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기억
(무대에는 소박한 지방 소도시 작은 아파트 내부가 보인다. 식탁 위에는 단출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이 놓여 있다. 노모와 아들이 마주 앉아 있다.)
노모: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이 김치찌개.... 맛있긴 한데 좀 맵네. 딸 셋 낳고 겨우 얻은 우리 아들이 이걸 환장하게 좋아했지."
아들: (잠시 멈칫하며 노모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는다)
"그 아들 녀석 말이예요? 자기 엄마가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기똥차게 잘한다고 아주 지겹도록 자랑하더군요. 늘 입에 침이 말랐어요."
(노모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조용히 지켜본다. 창밖으로 저녁볕이 검게 드리운다.)
2막: 옛 사진첩
(무대가 바뀌어 현관 옆 작은 방 한쪽 귀퉁이. 노모가 쪼그려 앉아 낡은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들이 다급히 등장한다.)
아들: "어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 날도 꾸물꾸물하고 쌀쌀한데, 얼른 안방으로 가요."
노모: (사진첩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우리 아들 참말로 고생 많지?... 내가 제때 예수님 품으로 갔으면 우리 아들도 훨씬 편했을 텐데. 바쁜 사람이 늘 집에 오느라.... 애쓴다."
아들: (억지로 웃으며)
"월래? 우리 엄마 오늘따라 정신 맑으시네요? 그런 말씀 그만하고, 제 이름 한번 불러 보세요. 이 아들 이름 석 자, 아직 기억하고 계신가~?"
(노모는 흐릿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한다. 아파트 화단 나무 이파리가 여름밤 사이로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노모가 천천히 혼자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린다. 아들이 얼른 다가가 부축한다.)
노모: (힘겹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우리 아들... 김O생... 내가 참말로 사랑해요..."
(아들은 순간 멈춰 서고, 눈물이 고인다.)
3막: 남겨진 이름
(무대는 다시 아파트 안으로 바뀐다. 시간이 흘러 노모는 세상을 떠난 뒤다.
아들은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어머니의 낡은 개량 한복 한벌을 붙잡고 있다.)
아들: (어머니 옷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어머니... 이제 엄마보다 제가 더 오래 살았네요..."
(아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무대 위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위로 노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노모의 목소리: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우리 O생이... 내가 참말로 사랑해요."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고, 무대에는 나뭇가지와 흔들리는 잎사귀만 남는다.)
에필로그
(배경 음악이 잔잔히 흐른다. 내레이션이 깔린다.)
기억은 시간보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그 아파트에는
비록 모든 걸 잊었어도 자식 이름 석 자만큼은, 그 아들의 염치없이 웃는 그 미소는,
영겁의 시간인들 단 한 줌도 내버리지 않았을 어머니가 살았었다 했다.
(무대는 완전히 암전된다.)
앞집에는 지독한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와
그에 버금가는 주름이 손금인 듯 묻어있는
다 큰 아들 하나가 오손도손 살았었다 했다.
매 끼니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다리를 휘청거리게끔 하는 아들이
그날은 짭조름한 박대젓을 식탁에 올렸다.
노모는 한 입 맛보더니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하나뿐인 아들놈이 이걸 억수로 좋아해요 했고
흐를 듯한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던 아들은
그 아들놈 저 엄마가 박대젓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지겹도록 자랑합디다 했다.
저승 같은 저녁볕이 검게 검게 드리우던 날
방심한 아들의 시선에서 가뭇없게 사라져 버린 노모가
마당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옛 사진첩
이렇게 들여다보며 매달린 시절들을 닦아내고 있었다.
어머니 왜 여기 나와서 있습니꺼
어두컴컴하고 날 추운데 그만 들어갑시다.
니 참말로 고생 많제
내가 제때 죽었으면 니도 한결 편했을 텐데.
워메, 우리 어무니 간만에 정신 멀쩡하시네
시답잖은 말 그만하고 내 이름 한번 불러 봐요
이 아들래미 이름 석 자 여태 기억 하나 보게.
초령목 이파리들 여름밤 사이로 제철인 듯 흔들리고
노모는 힘겨운 듯 몸을 일으키다 한번 휘청.
우리 아들래미 김봉철 제가 억수로 사랑해요 했다.
기억이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마을에는
비록 저 이름 남김없이 모두 잊었어도
자식새끼 이름 석 자만큼은 영겁의 시간인들
단 한 줌도 내버리지 않을 노모가 살았었다 했다.
이제 당신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습디다.
어찌 된 일인지 홀로 남겨진 다 큰 아들 하나가
어무니, 하고 낡은 치맛단에
얼굴을 파묻고서 진종일 울었다.
<누군가 기억하는 이름과 이야기>, 하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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