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고향에 갔다가 'ㄱ'자형 교회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세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더욱 감동적이어서 나눕니다. 금산사 근처에 시래기탕을 잘 하는 식당이 있어서 부모님, 큰누나 가족, 형님 등이 한 차로 일부러 그 곳까지 갔었는데, 아름다운 저수지 근처에 대형 증산도 시설들이 가득 자리잡고 있어 속이 많이 상한 적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요즘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네요. 또 어렵던 시절 경상도 젊은 분이 전라도에 머슴살이를 와서 겪은 구박'들'이 동서갈등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얘기는 오히려 큰 미담입니다. 그 산골에, 작은 동네에 기독교가 이렇게 크게 영향력을 끼친 것이 제게 너무 큰 감동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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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번지. 모악산(母岳山) 기슭에 소재한 금산교회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예수의 제자들을 배출하였기에 그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도 본받고자 한다.
이곳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진 불교와 증산교, 각종 사교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1904년.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단원으로 레위스 B. 테이트 선교사(한국명:최의덕)가 전주에 들어온 후 정읍까지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 곤했는데,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로 금광과 많은 땅을 소유한 조덕삼(趙德三)의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묵어가곤 했다.
조덕삼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유숙을 원하면, 사랑채에 재우며 배불리 먹여주곤 하였다. 조상대대로 유교를 믿는 보수 가문이었지만 격의가 없고 개혁적인 성품으로 서양선교사와 어울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마방에 묵고 있던 테이트를 청해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내 놓았다.이 날 예배에 참석했던 교인들은 조덕삼 부부와 아들 조 영호를 비롯해 그 집에서 일하고 있던 머슴 이자익,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 10여명이었다.
10월11일에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3명이 최초로 세례를 받고 (세례교육은 전주서문교회에서 받음) 성찬식을 거행했다. 머슴 이자익은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자 호구지책으로 고향 경남 남해를 떠나 곡창지대인 김제로 찾아왔던 것이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지만 총명하여 조덕삼 집에 마부(馬夫)로 있으면서 틈틈이 독학을 했고 주인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뒤 조덕삼과 이자익은 힘을 모아 금산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1907년 두 사람은 금산교회의 영수(領袖:오늘날 집사)로 임명되었다. 교인수가 200명을 넘자 장로를 뽑는 투표를 하였다.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반상(班常)의 법도가 엄연했던 시대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큰 술렁임이 일었다. 그러자 조덕삼 영수는 곧바로 일어나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사랑하셔서 젊은 일꾼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자익 장로께 축하의 박수를 드립시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자익 장로가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땐 조덕삼 영수도 함께 예배를 드렸다. 집에서는 다시 주인과 머슴으로 돌아갔다. 공과 사가 분명했다. 반년 뒤 조덕삼 영수가 2대 장로로 장립된다.
조덕삼 장로는 교인들과 함께 이자익 장로의 평양신학교 입학(1910년)을 기도와 물질로 도왔다. 1915년 제 8회 졸업으로 목사안수를 받자 조덕삼 장로는 곧 바로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빈했고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케 한다.
조덕삼 장로는 교회부설 유광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1919년12월27일,52세로 소천), 아들 조영호는 조직한 청년회와 축구부 활동으로 일대에 큰 명성을 떨쳤으며, 여자 반을 특별히 따로 마련해 한글과 한국역사와 성경을 가르쳤다.
한글을 모르면 학습과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뒤를 이어 6대 장로와 유광학교 교장을 맡아 섬겼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가는 바람에 아버지의 임종은 지키지 못하였고, 그도 금산교회의 장로로서 봉사하다가 1949년 53세에 과로로 소천했다.
100년 역사를 지키고 있는 ‘ㄱ자 예배당’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1990년대에 조영호장로의 큰 아들인 조세형 의원이 서두르기는 했지만...^^) 한국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결합시켜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과정을 살필 수 있는 구조를 지닌 건물로 판정받았기 때문이다.
교회 내부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강단의 좌측은 여자성도들이 앉는 자리이며, 정면은 남자들이 앉는 자리로 구별되어있고 사이엔 커튼을 치게 되어있다. 男女七歲不同席이 철저하게 지켜지던 시대의 모습이다.
2005년 4월 19일 대전 신학대학 설립자이신 이자익 목사 기념현판식및 전기 출판식 행사 때였다.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전 국회의원,주일대사 역임)장로가 축사를,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대덕 연구원 공학박사,중국연변과기대 교수) 장로가 인사말을 맡았다. 이규완 장로는 그 많은 사람가운데서 조세형 장로에게 가서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못 만났다면 오늘날 우리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 계십니다”라고 존경을 표한 뒤 끝말에 “우리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업적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잘해서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할아버지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100년 전 선조의 신앙을 후손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섬기는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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