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프로필] 김희아 집사
- ‘희아’(계집 희(姬), 예쁠 아(娥))
-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 저자
- KBS 여유만만강사 오디션 우승
- KBS 강연 100°C 출연
https://youtu.be/s7ZKuqRtnwY
https://youtu.be/tbtu0d5Y09g
그녀는 가슴속 원망 대신 감사를 택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길을 걸으며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가? '하나님, 맞은편에 걸어오는 저 사람들이 내 얼굴을 못 보고 스쳐 지나가게 해 주세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이 붉은 점을 갖고 태어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랬다. “저, 얼굴 봐라, 얼굴 봤나!” 누구나 나를 보면 혀를 찼다.
여러분과 내 차이는 점의 크기가 다를 뿐인데, 나는 버려진 아이였다. 친구들이 불렀던 별명 괴물, 사과 반쪽, 아수라백작... 나는 내 이름 '희아'를 지은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자랐다. 보육원에서 자라났다. 나는 부모님이 있는 아이들은 부럽지 않았으나, 보육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부러웠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후원자가 있었다. (내가 보육원에 있던 때 다른 아이들은 후원자가 2~3명이 있었다. 얼굴이 예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후원자 2~3명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굴의 점 때문인지, 후원자가 없었다. 내가 보육원 살면서 제일 부러운 것은 엄마, 아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점이 없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특히 성탄절이 되면 아이들은 후원자의 선물을 받고 행복해했다. 나는 그런 후원자가 없었다.)
나는 대구 구세군 혜천원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4학년 10세 때 처음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엄마, 아빠를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닌 '후원자를 1명이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해 말에 누가 내게 카드를 보내줬다. '사랑하는 희아야...' 그분은 미국 사람이었다. 그래서 20세까지 나를 후원해 주신 그분을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7월 7일에 후원자의 편지를 받았기에 그날이 가장 좋았다.
(교회는 어린 시절부터 다녔다.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교회 목사님이 늘 설교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였다. 나는 뭐를 감사해야 하는지 몰랐다. 얼굴에 점이라도 없다면 감사할 게 많을 거 같았다. 그런데 나는 후원자도 없고, 부모도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후원자 한 명을 보내주세요.” 어느 날 어떤 엄마·아빠가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 보육원에 후원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원장님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셨다. 흔쾌히 후원자가 돼 줄 것 같았던 그들이었다. 내가 인사를 한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내가 길에서 봤던 여느 사람들과 동일한 표정을 지었다. 후원자가 되겠다고 왔던 그들은 그 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나는 ‘부모님이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를 늘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짠’하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도하며 바라던 후원자는 내가 10살이 돼서야 생겼다. 후원자에게 내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그는 여느 사람처럼 외면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 갖지 않을 때 짐은 나를 위해 기도한다며 ‘희아야, 사랑한다’고 말해 준 첫 사람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 후원자와 헤어지게 되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내 후원자였던 그분이 서울에 오셨다고 해서, 내 딸 둘을 데리고 가서 만났다. 짐 위건이라는 구세군 사관이셨다. (2008/10/05)
나는 아직도 머리를 기르고 있다. 얼굴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새로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서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한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나를 칭찬해 준 첫 사람이었다. 친구들로부터 ‘괴물’ 취급을 당하던 나를 보고 ‘희아’라고 불러줬다. 쉬운 수학 문제를 칠판에 적어 놓고 내가 풀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선생님이 나를 '희아'라고 불러주신 덕분에 친구들도 나를 ‘희아’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찬양을 크게 불렀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했는데, 선생님은 앞에 나와서 노래를 하라고 하셔서 노래를 했더니, 칭찬을 해주셨다. 그래서 내게 꿈이 생겼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 TV에 나가면 나를 버리신 부모님이 나를 찾아주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라면서 가수의 꿈은 접었다. 그 선생님으로 인해 머리를 묶고 학교에 갔더니 예쁘다고 해주셨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칠판에 쉬운 문제를 내고, 내 눈빛을 봤다. 나는 ‘할 수 있어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 선생님은 나를 시켰다. 그리고는 “희야, 잘했다”라고 칭찬하셨다. 나는 1985년 중학교 첫 학기에 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그분은 나를 ‘희야’라고 부르며 웃었다. 선생님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시자 아이들은 그때부터 나를 ‘희야’라고 불렀다. 학교 가는 날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머리로 얼굴 2/3를 가리고 살았지만 그때 비로소 올백으로 머리를 묶었다.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의 눈이 저를 보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 선생님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다. 때로 나는 선생님 같은 사람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원자와 선생님의 사랑으로 나는 보육원에서 잘 자라났다. 슬픈 삶은 아니었으나 놀림을 많이 받다 보니 점이 없어지기를 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떠나야 했다. 사춘기 때는 보육원을 나가고 싶어 했다. 가방도 싸보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도망가려고 하면 이상한 일이 생겼다. 늘 귀신, 괴물, 아수라 백작이라고 부르며 놀리던 아이들이 나를 ‘희야’라고 불렀다. 그 이름 때문에 나는 보육원을 도망치지 못하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이제 보육원에서 나가면 직장을 잡고, 얼굴을 수술하고 싶었다. 누가 나를 받아줄까, 취직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졸업을 앞두던 날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너 졸업하면 보육원에서 선생님 해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직업을 허락받았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내 점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감사했다. 스스로 '복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살까지 큰 점은 아픈 차별이었으나 그때는 복점이 되었다. 나는 보육원에서 손님 앞에 나설 수가 없는 아이였다. 후원자가 오셔서 파티를 열 때는 구석에 앉아서 과자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얼굴에 점은 있지만 마음에 장애는 없었다.
그런데 없던 장애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무서웠다. 한번 두 번 나를 쳐다보는 것은 괜찮은데 사람들은 네 번, 다섯 번이고 내 얼굴을 구경하고 갔다.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고마웠다.
1991년 첫 월급 21만 원을 받았다. 첫 월급을 받고 원장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해 드렸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4개월을 모아서 병원에 레이저 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누웠다. 통증 40분을 참으면 그 고통은 시선으로 받는 고통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치료가 되지 않아서 포기해야 했다.
23살 꽃같이 아름다운 나이였던 어느 날 고개를 숙이고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밥맛이야. 저것도 얼굴이야?”라고 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으나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축복했다.
(롬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축복하니 내 마음에 그 다지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마음 아프레 한 그 사람을 향한 축복기도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더 힘들어 잠자기 전에 눈물로 기도하며 떼를 썼다. “하나님. 저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손이 지우개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문지를 때마다 얼굴의 점이 지워지게 해 주세요.”
기도를 하면서 얼굴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얼마나 문질렀는지 얼굴의 살갗이 벗겨졌고, 흐르는 눈물에 쓰리고 아팠다.
그때였다. 주님이 울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뜨거운 눈물을 쏟으시며 나보다도 더 슬프게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울면 주님이 더 아파하시는구나~ 하나님, 다시는 얼굴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기쁨으로 울겠습니다. 나를 통해 기쁨의 눈물을 흘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날 주님은 내 마음의 붉은 점을 주님의 눈물로 지워 주셨다.
이후 내 삶은 변화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돌아보니 힘든 일보다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우리에게도 함께 아파해 주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 9:2~3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나는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며. 내 죄나 내 부모의 죄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 시간 이후에 하나님 은혜로 너무 행복했다.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날 밤 주님은 내 눈에 감겼던 감사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 후로도 사람들은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저것도 얼굴이가? 내가 저 얼굴이면 나는 죽었다.” 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 얼굴의 붉은 점을 보면 어떤 사람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내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가면 대한민국에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데 화장도 예의라 생각했다. 예의를 억수로 많이 갖췄다. 변장을 했다. 소개받은 남자와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내 점이 보였나? 티가 났나?”라고 생각했다. 점 크다고, 뚱뚱하다고 도도하지 않은 게 아니다. 여자는 똑같다. 결국 남자가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심장이 박수를 쳤다.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싶지만 도도하게 전화번호를 말해줬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헤어졌는데 남자에게서 전화가 안 왔다. 내가 전화 한번 해보고 후회하자고 생각해서 당시 삐삐를 쳤다. 통화를 하고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화장을 1시간 동안 하는 것도 고문이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늘 기도했다. “친구가 제 마음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음을 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만난 지 16번이 지났을 때였다. 여건상 한 달에 2회를 만났으니 8개월이 지날 때였다. 그가 “희아 씨,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내 마음이 어땠을까?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름답게 느껴질 거다. 나는 그날 정말 무서웠다. 이 사람이 내 얼굴의 점을 알고,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라는 걸 알고도 나를 사랑할까? ‘내 점을 알고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 정말 두려웠다. 그를 24번째 만날 때였다. 1년이 지난 셈이다. 대구에서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내가 보육원 선생님으로서 화장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변장’을 하고 나가기 위해 보육원을 나왔다. 그런데 그 근처에 있던 남자친구가 화장하지 않은 내 모습을 봤다. 하지만, 점을 보고 나서도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옆의 여자 친구의 자리를 그대로 비워뒀다. 예전처럼 그는 내 손을 잡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에 콩깍지를 씌워주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행복을 꿈꿨다. 1년이 지나고 만난 지 2년이 될 때까지 얼굴의 붉은 점은 그의 눈에 익숙해진 거 같았다. (대구의 장동건이라 부르는 남편 박상문 씨)
성탄절이 되기 전, 또 다른 만남이 시작됐다.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침만 해도, 하품만 해도, 폭소를 터뜨려도 코피 코피였다. 병원을 갔다. 대구의 큰 병원을 갔는데 코안의 조직을 떼어내곤 검사를 했다. 의사는 나를 내보낸 다음 직장 동료에게 ‘악성종양’이 코 안에 생겼다고 했다. 병명은 이름도 희귀한 ‘상악동암’이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수술하는 날 의사는 내게 “김희아 씨. 수술하면 얼굴 오른쪽의 뼈가 잘려나갑니다. 얼굴에는 뱃살을 이식하고 목에는 구멍을 내야 합니다. 얼굴에 뱃살이 자리잡지 못하면 썩어서 내려앉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저앉았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콧대도 높이지 않아도 됐어요. 점이 없어지기를 바란 것도 아니에요.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게 저의 성탄 선물입니까? 얼굴의 반이 잘려 나가면 저는 이 세상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 이 시간 이 자리에 저를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제 마음 전할 말이 없습니다. 아픈 눈물 받아 주는 엄마의 품도 없습니다.” 그때 나는 찾아야만 했다. 상악동암을 갖고도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감사를 찾았다. 병원 12층에서 하늘을 봤다. 밤하늘의 별을 봤다. 수술 후 깨어나면 저 별을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감사합니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사라질 것이니 감사합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픈 고통을 표현할 말이 ‘감사’라는 고백이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12월이었다. 맞은 자리 또 맞는 아픔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던 그때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얼굴의 반이 잘려 나간다고 했을 때에도, 나 이제 어떻게 사느냐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그날 밤 우셨던 주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감사는 병원에서 나를 웃을 수 있게 했다. 대야에 코피를 받아가면서 수술실에 들어갔다. 13시간의 수술이 끝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25년 동안 ‘희야’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그 해 12월에 ‘희야’로 불렸고, 사람들의 위로와 사랑을 받았다. 얼굴의 암보다 사랑받은 감사가 컸다. 퇴원할 때 마음이 아팠다.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곳, 퇴원한다고 말할 곳이 없었다.
퇴원 후 작은 옥탑방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술했으니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아팠다. 건강을 위해 내가 뭔가 차려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 같이 병원 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상악동암은 생존확률 10%라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웃으면서 산다는 것은 감사 때문이었다. 아픔도 달란트다. 저 얼굴이면 난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맞아요. 당신이 살 수 없으니까 제게 이 얼굴을 주셨지요.”
고난을 보고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손을 뻗어서 우리를 맞아 주시려는 주님에게 손을 뻗어보자. 우리에겐 감사할 게 많다. 살아가는 과정이 행복이었기에 그게 내겐 축복이었다. 내게 점이 없었다면 25살 한창때 암이 걸리는 것을 감당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암이 찾아왔지만 남자친구는 나와 함께 투병 생활을 했다. 남자친구와 결혼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했다. 나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여자였다. 어떤 아빠가 나 같은 여자를 만나게 하는 걸 허락할까.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남자친구 아버님 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앉았다. 수술로 변한 얼굴로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살면서 아픈 거 어떡하니?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다.” 이 말을 하시곤 아버지는 결혼 승낙을 해주셨다.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리라고는 식장 앞에 서기까지 믿어지지 않았다. 식장을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말했다. “신랑이 참 멀쩡하다.” 나는 속으로 말하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점이 있는데 작을 뿐이고, 저는 좀 클 뿐이에요.’ 장애가 아니라 상처의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가장 큰 자원봉사’를 말하고 싶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일으키는 것, 따듯한 밥 먹여 주는 것, 다 좋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장애인 한번 더 쳐다보지 않는 것도 자원봉사다라는 거다. 그 사람 만났을 때 양쪽 입 꼬리를 올려서 웃어 주는 것이 정말 소중한 자원봉사다.
결혼 후 자녀가 태어났다. 기도했다. 제발 내 얼굴의 점이 유전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세상에서 예쁜 아기들을 보셨겠지만 내겐,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쁜 아기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붉은 점이 있는 내가 낳았다! 너무 감사했다. 이 아기를 낳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기 낳고 나니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 그대로였다. 웃고 있으면 울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고, 가만히 있으면 발을 간질여 보았고, 품에도 꼭 품어봤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사랑받지 못했지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모성애를 주셨다. 그게 내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넘어져도 감사하는 걸 가르쳤다. 넘어져도 “이 정도밖에 안 다쳤네?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라고 기도하는 걸 가르쳤다. 아이도 감사를 배워서 “오다가 넘어졌는데 이거밖에 안 다쳤어요.”라고 말했다.
내 딸은 지금은 스물한 살의 예쁜 처녀로 자랐다. 딸을 키우며 엄마의 사랑을 배웠다. 내 엄마와 아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내게는 고난이 달란트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아로 버려졌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가정을 선물로 주셨다. 축복을 외면하고 원망만 하고 살았다면 나는 이런 기쁨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내 인생의 말씀이다. 내 삶의 힘이다.
[적용기도]
감사가 우리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감사가 우리의 불행을 끊을 수 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자.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누군가와 동행하고 힘이 되어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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