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강사: 이유원 목사
- (죽전) 신세계교회 담임목사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 한국침례신학대학교(M.Div)
- '중증외상센터' 이낙준 작가의 아버지
요약
이렇게 큰 집회에 처음 참석하는 것에 감사.
간증의 진정한 목적은 청중들이 "저 목사님은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님. 청중들도 간증자가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길 바람. "천국 입성"이 가장 중요.
영접 기도와 신앙의 중요성
내가 여러 곳에 불려 다니게 된 것은 유명해진 아들(웹소설 작가 '한산이가') 덕분이지만, 아들이 세상적으로 성공(입신양명)한 것이 효의 끝이 아니라 '천국 입성'이야말로 진정한 효도의 끝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로서의 유일한 목적도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영접 기도를 함께 하자.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함. 다른 모든 성공이나 성취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음
성령 체험 이야기
목사님 딸(지금 사모님은 아님^^)과의 연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수련회에서 통성기도를 처음 경험하며 '주여' 한 마디에 불덩이 같은 성령을 체험한 이후 십자가의 실재성을 깨닫고 이로 인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됨. 거듭난 나를 만물이 알아보는 듯한 신비한 경험(만물의 기다림)을 했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휴교 기간에 겪은 유체이탈 경험.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이 단순한 육체가 아닌 영적 존재임을 깨달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영성(Spirituality) 임. 신앙생활에서 영적 감각과 깨어있음이 매우 중요함
믿음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
신앙생활은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행복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가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안 기쁜데 기쁜 척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교회 가면 교회 억양을 쓰고 교회 얼굴을 만들고, 하나도 안 기쁜데 기쁜 척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최악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속상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은 군대처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길 바라시는 분.
데살로니가 5장 15-17절 기쁨과 감사의 중요성.
"항상 기뻐하라"는 감정에 대한 명령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쁨을 강제 집행하시겠다는 약속.
기도는 확률게임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볼 때, 담대한 기도가 매우 중요함
아들들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개입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 불행했기 때문입니다. 세대가 지났는데도 아이들이 똑같은 학창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공부에 대한 억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네가 지금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네가 기도하고 공부를 하면, 딴 애들이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을 너는 2, 30분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 아이들은 고2, 고3 때 딱 그 시기에만 공부를 시작해서 바로 1등을 했습니다.
큰 아들(낙준)이 술을 먹고 돌아왔을 때 직접 꾸짖는 대신 기도함.
그 아들이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온 경험 이후, 스스로 돌이켜 열심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됨.
둘째 아들(예준)이 수능을 망쳤으나 연세대 논술시험에서 성령의 역사로 합격한 기적.
예비번호 118번이었는데, 그 해 연대 경영대가 119번까지 합격자를 받아 기적적으로 입학
전도와 사명에 대한 가르침
예수 믿고 지상에 남은 유일한 이유는 '전도'이며,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위치까지 책임지고 올려주신다.
전도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보상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실패해도 보상이 있고, 성공해도 보상이 있는 하나님의 시스템.
현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영성 부족, 종교화, 나약함이다.
모세도 "상 주심을 바라봄"으로 어려움을 견뎠음
수험생 학부모들을 위한 격려
내일 수능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한 기도 방향도 "실력발휘"를 기도하기보다는 "기적"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함. 학부모들은 자녀의 시험을 위해 담대하게 기도할 것을 권면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역사와 기적을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상 사명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적용과 결단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에서 출발하니 사는 날 동안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주님과 동행하며 삶의 고비들을 멋지게 통과하고 돌파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간증을 들을 뿐 아니라 여러분 삶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평생에 이렇게 큰 집회는 처음입니다. 참 좋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유튜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간증을 너무 좋아하지 마라. 간증은 간증하는 당사자의 삶의 최고점(peak experience)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도움이 될 수 없다.
그 사람도 꼭대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닥까지 내려와야 하니, 우리는 바닥의 이야기를 들어야 유익하다.'
그것은 맞는 말이며 공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간증자로서의 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문제는 제 간증을 듣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원하는 것 한 가지는, 제 말씀을 듣고 '저 목사님은 대단하구나. 하나님의 참 종이라서 그런가, 여러 기적과 인도하심이 내 인생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시시때때로 필요할 때마다 저 못지않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제가 체험했던 드라마틱하고 과격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모든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원하시고 기도하실 때마다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이 오늘 제 메시지의 목적입니다.
효도의 시작과 끝
제가 여기 서 있는 것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입니다. 제 원님은 아들입니다. 아들이 유명 인사가 되어 제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여러 군데 출연도 했습니다. 이곳 다니엘 기도회에서 불러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효경(孝經)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毀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다 아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다음 구절입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효지종(孝之終)이라.'
출세하여 유명해져서 자랑할 만한 자식이 되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느끼기엔 속물적입니다. 자랑거리가 되는 자식이 되라는 것인데,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효도의 끝은 '천국 입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정색을 하고 묻습니다. "예수 믿느냐?" 진짜입니다. "예수 믿느냐?" 손자, 손녀들이 커가고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도 앞으로 제가 계속 가스라이팅을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느냐?" 정색을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도 걸핏하면 묻습니다. "예수 믿느냐고."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야 합니다. 여기서도 저는 그것을 하려고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 왔겠습니까? 자식 얘기를 하면 자랑 몇 개 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 잘 믿고, 천국 가고, 하나님께 상급 받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메시지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모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가끔 영접 기도를 시킵니다. 일 년에 대여섯 차례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영접 기도를 한 번 같이하자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초, 초, 초,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거 말고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했다, 성공했다, 돈을 벌었다, 유명하게 되었다 하는 것들도 물론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에 좋습니다. 내가 나중에 열매를 많이 거두어 천국 가서 상급 받기에 좋아서 그것이 좋은 것이지, 진짜 중요한 것, 정말 절대적인 가치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으니 예수님을 믿고 제 마음에 영접합니다.
영원히 들어오셔서 저를 다스리시고 왕 노릇하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령을 체험하다
저는 대학을 기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서울대 성악과를 나왔다고 하니 노래깨나 하나 보다 생각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목소리를 타고난 사람도, 음악성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며, 지금까지도 피아노를 제 뜻대로 능하게 연주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재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적으로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실기 시험으로 쇼팽의 '이별의 곡'을 계명창으로 불렀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특별하게 보시고 음대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제가 공부가 잘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부모님도 우물쭈물 허락하셨습니다.
마침 저희 부모님이 하시던 한식당에 동네 치과 의사 팀이 왔는데, 그중 한 분의 여동생이 서울음대 성악과 대학원생이었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레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3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저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저를 안영일 교수님께 데려가셨습니다. 안 교수님도 은인이신 셈입니다. 저는 그렇게 8월, 9월, 10월, 11월, 넉 달을 배우고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노래가 되는, 소리를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장 경쟁률이 3.8대 1이었습니다. 독일 노래, 이태리 노래, 그리고 '콩코네'라는 솔페지(시창)를 불러야 했습니다. 제일 문제는 독일 노래, 슈만의 '헌정(Widmung)'이었습니다. 피아노 반주가 나오면 바로 들어가야 하는데, 머리가 하얘져서 세 번을 연달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여기서 올해 날 붙여 주시면 내가 교회를 다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콩코네 솔페지를 하는데, 악보를 안 보고 부르다가 그만 멜로디를 틀렸습니다. 반주하던 누나가 멜로디를 쳐서 저를 다시 끌어들였습니다. '아, 떨어졌구나.' 마음이 싹 식으면서 오히려 침착해졌습니다.
그리고 이태리 노래를 불렀는데, 웬걸, 평생 그렇게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소리가 제가 원하는 대로 나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긴 떨어졌지만 노래는 잘 되네.' 독일 노래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커튼 뒤에서 심사하시던 교수님 중 한 분이 제 노래에 맞춰 지휘를 하는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반주자가 "오늘 안 선생님 제자 중에 네가 노래 제일 잘했다"고 했습니다. "콩코네 틀렸는데요?" 하니, "콩코네 아무것도 아니야. 노래 잘 불렀으면 됐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붙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을 때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믿고 보니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수련회를 갔습니다. 사실 교회를 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와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연애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과에서 캠퍼스 커플로 사귀게 되었는데, 그 사귄 여학생이 목사님 딸이었습니다. 원래 교회당은 연애당입니다. 교회 가서 만나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러 가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러 가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해야지, 우리가 어디 가서 이성을 만나겠습니까. 이상한 데서 만날 필요 없이 교회에서 만나면 됩니다.
제가 교회를 같이 다녔고, 다니다 보니 좋았습니다. 사실 저는 학교 입학시험 때 굉장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전공 노래를 부르러 들어갔다가 실수를 해서 100%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절박한 마음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제발 저 한 번만 붙여주시면 제가 교회를 다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교회를 다녀드리겠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켰을까요? 안 지켰습니다. 그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애를 한 그 여자친구가 목사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내가 약속을 안 지키니까 하나님이 강제 집행하시는구나.'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보니 참 좋았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 보니 기독학생회에 나가게 되었고, 담당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가 입학하기 전 해인 76년에 후두암을 기적으로 고침 받고 인생이 재정비된, 아주 뜨거운 분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이 우리를 끌고 다니며 수련회를 주관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그 간증도 열 번은 들었습니다. 수련회에 갔습니다. 77년에서 7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쫘악!" 하고 소리를 내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귀가 잡수셨나?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저는 '이곳은 내가 있을 데가 아니다' 싶어 나가려 했지만, 다다미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고 나갈 수는 없으니, 민폐라 생각되어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할 짓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 사람들과 똑같이 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통성 기도는커녕 본 적도 처음이었기에, 저는 하나님께 예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처럼 소리 질러 기도해야 할 모양인데, 난생처음 해보는 것이니 제가 '주여' 하고 크게 한 번 외칠 때, 응답하셨다는 표를 주십시오.' 여러분, 지혜롭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난생처음 해보는 노릇이기에 "주여!" 하고 소리를 뽑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주'에서 '여'로 바뀌기도 전에, 어떤 불구덩이 같은 곳으로 제 온몸과 영혼이 그 뜨거운 불 속으로 확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응답입니까, 아닙니까? 응답입니다. 그때 제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니 제 속에 생각이 났습니다. 그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 든 생각은 '죄송함'이었습니다. '주여' 한마디에 응답하시는 분인데, 내가 20년 동안 잘도 모른 척하고 살았구나. 두 번째는 '십자가가 진짜네!'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니 십자가가 진짜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함과 구원받은 감사와 기쁨이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나중에 목격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제가 기도 시간에 어떻게 하더냐고. 그랬더니, 제가 가만히 처음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주여!" 하더니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다 기절했다고 합니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밥 먹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이놈들이 저를 깨워 갔어야 하는데 황당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창문을 여니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이 제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얼음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데, 그 시냇물도 '안녕하세요?'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만물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거듭나자마자 만물이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 것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저는 그때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 나머지 삶은 이 사건 위에 놓이게 되겠구나.' 그래서 오늘 제가 여기 와서 여러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제가 신학교를 갔습니다. 신학교를 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부모님부터 친구들까지 전부 '이유원이는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간 것입니다. 제가 딱히 목사나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 인생은 그 사건 이후로 정해진 것이었고, 그다음부터 계속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전도하고 다니니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전도해 보십시오. 기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인생이 별 볼 일 없다면 전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도할 수 있는 입장과 위치, 위상까지 책임지고 올려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이며, 지상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전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 행복이 하나님의 자존심이다
거기에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행복하고 기쁜 것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기에, 저는 이 믿음이 최고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새롭게 하소서'에 나갔을 때, 사회자인 주영훈 씨가 자신은 평생 신앙생활을 군대에 끌려간 것처럼, 그것도 제일 고약한 해병대에 끌려간 것처럼 했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고생스럽고, 모든 것을 억지로 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셨는데, 세상 음악을 '사탄의 음악'이라며 듣지도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그는 억압받고 눌려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의 뜻이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놀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디스트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십시오. '내 행복이 하나님의 자존심이다.' 내가 행복해야 하나님의 자존심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과 사명을 억지로 끌려 다니며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시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다 아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이상한 명령입니다. 기쁨은 감정인데, 어떻게 명령이 성립됩니까? 제가 군대를 다녀왔는데, 군대에서 그 어떤 선임이나 계급 높은 사람도 졸병에게 "기뻐해", "슬퍼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청소를 해라" 같은 의지적인 일을 시킵니다. 아니, "기뻐하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기쁨을 강제 집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기쁨을 우리 인생에 박제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박제되고 고정되는, 그런 행복하고 기쁜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리고 그 중간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먹지도 자지도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것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쁘지 않고 감사할 일이 없어도, 내가 일단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고 감정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말씀과 약속에 책임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명령인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 가장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정말 오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정품을 잘 아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진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서, 여러분이 오늘부터 그것을 남김없이 다 누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번 따라 해 봅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항상 기뻐합니다. 기쁜 일이 없어도, 감사할 일이 없어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여러분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와서 어떤 목사의 메시지 한번 듣고 은혜받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평신도는 없다, 왕 같은 제사장뿐이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차별 없이 대접받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십니까? 왕, 제사장, 예언자. 이것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삼중 직분이며, 이 세 직분은 다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내가 왕 같은 제사장이면 이미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못 받았다는 것입니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계급적으로 제가 여러분의 위에 있거나 여기 김은호 목사님이 여러분보다 위에 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직 계급이라는 것은 가톨릭이 만든 거짓말입니다. 맨 꼭대기에 교황, 그 아래 추기경, 대주교, 주교, 일반 사제, 그리고 맨 밑에 평신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평신도니까...'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평신도가 아닙니다. '평신도(lay people)'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나옵니까?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직분이 있어서 그 직분에 대한 기름부음과 권위가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데 나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여러분, 우리는 평신도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이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여러분 평생에 사용하시고 그것으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유체 이탈 체험
1979년, 제가 대학 3학년 때 10.26 사태가 터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 잠이 깨면 무조건 FM 라디오(93.1 MHz)를 켜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클래식 방송이 나와야 할 시간에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전국 대학교는 휴업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단 학교에 안 가니 좋았습니다. 자유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자 이내 게을러지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낮잠, 이른바 '개잠'을 잤습니다.
똑바로 누워 잠을 자는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유체 이탈'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갑자기 귀에서 유리를 칼로 긁는 듯한, 그러나 그보다 백만 배는 더 불길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정신은 돌아왔지만, 온몸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는 이내 기계음 같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왼쪽 가슴에서 뛰던 심장 박동이 양팔로 옮겨가더니, 몸 바깥으로 고스란히 새어 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하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진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하반신이 무중력 상태처럼 45도 각도로 '쓱' 떠올랐습니다. 하반신이 몸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 감각은 너무나 생생해서, 덮고 있던 얇은 홑이불을 통과하는 느낌까지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영혼의 감각이 육신의 감각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반신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저는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직감했습니다.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기도하려 해도 미세하게 혀가 움직여야 하는데, 혀까지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기도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혀를 움직이지 않고, 오직 생각만으로 "주여!"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마자 떠올랐던 다리가 '탁' 하고 떨어졌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나중에 저와 같은 체험을 하신다면, 저보다는 오래 버텨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고작 하반신밖에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유체 이탈은 상반신이 빠져나오고 마지막에 머리가 나오며, 몸과 연결된 끈에 매달려 빙빙 돌면서 누워있는 자신의 육신을 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디 거기까지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절반도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육신이 아니라 '영(靈)'에 있다는 것, '나에게는 영혼이 있구나'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은 100% 영성(spirituality)에 기반해야 합니다. 영성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 생활에 불과하며, 굳이 교회를 다닐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영성이 있어야만 영적인 관심이 생기고, 영적 지식을 쌓게 되며, 영적인 감각이 깨어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은혜를 받고, 설교 말씀에 눈물도 흘릴 수 있게 됩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영이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실패해도 보상받는 천국의 다단계
영적으로 한 단계 더 깨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사명'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커피 한 잔,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사주면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맨입으로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게 만들면,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이것은 완전한 보상 시스템입니다. 실패해도 '실패 보상'이 나오고, 성공하면 '성공 보수'가 나옵니다. 심지어 완전한 '다단계'와 같습니다. 내가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 사람이 은혜받고 변화되어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합니다. 그 모든 단계마다 나에게 보상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다단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실패에도 성공에도 보상이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에게 전도했다가 관계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십니까? 아니, 관계가 잘못되면 어떻습니까? 그까짓 관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받을 보상에 비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 잃을까 봐 전도도 못 한다면, 도대체 예수를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지금 현대인들, 특히 한국 교회의 신앙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성이 없는 것, 신앙이 종교화된 것도 문제지만, 제가 볼 때 가장 크게 고장 난 것은 바로 '나약함'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너무 나약합니다.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배려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신앙의 미덕으로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렵습니까? 설령 깨진다 한들, 전도 한번 했다고 깨질 관계라면 그 관계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얻는 그 엄청난 기쁨을 어서 빨리 아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요,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 생활과 부유함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상 따위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속물이 아니다'라고 고상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 칸트 철학일지는 몰라도,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모세보다 위대한 분이 계십니까? 없지 않습니까. 위대한 모세조차도 '상'을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확실한 상 주심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예수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친절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때로는 얼마나 거침없이 말씀하시고,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얼마나 '엉망'으로 보일 수 있는 분이셨는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3장에는 산헤드린 회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인류 역사상 그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물론, 이 세상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가 "내가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라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라며 핀잔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며 고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여인이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응수하자,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딸을 고쳐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기에 목사님들이 가끔 설교를 하지만, 사실은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굉장히 난감해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첫 대답은 명백한 '막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면에, 기적을 구하러 온 간절한 여인에게 "너는 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역시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엉망진창'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남의 밭을 일구다가 보물단지를 발견했습니다. 도덕적인 행동이라면 마땅히 "당신 밭에서 이런 보물이 나왔습니다"라고 주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대로 숨겨두고, 돌아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통째로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의 취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 믿고, 하늘에서 상급을 받는 이 문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윤리적 잣대나 상식의 기준을 모두 초월하는, 정말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초월적인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어떻습니까? 이 비유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목사님들이 제대로 설명을 못 하는 '난해 구절' 중의 난해 구절입니다. 한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떼어먹었습니다.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You are fired. 넌 해고야"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이제 잘렸으니 어떡하나. 땅을 파자니 기운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하구나' 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전부 불러 모읍니다. "너는 얼마를 빚졌느냐?" "기름 100말입니다." "여기 50말이라고 고쳐 쓰라." 주인의 돈을 횡령하던 자가, 잘린 마당에 더 큰 사고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장면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불의한 청지기가 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으므로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해석이 됩니까? 목사님들은 이 본문만 만나면 골머리를 앓습니다. 설교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목사님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예수님을 '커버' 치려 합니까? 당신이 뭔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분의 말씀을 합리화하고, 예수님을 위해 변명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직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공생 3년은, 십자가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오직 직진하여 그곳에 '꽝' 하고 충돌하여 죽으신 삶이었습니다. 마치 절벽, 단애(斷崖), 즉 땅이 뚝 끊어지는 그 끝을 향해 달려가듯 자신의 공생애를 마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한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느슨합니까? 얼마나 한가합니까? 얼마나 쓸데없는 도덕적인 문제에 시간과 감정을 다 소비해 버리고,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큰아들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
분당 임해동에 집을 지었습니다. 양쪽 부모님들을 다 모시고 살 생각에 집을 크게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괜한 일을 벌인 셈입니다. 정작 부모님 당사자들은 그것을 큰 효도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저만 고생을 했습니다. 게다가 집이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과 거리가 있어, 아이들을 매일 태워다 주어야 했습니다. 물론 올 때는 알아서 오게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큰애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지 2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거실을 거쳐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데 그 기색이 이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너 술 마셨느냐?"고 다그쳤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밖으로 꺼내 직접 교정하려 들면, 특히 저처럼 목사인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다그치면, 아이에게는 반감만 생길 뿐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역효과입니다.
저는 '아, 이 녀석이 술을 마시는구나. 참 곤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제 방으로 올라가며 "어..." 하고 알 수 없는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며, '이놈이 술을 마셨구나' 하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이는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식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자식 농사는 부모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길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6월 2일, 바로 자기 생일이었습니다. 그 어느 날도 고등학생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분당 서현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술집이 밀집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데, 뒤에서 "낙준아" 하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시 걸어가는데, 또다시 "낙준아."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낙준아"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들은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집에 가야겠다"고 말하고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이 중요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귀에 직접 들릴 정도로 명백하게 부르십니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실 때는 꼭 세 번씩 부르시곤 합니다. 제 아들도 그 세 번의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의대에 가게 된 것입니다.
수능에 필요한 것은 실력 발휘가 아니라 기적이다
제 큰아들 낙준이는 '한산이가'라는 필명으로 웹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아들은 공군 군의관으로 장교 복무를 했는데, 아마 육군을 갔더라면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공군에 갔기에 시간이 남아도니 '웹소설이나 한번 써볼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소설을 동생인 예준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참고로 형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 둘째 예준이는 3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둘 다 1등을 하더군요. (아마 저와는 상관없이 엄마를 닮았겠지요.) 그래서 큰애는 의대를 갔고, 공군 군의관이 되어 웹소설을 쓰게 된 것입니다.
마침 내일이 수능입니다. 공동 기도문을 보니 '실력 발휘를 다 하게 해달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녀들이 실력 발휘만 해서는 대학에 못 갑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확률 게임이 아닙니다. 확률이 높은 일에 왜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기도는 믿음으로 선포하고, 그 결과로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기도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보십시오. 재판장은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하는 자였지만, 한 과부가 밤낮으로 찾아와 원수를 갚아달라고 '발광'을 하며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결국 재판장은 '이 여자가 나를 성가시고 귀찮게 하니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 과부가 요구한 것에 무슨 대단한 도덕적 명분이나 깊이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기도에 굳이 거창한 뜻을 세우거나 말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의 실력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도를 똑바로 해야 합니다.
"내 자식은, 내 아들은, 내 딸은 기적이 필요합니다! 내일 무조건 고득점을 받게 해 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대학에 잘 가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확률 게임이 아닌, 믿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 비유의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바로 '무대뽀'요, '땡깡'이요, '생때'입니다. 그 과부처럼 생떼를 쓰고 '비두발광(飛頭發光)'을 해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상한 소설을 쓰거나 종교적인 말로 포장하지 마십시다. 여러분, 자녀들이 내일 시험을 칩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기적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논술을 치르다
그래서 제 둘째, 예준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준이는 수능을 망쳤습니다. 1, 2학년 때 내내 놀아서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았으니 서울대는 지원할 수도 없었고, 그 수능 성적으로는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가 연세대 경영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너는 이미 재수 학원에 등록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학교 선생님께는 재수를 각오했으니, 본시험 논술을 체험 삼아 보게 해달라고 말씀드려라. 그러면 원서를 써주시지 않겠느냐." 아이는 그렇게 원서를 받아냈고, 형편없는 수능 성적을 가지고 논술 시험을 치르러 갔습니다.
아이가 불쌍해서 시험장까지 태워다 주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준이가 올해 연대에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음성을 듣고 "너 이번에 붙는다더라" 하고 말해줬다면 제가 얼마나 용한 아버지가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믿음이 없어서 그 말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저는 아현동 목욕탕에서 기다렸는데, 그곳에서도 계속 "합격한다"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필링 보이스(Feeling Voice)', 즉 마음에 떠오르는 음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속으로 '내가 아들 합격을 너무 간절히 바라니까 이런 헛된 생각을 하나 보다'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마친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차에 타자마자 대뜸 "아빠, 논술의 신이 임했어!" 하고 외쳤습니다. 제가 바로 "논술의 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 말로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영감이 떠오르더니 서론, 본론, 결론이 한꺼번에 '다다다' 하고 생각났다고 합니다.
마치 누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듯이 일사천리로 답안지 앞뒤를 꽉 채워 냈다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뜯거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자기만 가장 먼저 답안지를 냈습니다. 시험 감독관도 '얘는 포기했나 보다' 하고 봤다가 답안지가 꽉 차 있으니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이는 예비번호를 받았습니다. 그 수능 성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논술로 따라붙은 것입니다. 그 번호가 118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연세대와 고려대 경영대는 해마다 교대로 정원이 미달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해가, 기록적으로 연세대 경영대가 미달 사태가 난 해였습니다. 몇 번까지 합격했는지 아십니까? 119번까지 합격했습니다.
그렇게 연세대에 들어간 예준이는, 원래 문학에 관심이 많아 '소설 작법'을 수강했습니다. 한번은 수업 중에 '자신이 쓴 글을 처음 읽는 독자가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다고 합니다. 예준이가 "아빠다"라고 대답했더니, 반 아이들 전체가 기절초풍을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소설 작법을 배우는 학생들은 대개 마음에 상처가 있어야 글이 나옵니다. 그런데 쓴 글을 아버지에게 처음 보여준다고 하니, '쟨 고장 난 애가 아니구나' 하고 놀란 것입니다.
어쨌든 예준이는 그렇게 소설을 배워 연대 교지인 '연세춘추'에서 박영준 문학상을 탔습니다. 이런 경력이 있는 동생에게 형이 처음 쓴 소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동생의 첫마디가 "혈육이 아니면 읽어줄 수 없는 글이다"였습니다.
"어떻게 작가가 직접 모든 상황을 설명하느냐. 돌아가는 정황이나 대화를 통해 독자가 상상하며 스토리를 따라가게 해야지, 이게 뭐냐"며 첨삭 지도를 했습니다. 동생이 형의 글을 싹 다 갈아엎다시피 고쳐주었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흥행 작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참 신기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예준이의 경우는 정말 인간의 계산으로는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내일 당장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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