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8. Day13. 7전8기 무릎 경영 (시편 73:28) 최복이 대표
최복이 대표
현) 본월드 대표이사
현) 온누리교회 권사
- 연세대 행정대학원 졸업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처럼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원하며,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린다.
오늘 나를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왜 부르셨을지 생각해보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고,
둘째는, 복(福)은 하나님과의 '신뢰도 및 친밀도'가 매우 중요한데 그 하나의 예(例)로써 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기 위함이다.
간증을 하다 보면, 간증을 하는 나 자신도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더욱 높아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말하고 전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오늘의 키워드는 '친밀도'이다. 하나님과의 친밀도.
(참고;영어로는 intimacy. 소비자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간증을 할 때 자기 소개함에 있어서 나는 '넘어질대로 넘어져 본 본죽 대표 최복이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좀 덜 넘어지고 남 탓보다는 자기 탓을 한다. 그리고 '무릎을 자주 꿇고' 기도하다보니 덜 넘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무릎 경영은 기도 경영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도 있는 요구를 하나님께서 하셨다. 단지 기업의 경영 뿐만 아니라 자기 경영, 가정 경영, 직업 경영 등 모든 경영을 무릎으로 하기를 원하셨다.
기독교 영화 중에 군사령부의 작전실 또는 상황실을 뜻하는 워룸(War Room.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7974)이라는 영화가 있듯이 우리의 삶은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는 기도 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다.
호떡 장사에 아기 업고 돈 꾸러 다니던 나였다. 따라서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다.
우리 기업에는 3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는 성경적가치 즉, 하나님의 가치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다.
마치 교도소 담벼락을 타고 걷는 것 같다고 남편은 얘기하기도 한다. 사실 힘들다. 잘하고 있다기 보다 애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므로 그 길이 좁지만 믿음으로 천천히 따라가는 중이다.
둘째는 이웃 사랑 실천이다. 이를 위한 '본사랑' 재단이 있는데, 여기를 통해 해외의 굶고 있는 어린이 2000~3000명을 후원한다
세째는 선교의 사명이다. 우리 기업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사용되려 한다.
한국으로 귀국하시는 선교사를 후원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토탈 비젼으로 '비즈니스 선교'를 한다. 즉 '본죽+본도시락 토탈 버전'으로 해서 선교사님들께 내어드리는 방식으로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했다. 이는 우리 기업의 최종 버전이며 최근 15개 국에 선교 매장을 오픈했고 현재도 17명이 우리 기업에서 배우고 있다. 비즈니스 선교는 선교사님들의 비자 등 제도적 문제가 해결되고 생존의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에 가정교회보다 조금 더 발전된 모델이 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교회가 식당에서부터 시작한 곳이 많다고 하여 더욱 용기가 난다.)
마치 교도소 담벼락을 타고 걷는 것 같다고 남편은 얘기하기도 한다. 사실 힘들다. 잘하고 있다기 보다 애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므로 그 길이 좁지만 믿음으로 천천히 따라가는 중이다.
둘째는 이웃 사랑 실천이다. 이를 위한 '본사랑' 재단이 있는데, 여기를 통해 해외의 굶고 있는 어린이 2000~3000명을 후원한다
세째는 선교의 사명이다. 우리 기업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사용되려 한다.
한국으로 귀국하시는 선교사를 후원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토탈 비젼으로 '비즈니스 선교'를 한다. 즉 '본죽+본도시락 토탈 버전'으로 해서 선교사님들께 내어드리는 방식으로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했다. 이는 우리 기업의 최종 버전이며 최근 15개 국에 선교 매장을 오픈했고 현재도 17명이 우리 기업에서 배우고 있다. 비즈니스 선교는 선교사님들의 비자 등 제도적 문제가 해결되고 생존의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에 가정교회보다 조금 더 발전된 모델이 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교회가 식당에서부터 시작한 곳이 많다고 하여 더욱 용기가 난다.)
그런데 기업의 경영을 선교적 방향으로 틀자 여러 공격과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주님 말씀 붙들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내 나이가 55세인데 (1964년생) 내 평생의 신앙 생활을 한마디로 하자면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기쁨' 하나면 충분하다. 최근에는 브라질 상파울로에 본죽 매장을 오픈하고 돌아 왔다. 국내에서는 매장을 오픈할 때 내가 직접 일하는 경우는 이제 없지만, 해외 선교지 오픈하러 갈 때는 4명이 한 조가 되는데 나도 청소와 설겆이 등의 잡일을 다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누리는 감격이 매우 크다.
내 나이가 55세인데 (1964년생) 내 평생의 신앙 생활을 한마디로 하자면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기쁨' 하나면 충분하다. 최근에는 브라질 상파울로에 본죽 매장을 오픈하고 돌아 왔다. 국내에서는 매장을 오픈할 때 내가 직접 일하는 경우는 이제 없지만, 해외 선교지 오픈하러 갈 때는 4명이 한 조가 되는데 나도 청소와 설겆이 등의 잡일을 다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누리는 감격이 매우 크다.
우울증 환자였고 애 업고 남에게 돈 꾸러 다니던 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시켰을까? 지금까지는 일종의 사업보고였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내 신앙 간증이다.
나는 충남 청양군 칠갑산 아래 최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13남매가 사는 종가댁에서 자랐다. 13남매... 심지어 어머니도 둘 이었다. 이른 바 '소실'이라고도 하는 작은 어머니가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7명을 낳았고, 작은 어머니가 6명을 낳았는데, 나는 13명 중 10번째였다.
대학 (충남대 국문과 83학번)에 입학해서 1년 선배인 김철호 본죽 회장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김회장을 우리는 '김 집사'라고 부른다.(웃음)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애인이 있다’는 소리에 김집사의 어머니가 나를 집으로 부르셨다. 서른여섯에 혼자되신 그분은 서천장, 한산장 등 여러 장터를 돌아다니시며 포목장사로 1남 4녀를 억척스럽게 키워내신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홀어머니에 외아들...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머니에게 남편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일찍부터 며느리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다고, 또 예수 안 믿는다고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으나, 김집사가 내 첫사랑이어서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 3학년 때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고 4학년말에는 6개월 방위를 마친 김집사와 결혼을 했다. (스물셋 어린 신부와 스물넷 어린 신랑) 그래서 큰 딸은 지금 이미 서른 살이 넘었고 내게는 손자도 있다.
대학 (충남대 국문과 83학번)에 입학해서 1년 선배인 김철호 본죽 회장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김회장을 우리는 '김 집사'라고 부른다.(웃음)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애인이 있다’는 소리에 김집사의 어머니가 나를 집으로 부르셨다. 서른여섯에 혼자되신 그분은 서천장, 한산장 등 여러 장터를 돌아다니시며 포목장사로 1남 4녀를 억척스럽게 키워내신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홀어머니에 외아들...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머니에게 남편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일찍부터 며느리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다고, 또 예수 안 믿는다고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으나, 김집사가 내 첫사랑이어서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 3학년 때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고 4학년말에는 6개월 방위를 마친 김집사와 결혼을 했다. (스물셋 어린 신부와 스물넷 어린 신랑) 그래서 큰 딸은 지금 이미 서른 살이 넘었고 내게는 손자도 있다.
친정 엄마는 지금은 소천하셨으나 본디 욕쟁이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작은 어머니를 두어 같은 동네에 살게 했으니 그로 인해 마음에 한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래도 결혼 전까지는 가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결혼 후에는 부천에서 100만원에 5만원짜리 단칸방에 살았다. 그 때는 결혼 패물도 팔고 돌 지난 아이를 업고 돈 꾸러 다녀야 했다.
그 때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 생겼다. '다시는 사람을 찾아 다니지 않겠다.' '부자 만들어 주면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겠다'
그 때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 생겼다. '다시는 사람을 찾아 다니지 않겠다.' '부자 만들어 주면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겠다'
당시 집 근처 시장통에 작은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어린 새댁이던 나는 아이를 업고 나와 이곳 예배당에 아기를 내려 놓고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철야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토요일 아침,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게 되었다. 나는 방언도 기도원이나 부흥회가 아니라 집에서 혼자 받았다. 나는 본디 숫기가 없어서 큰소리로는 기도를 못했는데 사모함은 매우 컸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방언을 받고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찾았는데 그 때 비로소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었다. 존재적 죄인, 죗덩어리인 나를 인식하고 나니 내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성령세례 사건 이후 진짜 믿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복' 받고 싶어 교회를 다녔으나, 성령 세례를 받고는 '하나님 저를 하나님 일꾼으로 써주세요'라는 기도를 했다. 내 기도가 바뀌었다. ‘~을 해주세요‘ ’~을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는 “아버지, 제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하나님 일에 사용해주세요”라는 기도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40일 작정기도도 했는데 응답은 내게 '밀알'이 되라시는 것이었다. 밀알이 되려면 내가 죽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밀알이라는단어를 밀쳐내고 싶었지만 계속 마음에 남았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말씀을 붙잡았다. 밀알은 거부했지만 그 개척교회에서 교사, 구역장 등 여러 봉사를 도맡아 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에 의지하여 살았다.
마침내 하는 사업마다 실패하던 남편이 30대 초반에 대박을 쳤다. 순식물성 수입화장품 대리점 ‘바디&뷰티하우스’가 큰 히트를 친 것이다. 대리점을 400개나 거느린 촉망받는 기업인으로 변모하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TV에도 출연하고 강남의 멋진 사무실과 8학군의 좋은 집, 딸 셋 카폰이 달린 고급 자가용까지 굴리게 되니 ‘잘되면 나눠 주고 꾸어 주고 베풀며 살겠습니다.’ 하며 서원하던 기도는 잊어버렸다.
주일을 끼고 놀러 다니기도 했다. 개척교회를 떠나 강남으로 오니 교회에서도 아무도 나를 몰라 봐서 교회를 적당히 나가게 되었다. '자고하여 넘어질까 조심하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는 말씀을 잊고, 잘살게 되었는데도 만족 못하고 더 큰 부자가 되려던 욕심은 갑작스러운 IMF에 허망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IMF로 인해 고가의 수입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거품꺼지듯 사라져서 고가화장품은 덤핑 처리되고 하남의 창고를 포함하여 모두 사라져 순간에 알거지가 되고, 우리는 세무 체납자,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자살을 많이 생각했고 곤지암의 농가를 알아보러 많이 다녔고 남편은 도망다니고 나는 불면증 등으로 신경정신과 병원에 입원했다.
남편이 어느날 새벽기도를 가자고 해서 나갔더니 집 앞에 하얀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는 집사님도 계셔서 올라탔는데 그 차는 교회가 아니라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내가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몇 가지 문진을 했는데 곧바로 나는 양손과 두 발을 모두 묶여서 어디론가 옮겨졌는데 그곳은 바로 '정신병동'이었다. 육중한 철문 안의 신경정신과 병동에 갖혔던 그 순간의 감정은 너무 어처구니 없었고 충격적이었다. 간호사가 준 약을 먹고 자고 나면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샤워는 할 수 있어서 하루에 수십번씩 샤워를 했기에, 먹고 자고 씻고가 생활의 전부였다. 며칠이 지난 저녁부터 간호사가 불을 끄고 나가면 나는 수면제를 먹는 대신 십자가들이 보이는 병실 창문에 서서 매일 기도했다. “주님,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나요?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요. 저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서 예배드리게 해주세요.” 거기에서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었다. 오래 있지 않고 나오기는 했지만, 한 달여의 정신병동 입원 치료는 굉장히 큰 상처이자 내게 낙인이 되었다. 내가 가족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돼버린 느낌이었다. 아이들을 포함해서 아무도 내게는 중요한 얘기를 나누지 않는 절대 고독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수면제만 의지하며 살 수 없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약 안 먹고 자볼게요” 몇 번을 다짐해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모습 속에 사실 주님은 더 가까이하셨다. 그렇게 수면제도 점점 줄어들게 하시고 단잠도 주셨다. 돌아보면 내게 그 시간들과 환경은 나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작업대였다. 하나님은 내 자아를 깎아내고 새롭게 빚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 다 치유 되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에는 '당신에게는 당신의 무덤이 있습니까?'라는 글이 있다. 그 누구도 '옛 사람이 죽는 무덤'을 지나지 않으면 온전한 거룩의 체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일이 내게 무덤이 되었다. 나를 정신 병동에 넣은 남편에 대한 원망도 있었으나 나를 위해 불가피했던 상황을 이해하며 이제 모두 마음으로도 해결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보, 우리 호떡 장사해볼래? 내가 종로에서 기술도 사사하고 자리도 좀 알아봤는데 부지런하면 괜찮겠어.”
처음엔 너무 부끄럽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숙대 근처 건물 앞에 포장마차를 갖다 놓고 준비 완료했지만, 남편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3,4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남편은 호떡 장사였지만 양복 입고 넥타이를 매고 500원짜리 호떡 장사를 했다. 후에 들어보니 반드시 다시 일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옷도 번듯하게 입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호떡장수의 아내로 포장마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루 이틀 손님들을 대하며 부끄러워할 시간도 사라지고, 단돈 500원짜리 호떡이라도 어떻게 손님들에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더 큰 왕호떡, 단맛을 싫어하는 손님들을 위한 야채호떡, 식용유 대신 더 고소한 식감의 마가린까지 점점 호떡장사가 내 생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주는 자가 복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식장사의 철학. 즉 '퍼줘도 절대 안 망한다.' 학생들이어서 호떡을 크게 왕호떡으로 만들어 주었다.
처음엔 너무 부끄럽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숙대 근처 건물 앞에 포장마차를 갖다 놓고 준비 완료했지만, 남편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3,4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남편은 호떡 장사였지만 양복 입고 넥타이를 매고 500원짜리 호떡 장사를 했다. 후에 들어보니 반드시 다시 일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옷도 번듯하게 입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호떡장수의 아내로 포장마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루 이틀 손님들을 대하며 부끄러워할 시간도 사라지고, 단돈 500원짜리 호떡이라도 어떻게 손님들에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더 큰 왕호떡, 단맛을 싫어하는 손님들을 위한 야채호떡, 식용유 대신 더 고소한 식감의 마가린까지 점점 호떡장사가 내 생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주는 자가 복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식장사의 철학. 즉 '퍼줘도 절대 안 망한다.' 학생들이어서 호떡을 크게 왕호떡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때를 '고난 학과'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밀착해서 내게 교육을 해주셨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즉,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단돈 500원짜리 호떡 하나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5만원어치 팔면 5천원을 십일조로 떼며 청지기 훈련을 받았다. 선한 부자되겠다던 옛 약속을 다시 기억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생계였을 뿐 음식장사로 복 받을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준비한 반죽을 포장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노점 단속반에게 빼앗긴 것이다. 뜨거운 눈물을 많이 흘렸다. 이후에도 용역업제가 갑자기 들이닥쳐 포장마차를 빼앗기 일쑤였다.
그렇게 매일 쫓고 쫓기는 시간이 이어져서 1년 동안의 호떡장사도 접어야 할 무렵, 김집사의 친구 한 분이 종로에 외식컨설팅 회사를 차리면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남편은 컨설팅을 하고 병든 아내를 데리고 취업을 했기에 내가 월급 70만원에 하는 일은 주방보조였다. 말이 ‘최 대리’지 설거지, 청소, 냉장고 정리 행주 삶기, 재료 사오기 등의 단순 노동을 하느라 존재감도 사라졌다. 정신과 약을 먹고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절망 때문에 더더욱어려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교회에 가도 목사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내게 하나님이 계시기는 할까?’ 아무 것도 앞이 보이지 않고 갑갑했다. 종로에서 밖에 나가 '내 인생 여기가 끝인가요?'하고 하소연하곤 했다. 요리학원의 음식 남은 것을 먹는 것으로 해소하려 했더니 90kg정도까지 살이 찌기도 했다. '이럴 바에는 나를 데려가세요.'하는 자살 충동은 매일 겪었지만 그래도 신앙이 있어서 자살 시도는 한 번도 안 했다. 자기부인의 시간이 바닥까지 쳤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하면 남편은 겨우 한다는 말이 '약 먹어!' 였다. 사람은 누가 되었든지 그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그 사람이 내 맘을 다 알아줄 것을 기대하면 안된다.
마지막에 하나님께 여쭙기 위해 교회에 갔다. 내가 보이나요...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목이 상하도록 아버지를 부르짖었다.
처음으로 목이 터져라 불렀더니 응답해주셨다. 누가 놓고간 전도지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하나님의 러브레터였다. 거기에 씌어진 생명의 전화를 걸어 10분설교를 계속 들었다. 그 말씀들이 생명으로 떨어졌다. 그동안에 나는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을 구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 존재를 구할 때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내 전심이었다. 내 헌금이나 봉사가 아니었다. '하나님 한 분만 충분하다'는 기도가 전부였다.
처음으로 목이 터져라 불렀더니 응답해주셨다. 누가 놓고간 전도지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하나님의 러브레터였다. 거기에 씌어진 생명의 전화를 걸어 10분설교를 계속 들었다. 그 말씀들이 생명으로 떨어졌다. 그동안에 나는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을 구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 존재를 구할 때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내 전심이었다. 내 헌금이나 봉사가 아니었다. '하나님 한 분만 충분하다'는 기도가 전부였다.
오늘의 주제는 친밀도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도가 높았던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지금은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최우선 순위가 아닐 때도 있어 안타깝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던 그 대가 가장 친밀했던 때이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그 때 받았다. 나는 말이 안 좋다. 아마도 성장한 환경탓일 수 있는데, 내게는 쓴뿌리가 무척 많다. 독기가 있다.
(민수기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말에도 영향력이 있다. 내 말을 체크해보니 하나님, 축복, 긍정, 감사, 살리는 언어는 하나도 없었다. 말이 비뚫어지면 인생도 비뚤허진다. 그 이후로 선포와 감사로 내 기도가 바뀌었다. 기도문을 쓰기 시작했다. 한번만 쓰임 받게 해주세요.
그런데 잘 안되었다. 네 생각이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안에 성경 말씀이 없는 것을 체크해서 알게 되어 성경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 쓰고 외우고...계속했다. 절박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했는데, 마침내 내 병이 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요리 학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레시피, 개량화, 표준화 등을 알게 되었다. 본죽을 만들 수있는 모든 노우하우를 배웠고, 15개의 본죽 메뉴를 개발했다.
그 때부터 말씀에 근거해서,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외우는 동안에 말씀이 나를 변화 시켰다.
그 때부터 말씀에 근거해서,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외우는 동안에 말씀이 나를 변화 시켰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개역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찰하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찰하시고 변화시키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찰하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찰하시고 변화시키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본죽이 처음 시작된 곳은 건물 구석의 2층에 3~4명이 망해 나간 절대 될수 없는 자리에서 시작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기도와 많은 노력 끝에 아홉그릇에서 시작한 사업이 7~8개월 후 계단에서 줄을 서는 가계가 되어 있었고 죽의 달인이 되었다. 이어서 남편이 합류했고 프렌차이즈 사업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다. 영어 이름도 사용했는데 그것이 지금 비즈니스 선교에 도움이 되고 있다.
40그릇, 50 그릇이 한계로 보였으나 밤마다 남아서 주문이 몰려 오는 상황을 설정하며 연습하고 다음날 적용하는 일을 거듭했더니 나중에는 하루 200그릇을 소화할 수 있었다. 죽의 달인이 된 것이다. 작은 주방의 기적. 하지만 그것은 사실 말씀의 기적이었다. 만드는 동안 언제나 내 입에 말씀이 떠나지 않게 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메뉴를 개발하다가 혀가 다 대었다. 손등은 화상으로 뒤덮였다. 정성을 위해 장갑을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죽을 저어서 팔이 안움직여지기도 했다.
그러다 TV에 출연하고 본죽은 마칙내 수직상승을 하게 되었고, 나는 죽의 달인 뿐만 아니라 가맹점 오픈의 달인이 되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역할의 분담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복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릇은 깨끗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릇이 더럽거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학로 1호점부터 노숙자들에게 밥을 대접했고 그로부터 본사랑이 시작되었다. 본사랑은 국내에서 빈곤 아동, 장애인, 쪽방촌, 새터민 등을 돕고 해외에서 NGO로 활동하며 빈곤 아동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또한 본월드재단을 통해 선교사들을 도와 선교 사역에 협력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대학로 1호점에 봉사하러 오신 목회자와 성도들을 섬기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점심때는 본점 4층의 오피스텔 방 하나를 기도실로 썼다. 12시에서 2시 무렵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거나 쓰고, 성경 쓰기나 기도편지를 쓰는 워룸(원래는 ‘전시 작전상황실’이지만, 영적으로는 영적인 전투를 위한 ‘기도실’)이 되었다.
점심때는 본점 4층의 오피스텔 방 하나를 기도실로 썼다. 12시에서 2시 무렵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거나 쓰고, 성경 쓰기나 기도편지를 쓰는 워룸(원래는 ‘전시 작전상황실’이지만, 영적으로는 영적인 전투를 위한 ‘기도실’)이 되었다.
추적60분, 불만제로, 장조림 사건 등 회사가 성장하면서 여러 위기를 많이 겪고 있다.
그러나 '선한 가치관, 탁월한 역량, 범사에 감사'를 매일 외치며 내게 약함이 곧 강함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해나가고 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선'은 하나님나라의 일이며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고난, 역경, 절망 등 벼랑 끝에서도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느끼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통해 본죽을 세계를 선교하는 기업으로 인도하고 있어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도 인도 by 김은호 목사님]
고난 가운데 있는 믿음의 지체들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를,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자.
(찬양) 이제 역전되리라. 기도를 멈추지 마라~
섬김과 나눔이 이번 단세의 비공식 그러나 일관되고 실질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복을 받고 누리기를 원하지만, 또한 반드시 심어야 하고 흘려 보내야 한다. 움켜쥐는 삶이 아닌 나누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사노라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그러나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이해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인생이다. 꿈과 비전을 간직하고 선교적인 삶을 살자.
우리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진 기업에 대한 꿈을 꾸게 하소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 믿음의 말, 창조적 언어를 사용하게 하소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깊어지고 인생이 재해석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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