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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세 21. Day 13. 생명과 풍성한 삶 - 이승제 목사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1. 11. 13.

[강사프로필] 이승제 목사 
- 가까운교회 (독립교회 연합소속) 담임목사
(교회 명칭은 4영리 소책자에 적힌 ‘가까운 교회에 등록하세요’란 안내 문구에서 착안했다. 가까운교회 성도 수는 30명 정도로 예배공간도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의 ㈔청년의뜰 사무실을 매주 빌려 쓴다.)
- 엠씨넷 (MCNET - MISSIONAL COMMUNITY NETWORK) 선교회 대표 
- 책 「싸가지 크리스천」 저자 (김훈중과 2인 공저)
https://youtu.be/vz_eNMB63So

[본문] 요한복음 10:10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약]
이승제 목사는 인간이 만들어 쌓는 공든 탑을 우상으로 삼는 불교의 종교성에 의지하여 살았던, 반승려 반평신도였던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분이셨고, 누나는 소아마비이이면서 정신적장애자였다. 고교시절에, 그렇게 성실하지 않았던 동네 형이 한양대 전기과에 진학한 사실에 자극을 받아 재수와 배짱지원을 한 끝에 명지대학교 전기과에 진학을 했다. 명지대학교가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사실은 진학한 후에야 알았다. 명지대학교 CCC에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순수하게 보이는 여학생의 4영리 소개를 듣고 어쩔수 없이 영접기도까지 함께 하면서, 기독교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에 4박5일의 기독교 청년 수련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그 집회 분위기속에서, 우연히 어느 목사님(김준권 목사)의 설교중의 몇 마디인,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예전에 소아마비 정신장애자 누나에게 행한 못된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죄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CCC에서 맨 처음 만났던 그 순수하게 보이던 선배누나와 결혼을 하고, 용인에서 대학 캠퍼스 사역, 또 동아시아 선교 사역을 담당했고, 현재는 가까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설교]
기구하게 사셨던 우리 어머니 이야기로 오늘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충청도 시골의 한 가난한 집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가보지 못한 채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 식모살이를 하며 꿈도 키우고 돈도 조금 모으고 있던 중에, 멋있는 남자를 만나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18세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은 38세까지 약 20년간 불임이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4대 독자여서 아들을 기다렸는데 불임이어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아마도 아들을 얻기 위해 아버지는 다른 가정을 만드시고, 어머니는 소박을 맞은 채로 할머니(시어머니)와 함께 사셨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을 때도 천일 기도를 해서 낳았다는 할머니의 권유로 어머니도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3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매일 1천배를 드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아버지도 잠시 집에 들리셨다가 취한 김에 어머님과 동침하셔서 내가 잉태되었다. 그래서 내 어릴 적 별명은 오독(5대 독자), 또는 부처님아들이었다. 그래서 오른쪽 주머니에는 늘 염주를 들고 다니며 살았다. 어머니는 불교를 강요하지는 않으셨지만 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절에 가서 초등학교 입학 때 천배, 중학교 입학 때 이 천배, 고등학교 입학 때는 삼천 배를 시키셨다. 종교심이 강하다기 보다는 내 탄생 배경과 내 안전을 기복하는 마음이셨다.

아버지는 알콜과 도박 중독이셔서 어머님이 생활비를 버셨지만 어머님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빼앗아 술을 드셨기 때문에 집안은 늘 가난했다. 나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여섯 살 손위의 소아마비를 앓아 뇌성마비가 생긴 정신박약아 누나가 있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서 늘 가족들이 누나의 대소변 뒷처리를 해주어야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굽어 바지를 벗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뒤처리를 할 때마다 누나의 오물을 묻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게 소망이 있었던 것은 그 산동네는 대개 비슷한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동네에 아는 선배 형이 있었는데 나와 엇비슷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양대 전기과를 가셨다. 나는 그 형을 role model로 삼았는데, 술과 담배와 당구를 그 형에게 배웠다. 공부하는 자리 등 모든 것을 그 형을 따라 하려 노력하며 공부했으나 재수까지 해도 계속 대학에 떨어졌다. 명지대 전기과가 후기 대학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어서 배짱 지원을 했는데 겨우 합격을 했다. 입학해서야 명지대학교가 미션스쿨인 것을 알았다. 내가 처음 경험한 기독교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예수님이 나오는 재미 없는 영화를 2시간 동안 억지로 봐야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채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어느 날 (5/20) 채플을 마치고 나가다가 어느 분이 나를 여러 달 지켜보았다며 함께 캠퍼스를 복음화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불신자임을 얘기했는데도 조금만 예수님에 대해 더 알아보라며, 본인이 기독학생회장이라며 학생회관 4층의 기독교 동아리에서 만나자고 해서 얼떨결에 약속을 해버렸다. 후에 겨우 찾아간 4층에는 온통 기독교 동아리들이어서 어디에서 그분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교회'자가 들어간 곳 바로 CCC(한국 대학생 선'교회')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수수한 옷차림의 여학생 선배에게 마음이 끌려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했다. 

그 후로 나는 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CCC에서는 지독하게 나를 찾아왔는데,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수련회 초대를 받았고 그저 즐겁게 여학생들과 놀 마음으로 신청하고 참석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찬송과 설교와 기도만을 하는 것이었다. 수련회 장소는 전주대학교였는데 며칠 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식사만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식후연초 불로장생'을 얘기하며 담배를 피우고 시냇가에서 놀았다. 그래도 마지막 날에는 억지로 예배 자리에 앉았는데, 그동안 귀에 들어오지 않던 설교가 귀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 처음에는 나는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나, 계속 설교를 듣다 보니 내 죄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구타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자라나서 고등학생 시절에는 식칼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방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울면서 말리셔서 포기하고 밤새 집밖을 헤맸다. 다음날 마음이 심란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정박아 누나가 내가 숙제해 놓은 페이지들을 찢어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속의 울분이 터져 나와서 누나를 마구 때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고 가장 잔인했던 날이었다. 누나의 온 몸이 멍들 정도였다. 그 멍이 어머니께 들킬까봐 내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누나를 돌봄으로써 그 구타 사건을 감추었다. 3년 뒤 누나가 26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가 재수할 때였다. 완전 범죄였던 그 일이 그 예배에서 내게 떠오른 것이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죽었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때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 되었는데, '희망이 있는데 죄를 알지 못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초청에 나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내가 처음으로 드린 기도는 '우리 리 바보 누나 천국 가게 해주세요.'였다. 말도 안되는 기도였지만 죽은 누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었고, 나같은 것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라는 생각이었다. 눈코 가리지 않고 물을 쏟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눈코입은 없으나 웃는 얼굴 같은 파란 빛이 들어오는 체험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갔는데 비가 고인 아스팔트 길이 흑진주를 깔아 놓은 것 같고 나무와 모든 자연이 아름답게 보였다. 예수 믿은 기쁨이 넘쳤다. 
그 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5세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많은 고생을 하며 자라난 분이었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수련회의 어느 분이 기드온 신약성서를 주면서 요한복음부터 읽어보라고 해서 읽다가 10장 10절 말씀에서 '생명'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때 체험하고 느끼던 일이 바로 '생명'임을 알 수 있었다. 불공 드릴 때처럼 내 정성을 예수님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풍성한 삶이란 무엇일까? 갑자기 부자가 되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내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것이 풍성한 삶일 것이다. 내게 결핍된 것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 행복한 가정을 꿈꾸면서도, 아버지의 폭력성을 내가 갖게 될까봐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동아리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여학생들을 소개 받아 사귀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CCC 간사로 지내던 내게 내 장단점을 적어주며 끝에 '나는 어때?'하고 물어 준 그 누나와 사귀게 되어 이제 결혼한지 벌써 29년이 되었다. 아내는 4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온화한 성품으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서 다행히 나도 결혼생활 30년 가까이 되도록 언어 폭력 한 번 쓴 적이 없다.
대학생을 전도하는 선교단체 간사로 살면서 신혼 살림을 용인에 꾸리게 되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아내가 만삭일 때 집주인에게 전세를 떼이기도 했고 경매에서 경쟁자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했지만, 아내는 그 상황도 이해하고 덮어주자고 했다. 그런 아내 덕분에 큰 다툼 없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이제 동아시아 선교를 하던 시절 이야기다.제 가정에는 연년생으로 아이 셋이 태어났다. 너무 무섭게 잠만 잤다 하면 애기가 생겼다. 일 년에 하나씩 세 명을 낳다보니, 첫아이가 세 살 때 되었던 해에 우리는 동아시아 선교사로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평신도 선교사였고 파송교회 없이 선교생활을 할 때라서 늘 재정은 압박이었다. 선교사님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우리집은 한 방에서 애들 세 명이 자며 살았는데, 어느 날 맏딸이 6학년일 때 파자마 파티를 하러 대기업 주재원이어서 무척 넓은 집에 놀러 간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주눅들까봐 걱정했는데 돌아온 아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 했다. '아빠, 난 결혼하고도 아빠랑 아빠 근처에서 살고 싶어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가 어렸을 때 아빠가 함께 놀아주셨듯이 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면 좋겠어요.' 그 혼잣말을 듣고 나는 감격해서 울었다. 내게 있어 풍성한 삶이란 물질의 풍성함이나, 로또 당첨이 아니라, 아이랑 소통되고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아이에게 우리 가정이 좋은 가정이라고 신겨졌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풍성한 삶이었다. 이런 삶이 내게는 풍성한 삶이었다. 지금은 자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했다. 주택 청약 생각도 했었는데, 아이들은 믿음의 유산 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이런 삶이 내게는 풍성한 삶이다.

나는 대학생선교회 간사로 26년간 지내면서 스물 다섯 살에 용인의 다섯 개 캠퍼스 담당자가 되었고,  동아시아 선교사로 10여년 지냈고, 2012년 선교한국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6년 전에는 교회를 개척해서 즐겁게 목회하고 있다. 목숨을 다해 사역을 했지만, 내 사역의 중심은 늘 '가정'에 있었다. 깨지고 결핍한 가정에서 자란 내가 행복한 가정을 누리는 것이 풍성한 삶이었다.

내가 동아시아 선교사로 사역한 지 10여 년이 되었을 때, 큰 아이가 고1일 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의 일이 경제적 이슈나 자녀 교육 등의 걱정이 컸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정리했다. 그러나 사역지의 모금 부담을 후임자에게 떠넘기려 하니 그것은 정말로 걱정이었다. 기도 중에 지혜를 주셔서, 그동안 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왕래가 없던 현지 한인교회에 캠퍼스 사역 후원을 부탁하려고 갔는데, 담임 목사님을 만나보니 어릴 때  내 role-model이었던 그 한양대 형이었다. 형이 간증할 기회를 줘서 400명 정도 성도 앞에 섰는데, 눈물만 흘리다가 끝무렵에 현지 캠퍼스 사역 후원을 부탁했고 긴급 당회를 거쳐 후원 약속을 받았다. 내가 한 사역이 결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하심을 깨달았다. 풍성한 삶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동행함을 체험하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실수와 미숙함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어머님이랑 아버님이랑 심하게 다투면 어린 시절 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불 속에서 혼자 흐느껴 울던 그 순간에도 주님은 함께하고 계셨었다. 내가 원하는 환상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삶에는 실수가 없으신 삶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로는 '하나님 나라엔 쓰레기통이 없다. There is no trashbin in heaven.'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쓰레기통에 쳐박고 싶은 사건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사건들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 아니라 고쳐 쓸 수 있는 것들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장애인 누나를 구타했던 그 그 날은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가장 어둡고 수치스럽고 미안한 날이다. 그러나 그날이 아니었으면 내가 죄인인지 알지 못했던 날이었다.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시던 날들은 무섭고 직면하기 싫어 이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는 척 했던 밤들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데 그 사건들로 인해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다. 크레용을 살 돈이 없어서 청소 시간에 남들이 버린 조각을 몰래 주머니에 담았다가 그것으로 미술 시간을 버텼던, 챙피했던 그 사건들이 그 가난이 그 사건들이 쓰레기통에 쳐박고 싶지만 그 사건들로 인해서 가난이 무엇인지 무엇이 사람들 앞에 부끄럽게 살게 되는 요소인지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고통들도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면 비록 고통스럽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이 재해석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의 눈이 열릴 줄 믿는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저와 여러분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해서 오셨다.

[적용 기도]
오늘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들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듯이, 그것이 우리의 동일한 고백일 것이다.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자.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의 인생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해석이 된다. 우리 인생이 저주받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그 모든 것들이 재해석이 된다. 우리가 받았던 상처가 별이 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과거에 매여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알고 자유롭게 되자.
둘째, 그 복음의 광채가 내 가정에, 내 자녀와 가족에게도 비취게 해주소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세요.
세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그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그 삶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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