영혼과 재회의 문제
얼마 전 윤여정 배우께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너무 뵙고 싶은데, 어떤 과학자가 영혼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무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영혼이 없으면, 우리는 죽은 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과학이 알려주는 우주의 질서와 지구에 탄생한 생명, 특히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감수성, 자유의지를 갖춘 인간의 존재는 경이롭습니다. 과거 서양 세계에서는 이 인간의 독특성을 '영혼'의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학에서는 동물들도 문화적 학습(신호등 보는 까마귀)을 하고, 친사회적 이타성(동료의 고통을 보고 먹이를 포기하는 원숭이)과 공정성(오이 대신 포도를 받은 동료를 보고 항의하는 원숭이)을 보인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합니다. 그들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일 뿐이며, 뇌의 호르몬(옥시토신) 등으로 설명할 수 있기에 굳이 '영혼'이라는 가설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인간이 폴짝 뛰는 것과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은 '질적 차이'입니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의 정교한 언어 능력은 동물의 의사소통과 완전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언어학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영혼'은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이 주제는 매우 복잡하고, 풍부하며, 때로는 상충하는 논의가 있습니다. 성경은 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 기록된 책들을 모은 것이며, 기독교 2천 년 역사 동안 서양 철학과 만나며 전개되었기에,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영육 이원론과 통전적 인간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육 이원론(靈肉 二元論)'입니다. 이는 인간이 서로 다른 실체인 '육'과 '영'으로 구성되며, 육은 썩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바이지만, 사실 성경에서 주도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고대 헬라의 오르페우스 종교, 플라톤 철학, 인도의 윤회 사상, 기독교 초기 영지주의 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육체를 악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금욕을 통해 영혼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사상에 기초합니다.
둘째는 '통전적 인간론(영육 일원론)'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된 사상에 더 가깝습니다. 구약에서 '영혼'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네페쉬(Nephesh)'는 몸과 분리된 영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생명체' 자체를 가리킵니다. 신약의 '프시케(Psyche)'나 '사르크스(Sarx, 살)' 역시 인간 전체를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육'과 '영'을 대조하는 것도, 물질과 비물질의 대조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상태'를 대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의 '영혼(프시케)' 역시, 다른 구절에서는 '목숨'(6:25)이나 '마음'(11:29)으로 번역됩니다. '프시케'는 기본적으로 목숨, 한 사람 전체, 혹은 동물적 삶과 대비되는 '참된 삶'을 의미합니다.
통전적 인간론은 인간을 육과 영의 구성으로 보지 않고, 이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능과 도덕적 능력을 발현하는 '통전적인 존재'로 봅니다. 한 구약학자는 "육체는 영혼의 외면적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 죽으면 영혼이 따로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부활 때에 하나님이 '부활체'를 선사하심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의 질문은 '사랑하는 이들과 재회하고 싶은데, 영혼이 없으면 재회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꼭 영육 이원론을 따라야만 재회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 사상은 플라톤식 영혼 불멸 사상과는 다릅니다. 중요한 말을 하겠습니다. 인간은 '영혼'이라는 불멸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죽음 이후에도 그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 때문에(즉, 부활하게 하시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활하게 하시는 능력'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자비를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회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 이것이 성경에 있는 부활 사상이자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질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7 요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회가 우리 안의 불멸하는 요소 때문이 아니라,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과학과 영혼의 문제
과학자가 "영혼이 없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종교가 말하는 영혼은 원래 과학의 증명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과학이 '있다', '없다'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학으로 입증 불가능하고, 입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둘째, 과학의 현상 서술과 '해석'은 다릅니다. 어떤 과학자가 우주를 보고 "이 세상은 어둠과 죽음이 전부이고, 인간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해석'입니다. 반면 저는 그 똑같은 현상을 보고, "이 막막한 우주에 생명이 태어나 사랑을 하는 것을 보니, 사랑이 이 우주의 중심이며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저의 해석입니다. 과학의 현상 서술을 보며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에 감탄하게 됩니다.
누가 구원받는가: 배타성과 배타주의
미국에서 천 명에게 "죽어서 천국에 갈 것 같은 유명인"을 물었더니, 마더 테레사(79%)보다 '자기 자신'(87%)이라는 응답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은 구원의 문제에 관해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전제를 가지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는 구절을 핵심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들의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들은 맥락 없이 비기독교인을 정죄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도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예수께서 떠나신다니 근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3년 동안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충분히 경험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길과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감금한 '유대인 권력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면밀히 검토하고도 자신들의 이득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충분히 알면서도 거부한 그들을 향해 "여러분이 버린 이 돌, 예수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의 청중은 모두 예수님을 충분히 알 기회가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을 알 기회조차 없었던 이순신 장군이나 우리 조상들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너는 정말 예수님만 너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사느냐? 너는 정말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고백하느냐? 아니면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돈이나 명예 같은 다른 길을 따르고 있지는 않느냐?"라고 묻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배타성(Exclusiveness)'과 '배타주의(Exclusivism)'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는 '이기성'과 '이기주의'를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기성'(자기를 이롭게 하는 성향)을 가져야 합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이기성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자기의 이기성 외에 다른 사람의 이기성을 모두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배타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 역시 불교나 유교 경전을 읽지만, 내게 있어서 나의 주님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배타성입니다. 그러나 '배타주의'는, 내가 가진 배타성 외에 다른 사람이 가진 배타성을 모조리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배타성을 갖지만, 배타주의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배타성이 다른 차원의 문제인 배타주의로 흘러 폭력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님을 몰랐던 아브라함이나 한나는 구원받았나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에게는 우리가 강조하지 않는 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합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무지했던 시대'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했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채근하지 않고 눈감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시간과 장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다는 것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없던 시대와 장소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시고 그분에 대해 충분히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는 정말 예수를 너의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 믿느냐"는 준엄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마음 좋게 사시다가 신앙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삶이 엉망인 분들은 어떻게 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삶도 엉망인 분들은 어떻게 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삶도 훌륭한 분들이 어떻게 될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우리의 지식과 양심으로 어떻게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얼마큼 믿어야 구원에 충분한지, 얼마큼 회개해야 진실한 회개인지, 저는 모릅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그 구절들을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인간을 그분의 사랑으로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삶과 증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과 진리요 생명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의 의지와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이 고백을, 누군가의 운명을 재단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인인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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