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김연재 작가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외래교수
미술치료학박사
서울베다니교회 집사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기 전까지는, 다섯 가지 중독에 시달리며 오물이 흐르는 긴 터널속에서 살아가는 쥐가 탈출하여 봉황이 되는 반전을 꿈꾸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아 헤매였다.
<어린 시절>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 중독이었고 고기잡이로 자주 집을 비우시다가 집에 돌아오시면 어머니를 구타하거나 여러 아들들을 세워놓고 오기를 가져야 한다며 밤새 소리치셨기에, 나는 두렵고 무서움 속에서 '오기'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내 구주라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지 않았을때의 오기란 그저 분노의 결정체일 뿐임을 고백한다.
본디 어머니는 배우자를 교사나 서기 수준으로 기대했는데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와의 친분관계 속에서 초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아버지와 이미 정해져 버린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슬픈 나날이었다.
여동생도 중학교를 보냈는데 왜 본인은 중학교에 보내지 않느냐며 자해하는 현장을 보이기도 했던, 그렇지만 나를 유일하게 챙겨주던 오빠는 내가 저축한 돈을 갖고 가출하여 서울로 가버렸다. 나는 6남2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그 많은 오빠들은 늘 '여자는 순결해야 시집에 가서 잘 산다'고 말했다. 언니는 나와는 15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함께 한 추억은 없고 그저 식모처럼 보였기에 언니는 '여자의 아픈 삶'일 뿐이었다. 그 언니는 20세 즈음에 도피를 위해 이성 교제를 시작했지만, 일반적인 평범한 행복을 향한 여자의 출발이 아니었다. (가족사를 간증에서 다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과 간증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나누기 위함이지, 가족에게 누를 끼치고자 함이 아님을 이해 부탁한다.)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던 언니는 어린아이 하나를 낳고 도피해버렸고, 그 부담은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남겨졌다.
어머니는 즐겨 키우시던 선인장의 가시처럼 양육에 있어서 무서워서 별명이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자기 외할머니 집이었지만 (일반적 관계의 소생이 아니었기에) 우리 조카는 들어올 수 없었다. 사진 속에 나오는 잘생긴 에티오피아 어린아이와 같이 커다란 눈망울로 담벼락에 붙어 서 있던 조카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가 엄마인 것처럼 가슴 쓰리고 아팠다.
미역국 사건은 내가 버려졌다는 심리적 두려움을 경험한 사건이다. 13세, 중학교 입학을 앞 둔 초봄(봄방학)이었다.
고구마를 심는 때였는데 어머니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면서, 뜨거운 미역국을 만들었다. 내가 자원하여 그것을 양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밭으로 가게 되었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집 처마 밑 빨랫줄에 걸려 넘어지면서 뜨거운 국물이 흘러 오른쪽 어깨 아래로 3도 화상을 입게 되었다. 엄마는 이미 밥을 머리에 이고 밭으로 출발한 상태였지만, 골목을 돌면서 내 비명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몸에 찬물을 끼얹다가 기절을 했다. 나중에 깨어보니 피부가 다 내려앉고 노란 물이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도 모르게 평상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무당할머니라고 부르던 아랫집 할머니가 보시고, 살이 썩어 들어간다고 생각하셨는지 생선에 뿌리는 굵은 소금을 상처에 뿌리고 가서, 그 고통으로 인해 다시 기절했다. 엄마는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와서, 약국이라도 가자고 했다. 초등학교 남자 동창네 약국에서 수치스럽게 벗은 몸에 바세린 거즈를 붙였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어머니는 쓸모가 없어서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서운하다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서른 살을 넘겼다.
<공부 중독, 일중독>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으로 가서 일하며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3교대로 근무하는 환경 속에서도 말 없이 꿋꿋이 열심히 살았다. 내가 시골바닷가에서 바라봤던 험한 인생의 자리에 있었던 여자들의 삶은 결코 살지 않겠다는 결심에, 화장실이든 복도든 불빛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대학갈 준비를 하였고 대학을 가려고 등록금을 준비했다. 나는 ‘여자’가 되지 말고 ‘똑똑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자라면서 당연히 하게 되는 생리도 21살 이전에는 없었다. 상사가 생리대가 있냐고 묻는 바람에 생리대가 뭔지 알았고,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상사의 사모님 손을 붙잡고 산부인과에 가서 치료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생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마산 분위기는 부모에게 버려진듯한 가난과 애정결핍, 외로움으로 인해 여성 선후배들이 만나지 말아야할 남자들과 만나고 낙태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행복한 삶은 위해서는 어떻게든 순결을 지키고 싶어서 도망다녔다. 참하다 예쁘다 하며 청혼을 하는 남자들을 모두 거절했다. 30세가 넘도록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좋은 배우자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자들과의 교제를 비정상적으로만 하게 되었다. 어떤 여자도 쳐다보지 않을 것같은 남자, 따뜻함이 없는 남자, 너무 가난해서 비닐하우스나 창고같은 화실에서 자며 라면 끓여 끼니를 해결하는 남자들을 따라 다녔다. 너무 외로워서 내 편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결혼을 위함이 아니라 그저 내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자존감이 낮은 여자가 되어갔다.
낮은 자존감의 후유증으로 억울함이 주는 '분노' 항아리와 '원망'이라는 유리항아리를 늘 챙기고 다녀서,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를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공격을 하면 즉각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지를 것같은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항상 품고 살아갔다. 언제나 열심히 샴푸도 팔아보고 영화티켓도 팔아보며 대학 생활 중에는 공부중독이 되었다. 공부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팔 수 있었고 무엇이든지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공부중독은 학비 마련을 위해 점차 일중독으로 변해갔다.
<남자 중독>
남자를 내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늘 추위를 느끼던 우리 가정을 떠나서 나만의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시작한 내 결혼 생활은 폭력과 과거사의 비참하고 한심한 옥탑방의 동거로 시작되었다. 정상적이고 야무지고 재능이 많던 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택시를 잡지 않는다고 대로에서 맞아도 어느 누구에게 전화해서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가정의 어두운 면은 소문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내게 뿌리 깊었던 것이다. 일 중독이 되어 휴일에도 돈을 더 많이 주는 알바를 했고, 전에는 생각도 못한 알바까지 전전해야 했다. 내 첫 결혼은 그렇게 가족에게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슬픈 이웃집 여인 얘기처럼 실패로 끝났다. 동네 창피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엄마가 원하는대로 떠나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중에 내 아들의 아버지가 된 두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3대째 대대로 이어진 기독교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중이 되기 위해 입산했다가 여자가 생각나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식은 하지 말자. 아이도 낳지 말자. 집을 갖지 말고 화실에서 살자'는 주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로서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내가 결혼할 의사도 없는 그 남자에게 매달렸다. 그에게 좋은 옷을 사주며 결혼을 하자고 따라다녔다. 그러다 겨우 그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도 다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냐? 너가 원하는 결혼식에도 동의해주지 않았냐?’며 결혼을 몰아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주님에게 갔어야 했는데, 그 사람에게 간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내 주인이었기에 그 남자와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 후 첫날부터 악몽은 시작되었다.
<쇼핑 중독>
공부하기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더 나은 직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또 다시 공부를 했고, 공부를 하려니 언제나 돈이 필요해지는 상황 속에서 가슴이 공허해질 때마다 쇼핑 중독이 되어갔다. 백화점에 전시된 물건부터 길바닥 노점상의 슬리퍼에 이르기까지, 수중의 돈을 다 쓰고 카드도 한도가 다 차서 더 이상 살 수 없을만큼 사들인 후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존재감도 낮고 죄가 머리털만큼이나 가득 차있어서 벗어날 방도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내 방식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가난도 힘든데 존재감도 없어 이런 아픔을 겪다가 무너지게 되어 또 이혼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도 모른 채 매일매일 다가오는 공포에 눌리기 시작하면서, 의존할 할 사람을 찾았고, 내 비밀한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았지만, 내 멀쩡한 외모와 건강해 보이는 육신과 재능 때문인지, 선뜻 내 아픔에 귀를 기울이거나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은 척, 많이 아는 척, 돈이 있는 척, 여유가 있는 척, 좋은 집에 사는 척, 좋은 차를 타는 척, 내가 주인이면서도 가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척 하면서, 너덜너덜한 넝마주이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래도 양심은 부끄러워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사람들로 인해 가뭄에 단비를 마시듯이 간신히 숨만 쉬며 살았다.
중독은 ‘정서적 가뭄’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것이다.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화날 때 화내지 못하고, 좋아할 때 좋아하지 못하고, 즐거워할 때 즐거워하지 못한다. 그런 자리를 자동적으로 피하게 되어 있다.
<교회에 나가고 기도도 해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공장에서 나와 말씀에 입각하여 예수님을 따르고자 길을 떠난 후에 겪게 된 일들이 바로 내 삶의 인생 과정이 되었다.
25년 전, 두 번째 결혼해서 신혼이었을 때 매일 새벽마다 양재 시장의 생선가게에 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남편이 내가 차린 밥상을 먹더니, ‘이런 음식을 먹는 거라고 만들었냐? 너나 먹어라!’ 하며, 밥상을 물린 것이다. 그 순간 어릴 때 뜨거운 화상을 경험한 쇼크를 다시 느꼈다. ‘이 결혼도 실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왜 그러세요?’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다. 쇼크가 들어오는 순간 말문이 막히기 때문에 대응을 잘 못한다. 그냥 인정받고 싶어서, 그나마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을 굽기 위해, 매일 새벽 생선가게를 가게 된 것이다.)
그 생선가게 아저씨가 내게 뭐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저는 미술지도를 하는 선생님입니다.’라고 하니, 자기가 작은 신학교에서 전도사 교육을 받는 중인 아내에게 내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날 그 아내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아이들 미술 지도가 끝나는 대로 양재시장으로 가서, 난생 처음 보는 사이인 그 아내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내분이 밤늦게 퇴근해서 잠을 자려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한 기도를 시키셨다고 했다. 2시간 정도 기도를 시키셨는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추운 겨울바람에 발가벗은 모습으로 서 있는 내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고 했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비참한 일을 말없이 참아내고 있는데, 그 딸을 살려야 된다. 예수 믿게 하라. 내가 쓸 데가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몇 시간 동안 그 분으로부터 환상을 본 얘기를 듣다가, 늘 안그런 척, 예쁘고 잘난 척하던 나였기에 눈물이 나올 리가 없는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많이 운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 준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참 놀랍다.
독립문 교회였다. 내일 모레 전도집회가 있으니 꼭 오면 좋겠다는 말씀에 가 보았다. 내가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 날의 설교 제목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였다. 내 아버지가 어부였는데 어부가 되라는 설교를 들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놀랍다.
또, 나는 매일 죽고 싶던 사람인데, 주일예배를 위해 교회에 가니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하는 것이었다. 죽고 싶기만 하던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한 찬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업고 갔던 아들을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5가지 중독에 싸여 살면서도 가면에 예쁜 그림까지 그려서 내 불행을 감추고 고독하게 내몰았던 죄인 이었던 것이다. (개척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아이들 미술 지도 시간 외에는 거의 교회에 가 있었다. 모든 일을 시키는 대로, 또 일을 찾아서 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다. 그러나 남편은 교회 다니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남편의 변화를 위해 기도했다.)
새벽예배에도 갔다. 새벽 말씀을 듣고 성경을 보며 ‘세상에 이런 좋은 책이 있구나!’ 깨달았다. 교회 새벽예배를 열심히 다니면, 내 불행이 끝날 줄 알았다. 순종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교회만은 열심히 다녔다. 회개하라고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등을 치며 기도해 주셔도 '회개가 뭐예요?' 하며 회개가 무엇인지도 몰랐었지만, 그 후로는 새벽예배와 철야예배에 다니며 회개했다. 내 몸에서 입 밖으로 벌레가 빠져나가는 회개의 경험도 했다. 회개를 열심히 하다 보니 내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몸무게를 재어 봐도 몸무게는 그대로였다. 화상 사건 이후 나는 몸에 땀이 나지 않는 체질이 되었었는데, 쓴뿌리의 흔적인 분노가 빠져나가면서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10의 2조를 드리며 ‘교회 중독자’가 되었다. '주는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도사님이 전도 열매를 만들라고 해서, 내 전공을 살려 엄청 큰 포도송이 열매를 그림으로 그려서 드렸다. 실제 사람전도를 하라는 것인데, 제가 정말 무식했다.
내 안의 상처가 얼마나 큰 지 모르면, 그냥 잘 하면 무엇인가 되는 줄 착각한다. 무지도 죄다. 내 죄를 직면할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부모는 분노, 짜증, 비난, 가르치는 말을 자녀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자녀들의 결핍을 줄이는 길이다. 나는 그 아픔에 교회에 매일 가서, ‘왜 하필 저예요?’라고 울기 시작했다. 전도사님이 안스러워 눈물로 기도해 주었다. ‘너를 쓸 데가 있다.’ '하나님 저 쓰지 마세요. 다 망가져 가고 있는데 무슨 쓸 데 입니까? 그 대신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좀 열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약물 중독>
‘쇼핑 중독’으로 인해 누가 내게 돈을 꾸어주면 돈이 없어질 때까지 물건을 샀다. 그리고 그 돈을 감당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다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픈 곳이 너무 많았다. 각종 약도 많이 먹어야 했다. 그 결과, 각종 약물에 의존하는 ‘약물 중독’에도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온갖 중독에 시달렸다.
<예수님을 믿게 되다>
이제는 극적인 단계로 넘어 가겠다. 마침내 주님이 알려주신 좁은 길에 섰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었다. 믿기로 했다. 잘못하면 내가 원했던 아들도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작은 신학대학 전임교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가면을 벗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예수 믿기가 어려웠지만, 내게 일어나는 목이 조여지는 것 같은 결정적 사건들이 내게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5가지 중독이 좀 잦아드나 싶으면 다시 올라가며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내 삶은 좀먹어 가고 있었다.
(마음치료 일을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피해자가 용서해주고 사과를 받고 싶어도 가해자는 대부분 침묵하는 것이었다.) 가해자이면서도 침묵하며 살던 제가 2020년 7월, CBS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해 드디어 피해자로 살게 되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내 아들의 엄마 자리라도 지키게 하신 것이 감사해서 작년부터 '십자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작년에 그린 십자가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현실 속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활비라도 벌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려 D직종이라고 하는 카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라는 작품도 그렸다. 천성을 향해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아래 부분의 하얀 길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붉고, 노랗고, 핑크색의 길은 우리가 딴 길로 새거나 멈추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옆길로 새는 내 삶을 고백한 천로역정이다.
나는 상처와 거짓과 탐욕과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나는 할 수 있다’를 대단한 성찰인 것처럼 외쳤던, 내가 주인이었던 삶을 과감하게 버리기로 결단했다. 말뿐이지 잘 되지 않았던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도 전도에 불이 붙어서, 전도를 하나님이 제일 좋아한다고해서, 하늘의 상급이 두루마리에 씌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열심히 닥치는대로 전도를 했다. 말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와서 보라'고 떠들고 다녔다. 자리는 채웠지만 감당하지 못해서 교회 생활이 힘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알기 전까지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교회를 옮겨 다녔다.
<마무리>
나는 악한 성도였는데, 다니엘기도회 강사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한 달 동안 망설이다가 ‘하나님이 너를 쓸 데가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참석하기로 했다. 지난 순서의 간증자들의 생생한 간증을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고, 내가 얼마나 불신자였는지를 확인하면서 준비하는 동안 오늘이 왔다. 이번 간증이 계기가 되어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짊어지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항상 가면을 쓰고, 포장을 하고, 반전의 기회만 노리는 인생이었기에, 교수와 박사라는 호칭을 떼어내기가 내게는 너무 힘들었다. 누군가 성도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 ‘박사와 교수’라는 호칭을 떼어내고 '선생님'으로 통일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너무 기분이 나빠 답장도 안 했었던 나이지만, 이제는 ‘연재 집사'로 호칭 받기 원한다.
다니엘 기도회가 점점 다가오는 동안에,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화장실 색을 골라 달라고 했다. 그 일을 끝내고 식사하시자고 해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 장소에 갔는데 목사님이 식사기도가 끝나자마자, 나를 돌아보시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감사하면서 지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에 집에 가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쓴뿌리로 인해 엄마와 언니에 대한 용서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태어나서 50년을 일했다. 이제 처음으로 6개월 휴가를 받았는데 이 때에 맞춰서 다니엘기도회에서 불러주셨다. 하나님께서 제대로 사용해 주시기를 원하며 요게벳의 노래를 30번 들으니, 우리 엄마의 아픔과 눈물이 보이는 것이었다. 언니의 눈물과 아픔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언니를 용서하고 이해했다. 그러고 나니, 엄마가 보고 싶고, 언니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산증인으로 살기로 결단했다. 한 교회에 뿌리내리고, 말씀으로 제자양육을 받고, 방황하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육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정성껏 섬기기로 결단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부끄러운 가면을 벗고 승리하였다는 의미로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으로 간증을 마무리 한다.
적용 기도: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이전에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사탄이 주는 여러 가지 상처가 있는데, 사탄의 거짓 메시지에 속아 살 때가 많다. 사탄은 ‘너는 끝장이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한다. 사탄은 우리의 자존감을 낮춘다. 그래서 내게 없는 것만 보게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메뚜기와 같다고 자신을 평가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우리를 비하할 때가 많다. 우리가 상처에 속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 원치 않으신다. 더 이상 사탄에게 속고 살길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우리 인생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 스펙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내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분이 보배롭고 존귀한 분이라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란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열등감으로,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비하하면서 기도할 때 듣지 않으신다.
우리의 무너진 자존감을 성령님께서 이 밤에 회복시켜 주시고, 무너진 소망을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달려가게 하옵소서. 오늘 이 밤에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수치와 쓴뿌리, 온갖 분노와 염려, 두려움은 사라질지어다. 이제 쓴뿌리가 주님 안에서 해결되어서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감싸줄 수 있게 하시고, 이제는 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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