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변귀숙 원장
사) 애일의 집 원장 https://www.gjw.or.kr/aeil/ (대표: 박태재 애일교회 담임목사, 변귀숙 원장 배우자)
한국 실로암 선교회 설립자
「저 나라에선 나 사슴이 되리」 저자
광주광역시 광산구, 그러나 광주라 하기에는 조금 한적한 곳 덕림동에 애일의 집은 위치하고 있다. 1988년에 설립해서 현재까지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 10명, 여자 19명의 지적장애인을 믿음, 소망, 사랑이란 원훈으로 개인의 재능 창출을 개발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데 큰 비전을 두고 노력하고 있다. 변귀숙 원장은 생후 8개월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전신을 쓰지 못해 휠체어(장애 1급)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삶의 역경을 딛고 일어나 40여 년이 넘도록 복지사역을 실천하면서 애일의 집(지적장애인)을 운영하고 있다. 지적장애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보다 더 따뜻함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할렐루야! 오늘 이렇게 복된 다니엘 기도회 자리에 강사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아버지, 오늘밤, 어리석고 부족한 여종이 여기에 섰습니다. 오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교회와 성도들 특히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앉게만 해주세요, 느끼고 움직이고 싶어요
나는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서거나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며 지난 68년을 살아왔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면 '사슴처럼 뛸 수 있을 것'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후 8개월만에 소아마비로 식물인간처럼 되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였기에 우리나라가 모두 다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사회 환경 속에 있었다.(1955년 1월)
나는 태어날 때는 매우 건강했고 워낙 '실팍(사람이나 물건이 보기에 매우 실하고 튼튼함)'하고 건강해서 우량아 대회에 나가라고 이웃들이 부모님께 권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생후 8개월만에 (나는 1월생인데) 여름철에 (아마도) 뇌염 모기에 물려 일주일간 잠만 자다가 겨우 눈을 떴는데, 그 때 소아마비를 앓아 전신마비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 나는 완전히 방치된 삶을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모두 행상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해서 밖으로 나가 일하셨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아무런 치료나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혼자 누워 지내야 했다. 유아기 때의 내 발은 심하게 뒤틀렸고 전혀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돌파리 의사들의 권유로 침 맞으러 다니고 간혹 여러 한의원을 찾아 다니기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어서, 결국 부모님은 포기했고 나는 방치된 삶을 살아야 했다.
비참한 어린 장애인의 기도에 귀 기울이신 하나님
그나마 감사한 것은 그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이었기에 그 상황 속에서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행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까지 나는 그저 바닥에 누운 채로 기다려야 했다. 누가 먹여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고 대소변도 그냥 내가 누워 있는 이불 위에 배설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나는 날마다 줄곧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며 그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 나를 앉게만 해주세요. 내 몸이 감각으로 느끼게 해주세요. 두 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8세 후반에는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뒤틀렸던 다리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어나 앉게 되니 사는 것이 너무 신났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니 삶에 기쁨이 넘쳤다.
여섯 번의 자살을 시도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소아마비 장애인이었고, 너무 가난한 우리 집에는 장애인인 나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행상을 하던 부모님은 새벽에 나가서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오셨다. 남동생이 둘이 생겼는데 아직 아기들이었지만 부모님들이 집에 안계시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내가 기어서라도 아직 아기인 2명의 남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집에 돌아오시면 따뜻한 위로나 격려보다는 험한 말과 구박을 내게 쏟아내셨다. 내가 성하지 못한 몸으로 동생들을 보살핀 뒤의 그 집안 모습이 오죽 했겠는가? 하루 종일 일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그 난장판을 대하고 치워야 하는 부모님의 속상한 마음도 이해는 된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속상함 속에서 쏟아져 나온 그 저주와 험한 표현들은 내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다.
내가 내 용변을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급적 대소변이 많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며 밥도 잘 주지 않으셔서 서럽고 비참했다. 그래도 부모님이 안계신 낮 동안에는 마음이라도 편했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실 시간만 되면 엄마의 욕을 들을 일이 두려웠고 크게 걱정이 되었다. 심지어 낮동안 나와 동행하는 것 같던 하나님조차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도 내 머리를 자르지도 감기지도 않고 오물이 묻은 내 옷을 갈아 입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온 몸에는 이가 들끓었고 내게는 악취가 진동했다.
너무 내 삶이 비관적이고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했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여섯 번 자살 시도를 했다. 전기 감전, 극약 복용 등의 여러 시도를 했으나 모두 자살 미수에 그쳤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 자살 시도 중에 들은 주님의 음성
1966년도였다. 여섯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광주 호남신학교 목사님께 편지를 써서 '나는 생후 줄곧 장애인으로 살아서 남에게는 별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자살하면 지옥에 가나요?'하고 물었더니, '지옥도 변두리가 있고 중심지가 있는데,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은 지옥의 변두리에 보내진다.'고 답하셨다. 내 삶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에 차라리 죽어서 지옥 변두리라도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남동생들의 문구인 면도칼로 팔을 그으려 했다. 너무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손목을 그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빛 속에서 '돌이키고 돌이키라. 왜 죽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계속 들렸다. 그 음성 속에 계속 울다가 깨어보니 여전히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살아 있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죽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하고, 앞으로는 나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했다.
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사역을 시작하다
나는 지금은 감각은 돌아왔지만 허리는 여전히 거의 없어서 아직도 혼자는 제대로 앉아 있기도 어렵다. 이런 몸이었지만, 나는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장로회 신학교를 통신과정으로 마침) 장애인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는 말씀이 맞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공식적인 학교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지만, 국문 성경은 뜻이 불분명해서 한자 성경을 주로 읽는다. 학교 교육을 못받았지만 독학으로 한자들을 익힌 것이다.
내가 처음 시작한 가내수공업은 '방울베개'를 위한 방울을 만드는 일이었다. 방울 10개에 1원을 받았다. 불편한 몸을 벽에 기대고 일을 해서 겨우 겨우 우표 값을 벌어 모든 신문사/방송사에 글을 보냈는데, 자주 채택이 되어서 원고료도 벌고 수많은 장애인들의 편지도 받았다. 그리고 나도 답장을 하며 서로 동병상련의 사연을 나누다 보니 장애인을 위한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장애인들이 정상인과 살면서 겪는 서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들의 공동체 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973년 21세때 휠체어를 타고 처음 사회로 나왔다. 당시는 몸무게 34kg로 가벼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비교적 쉽게 업어줄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장애인들을 만나 실태 파악을 한 후에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47년 동안 그 사역을 계속 하고 있다.
'영원한 내 다리'를 만나다
이렇게 활동량이 많아지자 남들 도움만 의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산골에 사는 장애인은 만나러 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님께 배우자는 고사하고 그저 '내 휠체어를 밀어줄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영원한 반려자, 박태재 목사님을 보내 주셨다.
박태재 목사와 이룬 아름다운 가정
나는 지난 44년간 변귀숙 원장과 부부가 되어 살고 있는 박태재 목사다. 외모는 젊어 보이지만 이미 5년 전에 은퇴한 원로목사이다.
집사람을 알게 되고 처음 만난 것은 잠시 객지로 나갔다가 내 모교회인 광주 은광교회로 돌아왔을 때였다. 후배(변귀숙 원장의 남동생)의 누나가 장애인으로서 장애인 복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 이동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돕는 마음이 생겨 매 주일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돕기 시작했다.
나는 22세, 변원장은 24세의 젊은 때였는데, 변귀숙 (당시) 회장을 총무로서 늘 업고 다니다보니, 젊은 남녀였기에 마음도 통하게 되었다. 업힌 채로 소변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서로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사연의 시간들을 나누며 사랑이 깊어 갔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던 중에 나는 변기숙 원장과 결혼하여 함께 사역을 하기로 결단을 했다. 배우자에 대해 꿈꿨던 여러 소박한 꿈들이 있었지만 다 포기하고 변 원장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결혼을 강행하면 음독하겠다고 하시며 강력히 반대하셨다. 그 때 나는 광주신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는데, 아버지를 자살로 몰면서까지 결혼을 강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덕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결혼을 무기한 연기하고 6개월 정도 기도하던 중에 1984년 3월 22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정했다. 그리고, 결혼 일주일 전에 아버지를 식당으로 모셔서 대접하고 눈물의 호소를 하니 어렵게 허락을 해주셔서,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 마침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집사람의 몸 상태를 생각할 때 일반적인 임신과 출산은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다지 기대하지 못했던 임신도 하게 되어 겨우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가 장염과 폐렴을 거듭 앓아서 안타까움이 컸다. 또 겨우 아이가 세 살 되었을 때 아이가 오토바이 밑에 깔리는 사고를 겪었는데 아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 때 집사람의 절규가 생생하다. 그렇게 감사와 안타까움 속에서 키워야 했던 그 아이가 이제는 장성해서 38세의 건전한 청년이 되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애일의 집 사역
남편과 함께 사역을 하니 나는 너무 좋았다. '영원한 내 다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남편이 (70세도 되기 전에 60대 초중반에) 원로목사가 된 것은, 내가 섬기는 애일의 집 사역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지금은 애일의 집의 대표로서 여러 행정적인 일들을 맡아 함께 사역을 하고 있다.
남편이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동안에 나는 '애일의 집'을 설립하고 장애인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명으로 시작했다가 60명 정도까지 확장했지만, 지나친 대형 시설은 규제한다는 정부 방침에 의해 30명 미만으로 유지해야 했고, 지금은 29명의 장애인을 애일의 집 사역을 통해 섬기고 있다.
애일의 집 사역을 하면서 셋집살이의 설움을 무척 많이 겪었다. 집주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입주를 먼저 하고 나중에 밤에 장애인 가족들을 불러 들였지만, 결국 알려지면 집주인들에게 혼나며 쫓겨난 일들도 많았다. 다행히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한 사례금도 모으고, 여러 사람들의 후원으로 현재의 애월의 집을 건축하고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
이 밖에도 내가 수술을 6번 한 일과 그 과정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 애일의 집을 짓는 동안에 겪은 사연과 은혜 등 나눌 일이 아직 많은데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이만 줄이려 한다.
그러나 한가지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사슴같이 뛰리라'가 오늘 간증의 제목인데, 장애인의 삶에서 바라보면 사지(팔다리)가 온전하고 몸이 건강한 복이 얼마나 귀한 지 모른다. 그 당연한 일상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나는 몸에 쇠를 삽입하는 등 척추 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다. 그래서 강조해서 말씀드린다.
"내가 건강했을 때 주의 일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봉사하자. 건강한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흘려 보내자. 다른 사람에게 새 희망을 주는 삶을 살자."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귀한 기도회에 부족한 부부를 불러 주셨는데, 사람의 말은 지워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동행만이 드러나고 남도록 해주세요. 온 세계의 소외된 사람들,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비춰 주시옵소서."
김은호 목사님의 정리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장애를 가지고 또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삶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 분들의 삶이 큰 도전을 준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찬양을 하고 기도하자.
- 우리가 앉고 서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우리 삶에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이 있었다면, 이제 감사하는 삶을 살자.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사랑을 흘려 보내는 삶을 살자.
-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251만명의 장애인들이 있다.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까지 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픔 속에 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
- 우리 중에 자살의 충동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할 때 '돌이키라'는 주님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리도록 기도하자.
하나님, 이제는 이 모습 이대로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이 땅의 장애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장애의 고난을 통과하며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이유를 깨닫게 하소서.
많은 성도들이 외로움과 고독과 두려움과 집착 때문에 여러 정신적인 질환을 겪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두려움의 영이 떠나갈지어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흑암의 권세가 떠나가게 하소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사람에게 임하사 '돌이키고 돌이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들을 안아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소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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