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박영선 목사
1. 기독교 신앙의 본질: '대등한' 파트너로의 초대
* 우리는 "왜 고난이 있는가?"라고 묻지만, 이 질문은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가?"로 바뀌어야 합니다.
*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종'과 '주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대등한 인격적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눌 파트너'로 부르셨습니다.
2. '자유'의 필연성: 파트너의 조건
* 대등한 관계는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자발성은 '자유'가 주어져야만 가능합니다.
*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필연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포함합니다.
* 고난은 이 '자유'를 가진 우리가 '책임'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훈련장입니다.
제2부. 출애굽의 비유: 구원의 '신분'과 성숙의 '수준'
1. 애굽 (노예 상태)
* '애굽'은 자유가 없는 대신, 먹고사는 것에 대한 '책임'도 없는 상태입니다. 시키는 일만 하면 생존이 보장됩니다.
2. 홍해 (구원의 '신분')
* '홍해'를 건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노력 없이 '신분'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3. 광야 (훈련의 '수준')
* '광야'는 진짜 문제입니다. '신분'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수준'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 그들은 '자유'를 얻자마자 현실적 고난(물, 음식, 적)에 부딪혔고, 즉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습니다.
* 이는 '책임'져야 하는 '자유'보다 '책임' 없는 '노예 상태'가 낫다는 고백입니다.
4. 결론: '광야'는 필수 과정
* 구원은 '신분'의 즉각적인 변화와, '수준'의 평생에 걸친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은 '노예 수준'의 우리를 '자유인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광야'라는 훈련 과정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제3부. 비유: '쇼생크 탈출'과 자유의 두려움
1. 영화의 핵심: '구원'과 '허락'
*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제는 '쇼생크 구원(Redemption)'입니다. 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과 같은 맥락입니다.
* 평생 감옥에서 산 '레드'는 가석방 후 자유를 얻자, 화장실을 갈 때도 "허락"을 받으려 합니다.
*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유'가 두려워 "나는 여기가 무서워... 돌아가고 싶어"라고 고백합니다.
2. 자유의 역설
*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친 이스라엘의 심리입니다.
* '책임 없는 속박'은 '책임져야 하는 자유'보다 심리적으로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고난은 우리가 이 '자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책임지는 자유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제4부. 구약의 인물들: '수동태'로 받는 훈련
고난 속에서 거의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더 많습니다.
1. 요셉 (Joseph): 승리가 아닌 '단련'
* 흔히 요셉이 '비전'을 붙잡고 고난을 '이겨냈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시편)은 다릅니다.
* 성경은 "그가 종으로 팔렸다", "그의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 (혹은 쇠사슬이 그 혼을 뚫었다)고 '수동태'로 기록합니다.
* 요셉은 억울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당하면서'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단련' 당했습니다.
* 그가 모든 의미를 깨달은 것은, 총리가 되어 형들 앞에 섰을 때, 비로소 과거의 꿈을 기억해 낸 그 순간이었습니다.
* 교훈: 고난은 우리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수동적으로' 빚어지는 과정입니다.
2. 엘리야 (Elijah): '승리' 너머의 '역사'
*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을 이기는 극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이세벨은 여전했고, 그는 도망자가 되어 로뎀나무 아래서 "나만 남았다"며 절망합니다.
* 하나님은 불과 바람(그의 성공 방식)이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와, "가서 다음 세대(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일상적인 '역사'를 명하십니다.
* 교훈: 우리는 '승리'로 역사가 끝나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를 넘어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고난은 우리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감당할 실력자로 우리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제5부. 신약의 비유: '화음'으로서의 성숙
1. 성령 충만: '방탕'의 반대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방탕'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회성 신비체험이 아니라, 욕조에 물이 차오르듯 '시간' 속에서 지혜와 실력이 '쌓여 올라가는' 과정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이 핵심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우리는 '성령 충만'을 20세기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처럼 이해하지만, 18절의 '성령 충만'은 우리가 아는 감동이나 은사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술 취함'과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최악의 상태인 '술 취함'과 비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방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탕하다'는 말을 우리는 도덕적인 타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방탕'은 '낭비'를 의미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가 허랑방탕했다는 것도, 술 먹고 농땡이 쳤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 밑에서 배워야 할 '시간'을 놓쳐버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전체가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간을 아끼라', '지혜로운 자가 돼라'는 명령 뒤에 성령 충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시간'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듯이 하나씩 밟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도 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초시간적', '초월적인'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 역시, 창조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지 않고, 그 '시간 속으로', '공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우리도 본받고 재현할 수 있게 하시려고, 구체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신 것입니다.
2. 결혼: '이중창'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오래 참음'(Love is long suffering)입니다.
*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 목적은 '화음(Harmony)'입니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소리, 즉 '이중창'을 만들기 위해, 상대의 소리를 들으며 내 소리를 조율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성숙입니다.
* 교훈: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딴 소리'(실패, 죄) 내는 것을 기다려 주시며, 하나님의 음성에 우리를 조율하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어지는 말씀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구절입니다. 많은 여성이 싫어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구절처럼) 사랑과 복종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성령 충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좋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하고, 그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들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내가 미쳤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상대를 미워하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문제가 있었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랑은 '진심'과 '열정'입니다. 내 진심이 변한 것도 아니고, 열정이 식은 것도 아닌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천사의 말이나 산을 옮기는 능력이 아니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우리말은 완곡하게 번역되었지만, 영어 번역(KJV)은 'long suffering' 즉, '오랜 고통'에 가깝습니다. 이 말은 결혼 생활에 바로 적용됩니다.
모든 결혼한 사람은 고통스럽습니다. 가족에 묶여 보란 듯한 일을 할 틈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묶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둘로 묶임'(연합)을 당합니다. 사랑으로 묶였으니 일심동체가 될 줄 알았는데, 둘이 하나가 아니라 여전히 '각각'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문제에 엮여 있는데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견딥니까? 헤어질 수 없어서 견딥니다. 극단적인 생각도 하지만, 그게 더 어렵기에 '할 수 없이' 삽니다. 그러면서 '지는 법'을 배웁니다. 지는 것이 사랑이고, 지는 것이 지혜이며, 지는 것이 용기입니다.
남자는 홀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웅주의적 기대를 꺾고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유를 '권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독불장군을 '결혼'이 사람으로 만듭니다. 여자도 자식을 기르고 남편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통해 배웁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이중창'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중창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음이 다른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화음(和音)'이 생깁니다. 화음은 혼자서는 죽어도 만들 수 없는 예술이며,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족하신 분이지만, 그것을 더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상대를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으면 화음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아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가 기꺼이 이 이중창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리고, 가르치고, 자기 멋대로 하는 시간을 주십니다. 인간이 명령을 어겨 죄를 지었을 때, 그를 없애고 순종하는 새 사람을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작'이고 '조정'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중창을 못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내는 '딴 소리'를 받으십니다. 부부는 결국 나중에 가서야 "우리가 천생연분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선언은 앞뒤 문맥 없이 들릴 수 있지만, 그 배경에는 "내가 너를 복되게 하려고 이 사람을 준비해서 네게 주었다. 이제부터는 둘이 화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크게 역사가 있고, 각각의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현실이 곧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실이며, 우리 보고 잘 크라고 주어진 조건임을 안다면, 우리는 보다 적극적이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우리를 만듭니다.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 씨가 조폭으로 나옵니다. 아내와 딸이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리고, 그는 혼자 생활비를 보내줘야 합니다. 조폭 역시 먹고살기 위해 속 썩는 일이 많습니다. 어느 날 속상한 일이 있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와 딸이 정원에서 물총 싸움을 하며 노는 영상 테이프를 보며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자, 울면서 밥상을 걷어차 버립니다. 그다음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자기가 걷어찬 밥상을 자기가 치웁니다. 다음에는 치우기 쉬운 베개를 던질 것이고, 그다음에는 안 던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합니다.
행복이란, 외적인 조건이 완성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 속에서 위대한 사람,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 전체입니다. 사사기와 열왕기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 잘해보자"고 새 판을 깔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조건 속에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신앙과 증거를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공동체나 모임이 정상적인 신앙 행위인지를 보려면 '웃음'이 있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바른말을 하고 더 잘하자고 하는데 자꾸 무서워지면, 그것은 잘못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열심히와 진심이 비난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병은 '체념'과 '무관심'입니다. 어떤 현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잘 아시는 마태복음 7장에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집을 얼마나 잘 지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지었는가' 하는 기초의 문제입니다.
이 비유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 현실 속에서 '거짓된 신앙과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법으로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은 바로 '열매'입니다.
보통 '열매'라고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연상하며 '많은 열매를 맺자'는 선입견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핵심은 '열매를 보면 그 나무, 곧 정체를 안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는 말씀처럼, 열매는 그 본체를 증명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배나무와 감나무를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가을에 열매가 달린 것을 보면 누구나 배나무와 감나무를 구별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무섭게 경고하시며,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바로 뒤에 반석과 모래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혼동이 발생합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냈는데, 그것이 '나(예수)를 근거로 한 열매가 아니다'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비유를 단순히 '열심히 지은 사람(반석)'과 '게으른 사람(모래)'의 대조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라며 '노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는 열매가 '본체의 증거'라는 사실과, '기초가 어디인가'라는 핵심을 혼동한 것입니다.
이 혼동은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에서 명확해집니다. 말씀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며, 성령을 따르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고 분명히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따르는지 성령을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역시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육체를 따르면 투기와 질투와 다툼이 생기고, 성령을 따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생깁니다.
이제 마태복음 7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둘 다 집을 '잘 지었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훌륭한 신앙 행위를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부흥 시대에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 행위의 결과로 '육체의 열매'(다툼, 정죄)가 나와 버린 것입니다. 즉, '잘하는 것(doing)'과 '근본이 틀린 것(being)'의 문제입니다. '잘하면서 동시에 틀릴 수' 있습니다. 신자의 '신분'은 취소되지 않지만, 그 신분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놓고도 그 열매를 스스로 판단하고 적용할 때 실수를 합니다. '열심'과 '진심'이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나 모임이 정상적인 신앙 행위를 하고 있는지 보려면, 그곳에 '웃음'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바른말을 하고 더 잘하자고 하는데, 그 결과 구성원들이 자꾸 '무서워진다'면, 그것은 잘못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인내는 어디에서 생깁니까? 어려움 속에서 생깁니다. 성령의 열매는 어려운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려운 일을 '감수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표)이지, 따르는 일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번의 성령 충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욕조에 물을 받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기둥이 쏟아져도 욕조는 즉시 채워지지 않습니다. 물이 바닥부터 닿아 '수위'가 차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에베소서 5장의 성령 충만이란, 이렇게 물을 튼 것과 동시에 수위가 차오르는 과정과 같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기질, 실력, 습관, 지혜가 '쌓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작이 있고 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다들 조급해 하십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병은 '체념'과 '무관심'입니다. 어떤 현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80세에 부름 받았을 때, 그의 첫 반응은 "여태껏 무엇을 하고 계시다가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라는 불만이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시며, 왜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항의였습니다. 40년 전, 그가 40세의 열정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모든 열정이 타고 재만 남은 80세가 되어서야 부르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답하십니다. 그 의미는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네가 미디안에서 헛수고했다고 생각하는 그 40년의 시간에도 나는 너와 함께 있었고, 너를 준비한 시간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시간은 모세가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칭찬을 받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도전과 훈련에 대한 체념이나 외면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돌아서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답하는' 하루하루로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냄을 받은 이 '현실'은 곧 '성육신(Incarnation)의 장'입니다. "땅끝까지 가라"는 선교적 차원은 단순히 전도를 하라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이 우리를 빛과 생명과 진리로 세우셔서 이 시대와 조건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열매 맺는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현존 가치이며 책임이고 영광입니다.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됩니다(엡 1:6).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뜻과 목적, 그리고 전심을 두고 계십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는데도 부모가 그 자리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포기가 안 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포기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찍고 계신 멋진 드라마의 주인공인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힘들다고 둘 다 그만두겠다고 하면 영화를 망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 가는 것, 착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통에 대해 겁을 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편함'과는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신적인 명예와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것은 자식 문제가 아니라 '인생 문제'입니다. "인생을 어디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신다고 하십니다. 신앙 상담을 해보면 모두가 '증상'에 대한 질문과 그 '해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좀 나아져야 하지 않는가"라는 기대가 그 질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현실'이라는 문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하는 종교입니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초월자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자연과 육체 속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뜻밖에 초월을 내용으로 삼되, 그것을 '육신 안에서', '역사 안에서' 구체화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기쁜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 어려운 과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라야' 하는 것과 같고, 부부가 결혼하면 '그때부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호하는 것, 취향, 박자가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어려움이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다 감수하고 포용하고 '넘어서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결혼을 요구하시는 이유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부부의 연합과 그 의미와 형편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은, 현실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구원론' 위주로 신앙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부흥 시대를 거치며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실존적 신앙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나의 경험'과 '나의 확인'이 고백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역사적 신앙관'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예수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창조'와 '타락'에서 시작하며, 이스라엘의 기나긴 '실패의 역사'를 펼쳐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나 '무속 신앙'은, 인간의 정성(지성이면 감천)으로 신을 항복시켜 보상을 얻어내는 '거래'입니다. 신이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목적을 갖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엡 1:3-6). 그 목적은 우리를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 드렸는데 고달픈 인생을 주십니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이스라엘이 내 말을 안 들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훈련시켰다"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믿음의 상대'로 요구하십니다. 사랑과 믿음은 강요나 공포가 아닌 '자발성'에 근거하며, 이는 두 존재가 '대등함'을 전제로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가 얼마나 컸던지,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는 것, 즉 '크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자발적으로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하려면 '실력'(지혜, 안목,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실력은 연습과 경험 없이는 생기지 않으며, 그 경험은 대부분 '실패한 경험'입니다. 신자의 인생이 고달픈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도록 역사 속으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했듯이, 우리 또한 세상 속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배웁니다. 이는 우리가 자식을 길러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철이 없어서 부모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고, 부모는 그 과정을 '견뎌야' 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너도 커 보면 안다"는 말처럼, 그 누적된 시간을 통해 성장합니다. 훗날 돌아보면, 실패라고 생각했고 부끄럽다고 여겼던 과거가 지금의 나(인정 많고, 웃어줄 수 있고, 한 수 접어줄 수 있는 사람)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는 내 작품이며, 너희도 내 작품이다"라고 하십니다. 신은 초월의 내용을 육체(예수, 그리고 우리)에 담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며,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은, "너희를 다 이와 같이, 여기까지 만들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예수의 자리에 서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자식에게도 그런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여, 저 자식을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훈련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최선'과 '도덕'을 내세웁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착하게 살았는데 이게 뭡니까?"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기본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커야' 합니다. 바울의 가시를 향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응답처럼, 우리는 다 각자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예수가 겪었던 동일한 일을 겪습니다. 성경은 "너는 지고 살아도 괜찮다. 내가 여기서 부활과 영생을 증언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약속은, 모든 일이 형통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고난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느냐"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저 웃으며 "얘야, 오늘은 그만 고집부려라. 타협하자"라고 말하고 '시간을 끄셔야' 합니다. 한 번에 아이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들이 '누적'되어 나이 들어 보면, 잊었던 옛날이 다 생각나고 그것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자식 문제가 아니라 인생 문제입니다. "인생을 어디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신다고 하십니다. 너는 거기서 손해 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자식이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자리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것은 포기가 안 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포기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영화 찍다 말고 관두고 나간 것이죠. 자기 하나 관뒀는데 드라마 하나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영화 <벤허>를 사람들은 전차 경주 장면 때문에 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벤허는 복수를 이룬 후에도 평화를 얻지 못하고 "신이 메살라 같다"며 고뇌합니다. 그가 평화를 얻는 순간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 말씀이 그의 가슴에 있던 칼을 놓게 했습니다. 영화는 복수가 아니라 이 용서를 말하기 위해 그 긴 여정을 달려온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메살라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그 역할을 해내야 했던 '배우'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이 속한 거대한 영화의 전체 줄거리를 다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6부. 욥기의 재해석: '도덕'을 넘어 '창조'로 (고등 교육)
1. 욥기의 전제 오류: '인과응보'라는 틀
* 욥기는 '의인'이 고난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인과응보'의 틀을 깨뜨립니다.
*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원인) 벌을 받는다(결과)"는 '도덕'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 욥 또한 "나는 죄가 없는데(원인 X) 왜 벌을 받는가(결과 O)?"라며, 같은 틀 안에서 하나님의 '불공정'을 항변합니다.
2. 하나님의 대답: '창조'
* 하나님은 욥의 도덕적 질문(Why?)에 답하지 않으시고,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악어의 힘을 아느냐?", "네가 땅의 기초를 놓았느냐?"
* 이는 "너는 '원인-결과'의 법칙에 갇혀 있지만, 나는 그 법칙을 만든 '창조주'다"라는 선언입니다.
3. 해석: '도덕'에서 '창조'로의 졸업
* 하나님은 욥을 '도덕법'(잘못하지 않기)의 수준에서 '창조법'(무에서 유를 만들기)의 수준으로 '졸업'시키고 계십니다.
* 이 '창조'의 논리가 신약의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원수 사랑은 '인과응보'의 도덕률로는 불가능한 '창조적' 행위입니다.
* 교훈: 고난은 '벌'(도덕)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적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로 빚어 가시는 '고등 교육'입니다.
제7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성육신'
1. 우리의 사명: '보냄을 받은 자'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우리의 사명은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세상 밖에서 '심판' (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 '문맥(Context)'과 '본문(Text)'의 비유
* '문맥' (Context): 우리가 세상과 공유하는 '현실'입니다. 이곳은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곳'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병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습니다.
* '본문' (Text): 우리가 그 '문맥' 속에서 품고 있는 '내용'입니다.
* 세상의 본문: "문맥이 곧 본문이다." (예: "세상은 불공평하니 나도 불공평하게 살겠다.")
* 우리의 본문: "문맥과 다른 본문이다." (예: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나는 '용서'와 '부활'과 '사랑'의 본문을 살겠다.")
3. 진정한 사회적 책임: "넌 뭐야?"
* 우리의 책임은, 동일한 '문맥' 속에서 완전히 다른 '본문'을 살아냄으로써, 세상이 우리에게 "넌 뭐야?"라고 묻게 만드는 것입니다.
* 이 질문이 바로 '전도'의 시작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성육신'적 책임입니다.
제8부. 결론: '어른'의 짐과 나이 듦의 가치
1. 업적(Achievement)이 아닌 존재(Being)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성숙입니다.
* '짐'이 많아졌다는 것은 불평거리가 아니라, 그만큼 '지위'가 높아졌고 그 짐을 감당할 '실력'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2. '어른'의 역할: 짐을 져 주는 자
* '아이'는 짐을 벗으려 하지만, '어른'은 자기 짐과 더불어 남의 짐을 함께 져 줍니다. "괜찮다", "내가 들어줄게"라고 말하며 '화음'을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3. 나이 듦의 가치: '산행'의 비유
* 목사님은 "철없던 3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나이 듦은 쇠퇴가 아니라 '지혜의 누적'입니다.
* 인생은 '산행'과 같습니다. 산을 오를 땐 발밑의 흙만 보이지만, 문득 '고갯마루'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올라왔는지, 시야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알게 됩니다.
* 최종 결론: 고난은 우리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평생의 고난을 통해 다른 이의 짐을 함께 지며 하나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성숙한 존재'로 완성되어 갑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해영 <숨지 마, 네 인생이잖아> (1) | 2025.12.01 |
|---|---|
| 천국과 부활과 지옥 (1) | 2025.11.15 |
| 7 Signs - 일곱 개의 표적, 예수님을 만나다 (1) | 2025.11.02 |
| 고난을 이해하고 이기는 방법 (1/2) (1) | 2025.10.29 |
| 야곱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0) | 2025.10.27 |
|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감사가 먼저입니다 (0) | 2025.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