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출애굽기 40장 36~37절, 창세기 5장 21~24절
설교자 : 김은호 오륜교회 설립목사
**그러나, 제가 개인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정한 버전입니다.
하나님 임재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눈에 보이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습니다. 성막 위에 머무는 영광의 구름은 그들의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구름을 성막에만 묶어두지 않으셨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백성들은 진을 거두어 전진해야 했습니다. 광야의 성막은 고정된 빌딩이 아니라 언제든 접고 펼 수 있는 텐트(Tent)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대한 전환점을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한 곳에 안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동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임재는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거친 광야를 주님과 함께 걷는 나그네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예배의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를 교회 마당에만 묶어두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치열한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과 발걸음을 맞추게 하십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은 빨리 가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느냐가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누려야 할 참된 동행은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거룩한 지루함'을 견디며 일상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대단히 신비롭고 특별한 은사주의자들의 전유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동행의 사람 에녹을 보십시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특별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밥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일터에서 땀을 흘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노아 홍수 직전의 극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정욕을 따라 살아가던 어둠 속에서, 에녹은 홀로 흐름을 거슬러 300년 동안 하나님과 발을 맞추었습니다. 동행은 반짝하는 감정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매일 아침 눈을 떠 묵묵히 주님의 손을 잡는 '거룩한 지루함'을 견뎌내는 인내입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를 팽개치는 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숨 막히는 일터와 가정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할 거룩한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묻는 삶입니다.
동행은 함께 걷는 것이며, 함께 걸을 때는 반드시 대화가 깊어져야 합니다. 다윗은 위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올라가리이까"라고 물었고, 승리한 이후에도 "또 다시" 하나님의 입을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뽕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하나님의 '시간(Timing)'을 기다렸습니다. 내 운전대를 주님께 완전히 넘겨드리고 그분의 신호등에 내 발걸음을 맞추는 것이 진짜 묻는 삶입니다.
때로 우리가 묻고 또 물어도 하나님이 철저히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닙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아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꽉 쥔 손의 힘만으로 걷는 아이처럼, 침묵의 계절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의지하게 만드는 가장 깊은 동행의 시간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가짜 물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묵묵히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고난의 환경을 압도하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무겁고 외로운 고행길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님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고난이 없는 안락함이 아니라,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영적 자족'입니다.
공산당 감옥의 차가운 독방에서 홀로 춤을 추며 찬송했던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처럼, 동행의 비밀을 아는 자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강력한 힘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온전히 누리고 즐거워하는(Enjoy) 기쁨에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네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끝없는 '분주함'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영혼을 말라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해결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가장 소중한 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969년이나 살게 하신 것은, 단 하루라도 심판을 늦추어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지독한 '오래 참으심'과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던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우리 인생의 거친 광야로 내려오셔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막 위로 떠오르는 영광의 구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전진하시는 삶의 현장으로 담대히 발걸음을 떼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출근길 차 안에서, 모니터 앞에서 심호흡하며 올리는 한 줄의 묵상으로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이번 한 주간,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일상의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묻고, 그 어떤 슬픔 속에서도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미소 지으십시오. 그리하여 에녹처럼, 다윗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동행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예배는 얼굴을 향합니다 (0) | 2026.07.23 |
|---|---|
| 복음은 선포되는데, 왜 교회는 신뢰를 잃는가 (1) | 2026.07.22 |
|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0) | 2026.07.22 |
| 칼을 든 열심, 십자가를 진 열심 - 하나님의 열심과 셀롯 시몬 (0) | 2026.07.18 |
|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 (0) | 2026.07.17 |
| 절벽 아래를 향하는 시선: 두려운 현실을 딛고 사명의 자리로 착지하는 법 (0) | 2026.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