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8. Day12.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 (시편 119:71) 박한나 목사
박한나 목사
현) 오픈도어선교회 강사(북한)
- 북한선교전문대학원 졸업
- 한국오순절하나님의성회 목사 안수
(故 김익두 목사 손자며느리 박한나 목사)
약 4만명의 기독교인들이 갇혀 있는 북한,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보호하심과 기적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계시다. 북한의 믿음의 형제들의 고통 역시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지체의 고통이다.
(* 반갑습니다...곡조를 따라 자작 찬양 가사를 부르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쓰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그 기적으로 이 영광의 자리에 저를 세우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부족한 종을 초청해주셔서 감사하다.
나는 언제나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감옥에서도 이 연단 후에는 예비하신 큰 축복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 그리고 남한에 가면 성도들 앞에서 부를 찬양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다. 입안에서 교회와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목사님, 목사님'을 중얼거리며 찬양시를 지었다. 찬양시가 마치 파노라마 흐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였고 5절, 6절까지도 가사를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 그 기도가 이루어져 감사하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들께 늘 감사하기 바란다. 그리고 인권의 자유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기 바란다. 대한민국 정부는 길거리에서 찬양한다고 누가 잡아가지도 않고, 예배드린다고 잡아가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이 자유가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 이런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나는 북한에 태어난 것을 많이 원망했으나, 이제는 나를 들어 쓰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께는 처음부터 나를 향한 계획이 있었음을 믿는다. 감사하며 살았더니 이러한 복을 주셨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복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1998년 8월14일에 첫 탈북을 했다. 남편이 죽었고 26살되었던 딸이 굶어 죽은 다음이다.
[전쟁 과부들에게 몰래 복음을 전하던 어머니]
나는 3대째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5~6살 때 밤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저희 어머니가 무엇인가 손에다 쥐고 목에 흰 사슬을 걸고, 눈물 흘리면서 자꾸 중얼거리는 것을 봤다. 어린 마음에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우는지, 왜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탈북하고 교회를 갔을 때 자매님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단 것을 보고 '엄마가 목에 건 것이 저것이었구나' 알고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다.) 그 땅(북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와 선교사는 양의 탈을 쓴 승냥이들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그리고 예수 믿었다가는 온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정치범수용소에 깊은 밤 1시, 2시에 소리 없이 차로 실어 잡아가고, 그들은 간첩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을 냈다. 나는 그렇게 알았기에, 우리 어머니가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 "절대로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 온 식구, 친척들까지 죽으니 일생 동안 돌아가실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도 온 식구가 다 죽게 된다고 입단속을 해서 남편을 포함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며 살았다.
어머니는 고아와 과부들을 잘 돌봐줬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과부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고, 어머니가 들어주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그들에게 말씀한 것은,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같이 말했다가 돌아서면 남한테 전해진다. 그렇게 울고 싶고 안타까울 때는 하늘에다 대고 하소연하고 울어라. 하늘은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마음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어린 마음에 학교를 가고 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도 거리가 멀면 안 들리는데 저 하늘에 누가 있길래 땅에서 말하면 우리말을 다 들을까. 거기서도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채소도 있을까' 하며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탈북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야 이 세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다.
[김익두 목사, 순교자의 손자...가정 복음화 후 순교하다]
남편도 3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손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키웠다. 김익두 목사님은 1950년 10월 14일 신천서부교회에서 새벽 기도시간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쫓겨가는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죽임당하셨다. 임종 순간에 까지 '용서하라 용서하라'를 신음처럼 남기셨다고 한다. 남편은 7살 나이에 할아버지가 순교 당하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도 개성에서 순교하셨기에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목사라 하면 나도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해 친한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할아버지가 순교자라는 말을 못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부부 간에도 자식 간에도 당의 사상에 틀린 것, 어긋난 것은 다 신고하라, 신고하면 용서해준다고 하니 가족 간에도 불신이 있고 눈치 보고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자라왔다. 남편도 가족에게 몇십 년 숨기고 있다가, 1996년 남편이 탈북 후 중국 조선족교회에서 이야기를 듣는 중에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생각나 "우리 할아버지도 목사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 할아버지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나요?"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김익두입니다." 그랬더니 목사님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그 후에 교회 장로님들이 이야기해주셔서 나도 그 일을 알게 됐다.
우리 가정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다. 남편은 중국에 가서 미국에서 오신 한인 김동식 목사님(2000년 1월 북한으로 납치, 2001년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동식 목사님이 남편에게 3천 원을 주셨느데, 같은 교회에 있던 동포 집사님이 우리 남편 주머니의 그 돈이 욕심 나서 김 목사님이 3일 동안 출장을 가신 동안 남편을 공안에 신고했다. 공안이 와서 우리 남편을 잡아갔고, 그 집사님은 고발한 값으로 3천 원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보위부에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남편은 중국 감옥에 있을 때 핸드폰을 빌려 중국 연변에 있던 우리 이모에게 전화 걸어 내가 어떻게 돼서, 누구 때문에 잡혀가니 만일 후에 우리 가족을 만나면 꼭 전해달라고 말하고 끌려갔다. 북으로 송환 당한 남편은 중국에 있을 때 한인 목사님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 안기부 간첩' 죄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의 입으로도 외울 수도 없는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감옥) 안에서는 일회용 종이컵만한 다 썩은 옥수수 밥 덩이를 주는데 남편은 자기 밥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당신이 먼저 죽겠다. 좀 먹으라"고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에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봤고, 좋은 구경도 많이 했고, 나는 죽으면 이제 천국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 모르고 육신을 위해 고통 받고 살다가 죽어도 지옥불에 가겠느냐.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그러면 가족도 구원 받는다"고 복음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은 낮에 죽도록 고문 당하고 다 퍼져서 감옥에 쳐 넣으면 밤에는 질질 끌고 다니면서,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무서운 보위부 감옥에 저희 남편을 통해 지하교회를 세워주시고 인도해주셨다.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난 지하교회 성도들이 저희 집에 찾아왔다. 감시하니까 낮에는 못 오고 밤에 와서 창문을 두드리고, 감옥에서 남편이 했던 일들을 말하면서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을 정말 몰랐다"고, "그 안에서 고문당하고 핍박받고 멸시받고, 그분이 당한 것을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가족들이 두고두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냐"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저희 남편이 만일 살아나오면 그(감옥) 안에서의 고통을 본인 입을 통해서 들으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정치범이라고 하면 절대 면회할 수 없지만 친구들이, 가족들이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면회 좀 시켜달라"고 간부에게 사정해서 4명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었다. 그때는 자고 일어나면 '누구네 아버지가, 누구네 어머니가, 누구네 딸이, 아들이 어젯밤에 죽었대'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그것이 동네 뉴스였다. 다 굶어 죽은 것이다. 간부가 면회 오라고 했는데, 우리 집도 다 도둑 맞아 가지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만 옷을 입히고, 옥수수 가루로 떡 몇 조각 만들어서 보냈다. 너무 약소해서 나는 차마 갈 수가 없어서 아이들만 보냈다. 가족이 모이면 작은 방에서 작은 상에 옥수수도 나눠 먹는 것이니, 함께 나눠 먹으라고 했다.
우리 남편은 면회간 아들의 손을 밑으로 잡아당겨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도청 장치가 있어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확실히 살아계신다.' '눈물 나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너희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면 꼭 이 땅을 떠나서 중국에 가서 ○○교회 김○○ 장로님을 찾아가라. 너희가 찾아가면 하나님께서 다 앞길을 열어주실 거다.'
이것을 손바닥에 썼는데 면회 마치고 집에 오면서 아들이 흥분되어 집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엄마! 아버님이 예수님을 믿으래요. 엄마,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확실히 계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착하고 정직한 분인데 우리 아버지가 전한 예수님, 우리도 믿어봅시다."
그날부터 우리는 기도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몰랐지만, 마음의 소원과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고, 놀랍게도 그날그날 응답됐다.
'세상에 예수님이 없고, 미신이라고 배워왔는데 세상에 속아 살았구나!' 그러면서 나는 열심히 기도했다.
[꽃다운 나이에 굶어 죽은 딸... 그리고 탈북]
그러던 중, 딸이 26살의 나이로 1997년 5월 6일 굶어서 죽었다. 여러분들은 '일하기 싫어서 죽었는가?' 라고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고 (북한은) 직장에 나가 일을 해도 배급을 안 주고 월급을 안 주니 사람들이 매일 밤 죽어나갔다. 세 살 짜리 아기들도 "어디 가서 주워먹으라, 빌어먹으라"고 엄마가 다 밖에다 내놓기 시작했고, 시장에 갖다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다 흩어지고 굶어 죽고 남은 사람이 자기 혼자니까 빵 몇 개하고, 술 한 병 하고 자기 집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집 물건이 다 도둑 맞고 김칫독과 이불만 남았는데, 우리 딸이 그걸 뜯어서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으로 옥수수를 사보려고 했다. 나는 그때 수술 후유증으로 앉아 있고 걷지 못했다. 그런데 딸이 나쁜 사람을 만나서 다 사기 당했다. 집에 들어오기 미안해서 밖에서 헤매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 왔는데, 2주 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딸이 죽기 며칠 전 말했다. "엄마, 남조선이 여기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에요. 그 땅에는 자유가 있어요. 나는 정말 남조선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앓고 있고 어린 동생이 있어 갈 수 있어도 못 갔어요. 엄마, 아무래도 나는 희망이 없고 살 수 없는 것을 알아요. 정말 이 땅에 소망이 없으니 어리석게 나처럼 있으면 죽게 될 거니, 내가 죽으면 꼭 중국에 가고 갈 수 있으면 남조선에 가세요. 잘 살고 배부를 때 나를 생각해주세요." 딸은 그런 말을 남기고 며칠 후에 죽었다.
1997년 5월 딸이 굶어 죽고, 그해 10월 남편이 보위부 감옥에서 순교 당한 며칠 후, 중국에 여행 갔다 온 자매가 저에게 조그만 종이쪽지를 주었다. 이걸 자꾸 읽으니 기도가 된다고, 내게 가져오면 알 것 같다며 외우라고 준 것은 바로 '주기도문'이었다. 작은 종이의 앞뒤에 깨알같이 썼는데, 콩알처럼 만들어 옷에 숨겨 들어올 때 몸수색에서 발각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때까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했는데, 그 때부터는 주기도문을 외워서 기도하게 되었다. 그것을 외우며 '꼭 남편이 못한 일을 내가 하리라'는 결심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탈북을 했다.
1998년 8월 14일 밤, 강물이 깊던 때였지만 떠나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동네 사람과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가려면, 사람이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 밑으로 가야 했다. 정찰하는 이들이 측량을 위해 다리 기둥에 박아놓은 쇠에 올라 건너가는데, 발을 제대로 디딜 곳도 없어서 쉬지 않고 계속 이 기도만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남편이 하지 못한 일을 꼭 하겠습니다.'
두만강을 건넌 다음 날, 즉 주일인 8월 15일 아침에 남편이 알려준 교회를 찾아갔다. 김 장로님을 찾아서 남편이 순교했다고 하니 교회에서는 놀라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젊은 여인들이 한복을 예쁘게 입고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띠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 얼굴을 보니까 다 결혼 한 여인들 같은데 누굴 또 사랑한다고, 내가 얼굴이 좀 뜨거워졌다. '저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교회는 이상한 곳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오는 사람마다 친절하고 반갑게 대해주고, 기뻐서 웃는 것이 천사처럼 아름답고 놀라웠다. 먼 훗날에 성경을 읽으며 '아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었구나!' 알게 됐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지역에서 누가 소개해주어 일을 했다. 벌판의 작은 농막에서 힘들게 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마스크를 껴야 했다. 마스크를 열고 밥을 한 숟갈 먹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이때 소형라디오를 하나 구해 밤마다 제주 극동방송을 듣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다. 한국이 새벽 1시면 그곳은 새벽 2시인데 제주 극동방송이 나왔다.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성경을 다 쓰기도 했다. 몇 달 그렇게 생활했다.
[패혈증을 치유받은 조선족 청년]
그때 숙소에 같이 있던 중국 조선족 청년이 벼를 베다가 실수로 자기 손바닥을 낫으로 베었다. 후딱 뒤집히니까 살이 두꺼웠다. 이 청년은 주인이 병원을 안 보내주니 자기 살을 덮어놓고, 거기다가 담배와 된장을 섞어 이겨서 감고 일을 했다. 얼마나 아파하는지, 하룻밤 지나니 붓기 시작하고 이틀째, 삼 일째 되는 날은 손이 두 배, 세 배 불어나고 피부가 너무 불어 저절로 터져 물이 나오고 팔까지 새카맣게 검게 변했다. 나는 그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 기도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청년이 동네 작은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패혈증이 와서 팔을 잘라도 살지 못살지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그 팔을 붙잡고 울고,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엎드리고 기도했다. 새벽녘에 깜빡 잠들다 눈을 탁 뜨는 순간에 이 청년이 "내가 천사를 봤다"고 했다. 천사가 어떻게 생겼냐, 뭐라고 말하더냐고 물으니 청년이 "저 문이 열리더니 구름 위에 받들려서 천사가 하얀 옷을 입고, 얼마나 환한 옷인지 세상에서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못 봤고, 나는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천사가 '울지 말아라. 내가 너의 병을 고쳐주리라'고 말하고 그대로 없어졌다고 했다. 나도 놀라서 청년 팔을 보고, 이 청년도 놀라서 팔을 내려다보는데, 보고는 우리 둘 다 깜짝 놀랐다. 몇 배로 불어나고 간장 빛으로 새카맣던 피부가 정상으로 다 회복되고, 진물 나고 터진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팔목과 손만 연한 보라색으로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 순간에 나도 놀랐지만, 그 청년이 더 놀랐다. 자기 동네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전도해도 청년은 '예수 믿으면 노래방도 못 가고 담배, 술도 끊어야 하는데, 혼자 사는 내가 담배, 술을 끊을 수 없다'며 교회에 안 갔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는 장애인 아니면 가난한 사람만 다니는데, 하나님 계시면 왜 잘살지 못하고 병도 고쳐주지 못하냐, 너희가 속아서 목사 살려주느라 헌금하고 온다"고 놀리곤 했었다. 그랬는데 그날 밤 청년이 막 울면서 무릎 꿇고 앉아 몇 시간 회개를 했다. "내가 팔을 잘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를 살리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 있는 것 알았다"고, "세상 좋은 것 다 버리고 이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그렇게 울었다.
내가 중국의 목사님 댁에서 '세상에서 방황할 때'(전용대: 주여 이 죄인을), 그 찬송 하나를 배웠다. 내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찬송가를 그 청년이 여느 때 들었으니 자기에게도 가르쳐달라고 해서 알려주었다. 청년이 음치인데 자기를 위한 노래인 것 같다며 계속 그 노래를 부르고, 우울하던 사람이 그날부터 바뀌더니 항상 웃고 기뻐하고 살았다. 예배를 드리면 같이 예배를 드렸다. 주인은 영원히 돈도 안 주고 북한 사람이니까 부려먹으려고 하고, 그것이 너무 강도가 세서 있을 수 없어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도망칠 기회와 지혜를 주셨다. 시내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으니 도망치기 매우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나오게 됐다.
[찬송가 495장...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농촌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는, 밤에 제주 극동방송을 들었다. 새벽 2시 반쯤 되면 방송 소리가 멀어져서 힘으로라도 막 잡아당기고 싶은 심정으로 방송을 들었다. 그 가까운데 교회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공안이 북한 사람을 잡으러 오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참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에 안타깝고, 교회에 갈 수 없으니 교회를 바라보기만 하며 눈물만 흘렸다. '나도 교회 가고 싶다'고, '나도 말씀 듣고 싶고, 마음대로 찬양도 배우고 마음대로 부르고 싶다'고, 이렇게 항상 눈물 흘리고 살았는데 주일날이면 더 눈물이 났다.
어느 날 아침에 제주 극동방송을 들을 시간인, 주일날 새벽에 눈을 떴다. 시골의 1평짜리 방 천장 위에 환한 빛이 있었다. 불도 없는데 깜짝 놀라서 저게 무슨 빛일까 살펴 보니까 495라고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자동차 번호인가 하다가 혹시 찬송이 아닐까 해서, 불을 켜고 찬송가를 찾아보았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것을 읽으면서 정말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만 모시고 살면 내 마음도 천국이 되는구나' 했다. 그때부터 말씀을 외우고, 혼자서 예배드려도 기쁘게 드릴 수 있게 됐다.
[중국에서 경험한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
나는 성경 중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체험을 통해 알게 하셨다.
중국의 한 조선족 집에서 일할 때, 그 집 할머니가 불교를 믿었는데 나를 예수 믿는다고 자꾸 핍박했다. 반찬과 맛있는 것은 다 냉장고에 넣고 자기 집에서 일하는 사람인 내게는 김치조차도 주지 않았다.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고, 정말 멸시, 천대받고 있었다. 어느 날 제삿날이 되니까 수정과를 20리터 통에 가득 만들고, 다른 음식도 많이 만들었다. 다음날이 구정(설날)이었다. 똑같은 또 다른 20리터 통에는 변소(화장실) 냄새를 빼기 위해 쌀뜨물을 담아놓고 있었는데, 그 뜨물 통의 물을 가지고 가서 빨리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오라고 서둘렀다. 그래서 20리터 통을 무겁게 들고 화장실로 가서 통을 열고 한창 쏟다가 통이 가벼워져 보니까 내가 실수해서 쌀뜨물 통이 아니라 수정과 통을 다 쏟아 버린 것이었다. 쌀뜨물 통은 저 구석에 있고... 수정과를 갑자기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평소에 나를 주눅들게 하던 그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 얼굴이 떠오르니 소름이 끼쳤다.
그때 내가 믿지 않던 포도주 기적이 생각났다.
'예수님, 내가 이 귀한 음식을 다 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나요?' '그 할머니가 너무 무서워요'
'가나의 혼인잔치 포도주 기적, 그것이 정말 있는 일이라면 내게 그런 기적을 주세요'
나도 모르게 그런 기도가 나왔다. 그 때 음성으로 그 통에다 남아 있던 수정과를 두 통으로 나누어 놓으라 하셨다. 막 할머니는 들어오고, 나는 놀라서 빨리 쌀뜨물은 땅에다 쏟고 수정과는 어쨌든 양 쪽 통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 몰라서 서 있는데, 이제는 거기에 물을 채우라는 말씀을 들었다. 나도 놀라서 세탁기 수도꼭지를 틀고 막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을 채워서 갖다 놓았다.
밤 12시가 돼서 할머니의 큰아들이 왔는데, 준비가 다 돼서 사장님들이 오셨으니 나더러 수정과를 갖다 주라고, 맛을 보여주라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심장이 뛰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것을 갖다 주고, 약과도 갖다 줬는데 사람들이 먹어보고 마시고, 그 시간이 몇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유독 천천히 마시는 것 같았는데 다 마시고도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아 이게 수정과가 아니라 맹물인데 이상해서 저러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맛있어요, 맛있어요. 작년 것보다 더 잘됐네요" 라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서 자기도 한 잔 갖다 주고 내게도 한잔 마셔보라고 했다. 그래서 갖다가 마셔보니까 너무나 내가 긴장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맛있는 것이었다. 맹물만 추가해 넣었는데도 색깔조차도 수정과와 똑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성경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고 보탠 것도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는 일을 해서 한 달 500원(중국 위안화)씩 월급을 타면 그 돈으로 중국어 성경책과 찬송책을 사서 농촌의 중국 사람들한테 주며 내가 만난 예수님을, 내 체험과 함께 전했다. 너희들도 믿어보고 체험해 보라며, 그렇게 전도를 했다. 참으로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체포...북송...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신 하나님]
여러 번 위험한 상황을 은혜로 넘기다가 한 번은 결국 붙잡히게 되었고, 그때는 4개 감옥만 돌았다.
풀려난 후에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또 붙잡혀서 북송을 위해 도문변방대로 가게 됐을 때는 주일날은 가까워 오는데,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도했다.
'하나님, 주일날이 가까워오는데 예배를 드릴 데가 없습니다. 혼자서라도 예배 드릴 때가 행복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혼자서 담요를 쓰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는데, 아침에 기적이 일어났다. 주일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내는데, 군인들이 복도에 서더니 조선말을 쓰는 자매가 나와서 이름 부르는 사람들은 다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내 이름은 안 부르고 문을 채웠다. 원래 주일에는 북송을 안 하는데 그 날은 왜 나만 빼고 사람들을 다 나가게 하는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 저쪽에 자매 3명이 앉아 있었다. 방이 커서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 보니 그동안 내가 몰래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 주님! 예배 드리라고 이 시간을 허락하셨군요!' 했다. 감시하니까 제대로 예배할 수는 없고, 시편 23편을 전한 후 '어디 가서 죽는다 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자. 천국 가자'고 서로 약속했다.
그다음 날 북송되는데, 다른 데 갔었던 사람들도 같이 가게 되었다. 어제는 어디 갔냐고 물으니까 "다른 방에다 다 몇 명씩 넣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로 예배 드릴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했다
북송되어 보위부에 가면 여자들은 온갖 인권유린을 겪게 된다. 여자 남자를 구별하여 따로 4~5명씩 작은 방에 가둬 넣고 단발머리 군인 처녀들이 와서 검사하는데 옷을 홀딱 벗기고, 머리, 입 벌리고, 귓구멍도 보고, 겨드랑이, 발바닥까지 다 보는 것이었다. 돈을 빼앗기 위해 검사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에는 긴 의자가 있는데, 한 사람씩 눕히고 여자들이 고무장갑 끼고 다 자궁 속까지 손으로 헤집어 보는 것이었다.봅니다. 돈을 감췄나 해서. 들어갈 때부터 계속 기도했는데 나와보니까 우리 조만 그짓을 안 하고 다른 조는 다 뺏겼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살 길이 없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틀 동안 조사받고 끝났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에는, 다른 사람을 예심 하던 보위부 요원이 나를 나오라고 하더니 "니가 중국에서 뭐했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 돈벌이한 것밖에 없다." "니 젊은 사람에게 뭘 전해주었나, 예수인지 뭔지 니가 봤나." 누군가가 밀고를 한 것이었다. 3일간 고문을 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견뎌내리라, 정신을 잃고 혹시 주님을 부인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계속 악을 쓰는데 도저히 견딜 힘은 없고, 지쳐서 끌려나가서 기도했다. '주님 내가 힘이 없는데 나를 도와주세요. 내가 정신을 잃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이때가 고난 주간 즈음이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진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필름처럼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사역하고 십자가 달려 죽으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다 흘러가면서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난 그것만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당한 고통은 주님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봤다. 내게 보여주신 그 필름이 끝나는 순간, 보위부 요원이 내 무릎을 땅 차서 그때 정신을 차렸다. '니가 나가서 며칠 단련을 좀 받더니 정신이 돌았다'고, '그렇게 때려도 아픈 것도 모르고 계속 앞에 있는 벽만 보는 것 같이 있었다'고 했다. 그날 내 방에 끌려 돌아온 후, 잠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우렁차고 쩌렁쩌렁 울리는,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오늘 물 위를 걸었느니라.' 이런 음성이 들려서 깜짝 놀랐다. '아, 내가 고문당하는 것도 주님 다 보고 계셨구나. 나는 주님 손에 꼭 붙잡힌 몸이구나' 했다. 몇 십 명 같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느끼고 못 보았다. 나는 앞에 있는 벽이 그 소리에 막 진동하는 걸 눈으로 봤는데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그 어떤 위험에 처해도 피할 길을 주고 위로를 주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보위부의 위협과는 달리 공개 처형은 받지 않고 다른 감옥으로 차례대로 옮겨지다가 아홉 번째 감옥에 갇혔을 때는 영양실조가 심해 귀도 먹고 눈도 멀고 항문도 삐져 나와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설 수도 없었다. 감옥에는 자동차가 없으니까 감방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내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질질질질 끌고 다녔다. (남한에서 이렇게 수많은 자동차들을 보며 그 때 이 차들 중에 한 두대라도 거기에 있었으면...하는 생각도 했다.) 두 발짝까지는 내 발로 갈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양쪽 엉덩이 아래서부터 유리관에 물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허리가 탁 꺾어져 내 몸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이런 증상이었다. 나는 물도 삼킬 수 없고 너무 아팠다. 내가 물도 침도 삼킬 수 없다고 간수가 이야기하자 의사가 펠라그라(니코틴산 결핍증후군,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 유행)라고 영양실조로 온 것이라고 했다. 의사가 이제 3일도 살기 어려우니 한쪽 구석에 가만히 놔두라고 했다. 이렇게 되니까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내 손바닥에 글로 써 알려주었다. 의사도 나를 못 살린다고 했다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주님 오늘 밤에라도 살아있을 때 오시라고 늘 속으로 기도하며 부르짖고 있었는데, 의사가 3일도 못산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내가 남편이 못다한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죽을 권리 없습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꼭 주님 일 하겠습니다'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또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기적을 나에게도 달라고, 저 간수들을 까마귀로 써달라고 이런 기도를 속으로 하고 있었는데 한 이틀 지나니까 나는 담배 한 대도 간수들한테 사준 것도 없는데 나한테 정말 잘하는 것이었다. 날 정말 불쌍하게 생각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면회 온 음식을 갈라서 나를 주고 먹으라고 했다. 주님께서 내 작은 신음도 다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래서 '내가 죽지 않겠구나, 주님께서 도와주시는데 내가 죽지 않겠구나' 이런 신심이 생겼다. 그 밥을 갖다 주는 순간에 나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목구멍이 아프지만 꾹 참고 억지로라도 삼켰다.
[3년형 감옥 생활과 만기 출소... 함께 하신 하나님]
감옥에서 나는 3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다 죽게 되어서 감옥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꽃제비들 수용소에 가서 꽃제비들하고 같이 살게 되었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보이고 귀도 열리고 항문도 제 자리로 들어가고 발목에 힘이 오는 것이 느껴져서 벌벌 기어서 벽 쪽으로 가서 벽을 붙들고 서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며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는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이 고난을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기고 나가면 주님께서 나에게 예비하신 큰 축복을 꼭 주시리라,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었다. 마침내 내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됐을 때 간수들에게 내가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이 갔고, 간수들이 또 저를 데리러 왔다. 3년형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죽어도 감옥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0번째 감옥 높은 산 위에 있는 곳이었다 감옥의 철문 앞에서 철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커먼 철대문 위에 "도주하지 말라.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고 쓰여 있었다. 그 앞에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내가 오늘 이 문턱을 살아서 넘어가지만, 3년 후에도 다시 살아서 넘어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주님께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고 음성을 주셨다. 주님이 나를 돕겠다고, 나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정말 내가 꼭 살 것이다 생각하고 담대하게 그 문턱을 넘어서 들어갔는데, 그곳은 인간 생지옥이고 참혹한 곳이었다. 쓰러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방에 이쪽에서도 저쪽 구석에도 죽은 사람 있고 내내 그랬다. 감방에서도 많이 죽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지 못해 쓰러져가고 심지어 남자 둘이 물 한 바가지를 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먹을 물도 없는 곳이었다. 간수들의 생활 오수를 먹으며 살아갔다.
'주님, 내가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이 사람들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가 무엇을 해야됩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나누고 희생하라' 딱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희생은 할 수도 있겠지만 나눌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면회 올 사람도 없고 도대체 무엇을 나누라고 하실까, 나한테 나눌 것이 있으니까 나누라고 하셨겠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일회용 종이컵만한 옥수수 덩어리를 주는데 새카맣게 썩어 있었다. 그걸 보고 나한테 나눌 것이 이것이구나 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3년 동안 매일 세끼 요만한 종이컵 밥 덩어리, 반찬도 하나도 없는 그것을 매일 3분의 1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나누고, 내가 많이 먹는 날이면 절반 정도 먹고 나눠주었다. 그런데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조그만 밥 덩이가 놓이면 그 순간에 1, 2초 동안이나마 반짝 오늘은 더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기쁨을 잠깐 보이는 것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내 마음에 나눌 것을 주시고 그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했다. 30배, 60배, 100배 기쁨이 차고 감사가 넘쳤다. 그 기쁨과 감사가 내 마음에 빈자리를 채웠기에 3년간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마침내 감옥을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전도하라고 해서 이 감옥에서 어떻게 전도하냐고 했다. 그런데 전도를 안 하니 불을 안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서 막 땅에 뒹굴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순종하겠다고 했을 때 그 뜨거움이 그쳤다.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는 그 위험한 그 곳에서 누구한테 전도해야 할지 모를 때, 보다 보면 며칠에 한 번씩은 주님께서 저 사람한테 가서 전도하라고 사람을 딱 찍어주는 것이었다.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 얻으리라'는 말씀을 전도했을 때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영접했다. 그곳은 도주를 우려하여 창문이 없고 환기도 열악한 곳이었다. 런데 전도의 결과로 성도가 생겼을 때, '주님 성도만 주고 예배 드릴 곳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예배 드리면 되었지만 이제는 여럿이 함께 예배 드릴 곳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주님이 '저기 변소가 있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현대식 화장실이 아니라, 옛날 시골 화장실인데 비만 오면 물이 차서 똥물이 넘쳐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거룩하신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 더러운 데서 해도 될까...하는 우려가 생겼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그 감옥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바로 변소였다. 악취가 나니까 누구도 거기 신경 안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곳마저도 위험해서 한 사람은 일보는 것처럼 하고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처럼 한 상황에서 예배를 드렸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오면 순서를 양보하는 척 했더니, 냄새가 심한 곳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기에 모두 좋아하며 지나가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용조용히 눈을 피하여 입속으로 드리는 예배였다.
그리고 아침에 일 나갈 때는 서로 마주 지나가면서 눈을 보지도 않고, 조용히 '할렐루야' 하면 밑으로 손잡으며 '아멘' 하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 모습조차도 들키면 죽어야 했으니까...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
그래도 감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찬양과 기도를 마음껏 못하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죄인은 강한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압박으로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에 철저히 통제된 상황에 둔다. 그런데, 남한에 내려와 교도소 선교를 나가 보니, 죄인들인데 머리도 깎지 않고,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고, 심지어 예배까지 드리면서 마음대로 글을 쓰고, 또 마음대로 악기를 다루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감옥에서 하나님을 몰래 찬양하다가 들켜서 두드려 맞고, 벌도 받았고, 정말 그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과연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 오고 눈보라가 치면 대문 지키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소나기 오는 날에는 비를 피할 데도 없고 비를 맞으며 서서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내가 그랬다. '주님, 날아가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깃들 곳도 있고 개들도 비 오면 비를 맞고 있지 않은데 나만 혼자 벌판에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냐'고, '나는 춥고 너무 힘들다'고 하니까 주님이 '그럴 때는 찬송을 하여라'고 했다. 감옥인데 찬송하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는데, 비가 치고 눈보라 치는 소리에는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소리 내서 찬송할 수 있고, 찬송가 456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도 불렀다. 밤 10시까지 근무를 서는데, 그때는 큰 마당 가운데 가서 율동도 했다. 영하 30도 넘는 곳, 옷도 제대로 못 입었는데도 춥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지 못할 시험은 주지 않는다. 죽을까 하면 살려 주시곤 했다.어느 날은 복음성가를 부를 때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져서 매간수에게 뺨을 맞았다. 때로는 매도 맞고 벌을 서고, 그런 과정이 많았다. 그러나 공개 처형의 위협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나와 함께하시고 항상 위로하셨기에 담대히 견딜 수 있었다. 그랬더니 어떤 때는 그 감옥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나를 모범수라고 칭찬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때려도 가만히 참았을 뿐이었는데... 또 나를 유독 미워하는 간수가 있었는데 나를 괴롭히다가 아프게 되었고 그가 병원과 근무지를 오가는 동안에, 나는 3년형을 다 마치고 출소했다. 그 많은 시체더미가 나가는 곳으로부터 주님께서 나를 살리신 것이다.
[출소 후, 홍해 바다의 기적으로 중국, 태국, 남한으로 오다]
출소 후 중국으로, 남한으로 가고자 소망했다. 강을 건널 때는 홍해 바다의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고, 고센 땅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깊은 산속의 농촌으로 인도해 주셨다. 주님께서 한 열흘쯤 됐을 때 그 집의 딸부터 전도하라고 하셔서 말씀을 전했더니 그 딸이 예수님을 알게 됐다. 그 딸이 혼자만 복음을 알 수 없었기에 공산당인 아버지한테 전도를 했는데, 아버지가 내게 "아주머니가 중국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면서 "하나님을 봤소? 하나님이라는 게 있는 거요?" 했다. 그리고 "하나님 소리 해서 우리 가족 다 몰살당하는 꼴 보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많이 했다.그런데 그 자매가 시내에 갔다 오더니 아버지에게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정말 메추리알 만한 것이 밑에 있었다. 그랬을 때 내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이런 일 있다. 꼭 하나님이 고쳐주신다. 낙심하지 말라"고 했다. 북한은 한집안 식구도 한꺼번에 전도할 수 없다. 한 사람씩 차츰차츰 전도하고 누가 지하 성도인지 생각도 못 한다. 두 주일 조금 더 지났는데 그 딸이 밤에 자다 나를 깨우면서 만져보라고 없다고, 잘못 만졌지 반대쪽이 아니냐고 했는데 양쪽 다 보라고 했는데 살펴보니 정말 흔적도 없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고쳐주셨다. 그것도 완전하게.
그것이 증거가 돼서 그 농촌에 친척 집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네 집 딸 유방암, 이거 보라고 없어졌다고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다 고쳐주셨지. 아버지는 몰랐지" 이 자매가 그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나 보면 그렇게 미안해하고, 좋은 먹을 것도 주었다.
어느 날은 3분 거리의 가까운 산에서 새벽마다 예배 드리고,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산속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씩 흩어지는데, 거기 앞에 있는 할머니가 그 집에 온 손님 누구냐고, 왜 새벽마다 산으로 가냐고 조심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 기도했더니 염소 한 마리를 이 집에 예비해주셔서, 염소를 돌보는 것처럼 해서 염소를 끌고 다니면서 마음대로 새벽예배를 다닐 수 있었다. 10월 11일, 새벽에 예배를 끝마치고 일어서서 보니 큰 무지개가 건너편 산에 걸렸는데 신기한 것은 무지개에 색깔이 없었다. 세상에 흰 무지개는 할머니들도 모른다고 하고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해 했다. 내가 홍해 바다 기적을 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주신다는 약속이고 하나님 능력이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그 흰무지개가 차츰차츰 없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그 사선을 넘고, 브로커와 만나 60~70리 길을 걸어 네 번째 만에 브로커와 연결됐다.
마침내 두만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합당한 때에, 12월24일 김장철에 건너게 되었다. 내가 브로커 집에 숨어 있는데 군인들이 '물건 받았어?'하는 것이었다. 돈을 받고 국경을 넘게 해주는 군인들이었다.
15미터 떨어져서 따라 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찾아주시고 아들이 돈을 보내줬을 때 나는 그 돈을 날 도와준 마지막 군인한테 주려고 안 쓰고 남겨뒀었다. 북한 돈으로 바꿔가지고 밤에 손에다 돈을 쥐여주면서 '이 땅에서, 피 같은 돈을 누가 줄 수 있겠느냐, 내가 예수 믿는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서 이 돈을 주셨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너한테 주는 것이니 꼭 이것으로 조금씩 사 먹고 예수님한테 기도하고 살라'고 말해주었다.
물에 들어서려 하니 비가 오다가 눈으로 변해서 때아닌 눈보라가 치게 되어 시야를 가려서 도움이 되었지만, 몇 발자욱 걷다가 깊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무릎 높이의 물가에 서있게 되어 있었다. 그야 말로 기도해왔던 대로, 건널 수 없는 깊은 바다 같은 곳에서 홍해 바다의 기적을 내게 체험하게 해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물가에 쳐진 전기 철조망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작은 틈을 발견해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도 집도 전혀 없는 벌판이었지만 나는 그 젖은 땅 위에 엎드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기도 후에 지나가던 차를 만나서 이동을 했는데, 검문 검색이 심해서 앞서 가던 차가 검문을 당하면 뒤에 있던 우리 차에 알려 주고 그러면 그 검문소를 우회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는 등, 현대 문명의 이기인 휴대폰의 잇점을 활용해서 검문을 피해 무사히 중국 북경을 넘었고 태국을 거쳐 하나님 은혜로 대한민국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항상 감사함으로 기쁘게 살고 있다.
북한땅에도 자유의 날이, 신앙의 자유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항상 기도하고 있다.
[기도 인도 by 김은호 목사님]
살아있는 간증이고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었다. 그 고난의 상황에서도 나누고,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삶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
(찬양) 사망의 그늘에 앉아....
기도제목 1. 동토의 땅 북한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지하교회와 수용소의 믿음의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 아픔, 고통, 가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나가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곳에 해방의 기쁨을 주시기를 기도하자.
기도제목 2. 하나님은 그 가난 속에서도 나누기를 원하셨고 고통 속에서도 전하기를 원하신 것을 간증에서 보았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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