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의 페북에서 최근에 이 분의 책들에 감동이 깊다는 글을 읽고 찾아보았습니다.
전통적인 '수직적 읽기'(하나님-인간관계 중심)를 넘어 '수평적 읽기'(인간-인간, 인간-창조세계 관계 중심)를 제안하며, 성경 본문에 질문을 던져 깊이 있는 성찰을 돕는 접근이 특징입니다. "성경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며, 텍스트·콘텍스트·독자 자신을 고려한 입체적 읽기로 인도합니다. 창세기의 익숙한 본문들에 낯선 질문을 던져, 관계와 책임, 정의와 폭력, 죄와 회복을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다시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책의 큰 구조 요약
1장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 창세기 1-3장
2장 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 창세기 3-5장
3장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 창세기 · 6-9장
4장 바벨탑은 왜 무너졌는가 창세기 · 10-11장
5장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는가 · 창세기 18-19장
6장 거룩이란 무엇인가 · 수평적 읽기의 확장
나가며: 예수님의 새 계명은 무엇이 새로운가
창세기 1–3장: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 ‘다스림’의 참된 의미를 묻습니다.
창세기 3–5장: 죄를 개인의 도덕 문제로만 볼 것인지, 관계의 파괴와 폭력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것인지 두 관점을 대비합니다.
창세기 6–9장: 홍수 사건을 단순 심판 서사가 아닌,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의와 생명을 어떻게 지키시는지 묻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창세기 10–11장: 바벨탑을 ‘교만에 대한 벌’이라기보다, 힘이 집중된 도시 문명과 흩어짐의 의미(다양성과 분산)에 대한 질문으로 풀어냅니다.
아브라함·소돔과 고모라 등 족장 이야기: 하나님–개인만이 아니라, 도시와 사회, 약자,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인’과 ‘정의’를 다시 묻습니다.
핵심 주장 정리
- 성경은 답집이 아니라 질문집:
“성경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라는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며, 좋은 질문을 던지는 연습이 곧 신앙 성숙이라고 본다. - 수직·수평 읽기의 통합: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강조하는 수직적 읽기에,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묻는 수평적 읽기를 더해야 성경이 입체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 낯설게 읽기:
너무 익숙해서 질문하지 않았던 본문(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 바벨탑, 소돔 등)을 고대 근동 맥락과 원어의 뉘앙스를 활용해 ‘낯설게’ 읽어, 전통 해석의 사각지대를 드러낸다. - 관계와 책임의 강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옳은 교리만 가진 개인’이 아니라, 서로와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공동체이며, 그 안에서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 해석의 빈틈을 인정하기:
성경에는 일부러 남겨 둔 여백과 빈틈이 있으며, 그 속으로 들어가 상상력과 질문을 사용해 대화하듯 읽는 것이 건강한 성경 읽기라고 제안한다.
창세기 1~3장
창세기 1–3장을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으면서, 1장과 2–3장의 두 창조 이야기가 서로 다른 초점을 가진 두 개의 렌즈라고 설명합니다. 한쪽은 인간의 존엄과 권위를, 다른 한쪽은 흙에서 온 존재로서의 연대와 책임, 관계의 파괴(죄)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존엄과 통치의 소명
하나님은 말씀으로 질서를 세우며, 혼돈과 어둠의 상태를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정돈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며, 땅을 정복하고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소명을 받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장은 인간에게 존엄과 권위(통치의 위임)를 강조하는 수직적 서사로, 하나님–인간–피조 세계의 위계와 책임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렌즈로 제시됩니다.
1절: “태초에”와 “창조하시니라”
“태초에”는 히브리어 베레시트(בְּרֵאשִׁית)로, ‘시간이 시작되는 역사적 출발점’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개시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창조하시니라”의 동사 바라(בָּרָא)는 주어가 항상 하나님인 특수 동사로, 인간이 하는 ‘만들다’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해석됩니다.
2절: 토후·보후와 질서 세우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의 토후(תֹּהוּ)와 보후(בֹּהוּ)는 형체 없고 비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며, 아직 질서와 채움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정형의 세계’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설명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1–3일은 ‘형태를 부여’(빛/하늘·바다/땅), 4–6일은 ‘그 공간을 채우는’(광명체/새·물고기/짐승·인간)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강조되며,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패턴이 두드러집니다.
말씀으로 창조: 고대 근동 문맥
고대 근동의 많은 신화(예: 에누마 엘리쉬)는 신들의 전쟁·폭력 속에서 세계가 생겨나지만, 창세기 1장은 전쟁이 아니라 말씀으로, 저항 없는 통치 행위로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대조적으로 서술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창 1장은 ‘여러 신들 중 하나의 승리담’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혼돈을 질서 있게 정리하고 생명이 거할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하는 주권적 통치 선언으로 읽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 역할 중심 개념
“하나님의 형상(צֶלֶם 엘로힘)”은 단순히 이성이나 도덕성 같은 추상적 속성이라기보다, 고대 근동 왕이 신의 형상으로서 통치를 위임받았던 개념과 연결해 대표·대리 통치자의 역할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창세기는 이 ‘형상’ 지위를 특정 왕에게만 주지 않고 남녀 모두에게 확대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이자 피조세계 관리자로 세우는 급진적인 선언을 담고 있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창세기 2장: 흙과 관계, 돌봄의 소명
2장에서는 인간이 흙(아다마)에서 빚어진 존재로 등장하며,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부르심을 통해 땅과 긴밀히 연결된 존재로 드러납니다.
남녀는 한 몸의 동반자로 등장하지만, 1장에 비해 평등성은 다소 완화되고, 대신 인간–자연의 밀접한 연대와 상호 의존성이 강조됩니다.
이 장은 인간을 통치자라기보다 돌봄과 보존의 책임을 맡은 존재로 보여 주며, 피조 세계와의 수평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 렌즈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3장: 원죄보다 ‘관계 파괴’
전통적으로 3장은 ‘원죄의 기원’으로 읽혀 왔지만, 이 책은 선악과 사건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동시에 깨지는 이야기로 조명합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은 뒤 벌어지는 숨음, 책임 전가, 땅의 저주 등은 단순 불복종 이상의, 관계의 붕괴와 신뢰 상실, 피조 세계와의 단절을 드러내는 징후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죄는 한 번의 규칙 위반이라기보다, 수평·수직의 모든 관계가 틀어지는 사건이며, 이후 가인–아벨, 폭력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서막으로 이해됩니다.
1–3장이 함께 주는 메시지
창세기 1장은 “인간은 존귀한 통치자”라는 관점, 2장은 “인간은 흙과 연결된 연대의 존재”라는 관점, 3장은 “그 관계가 어떻게 깨졌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서로를 보완합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예배·신뢰)와, 땅·다른 피조물과의 관계(가꾸고 지키는 책임) 안에서 맡겨진 자리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수평적 읽기 예시
수평적 읽기는 “하나님–나”를 넘어서, “나–타인–피조세계”의 관계와 구조를 보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선악과와 원죄: ‘불복종’에서 ‘관계’로
전통 수직 읽기: 선악과 =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복종, 개인의 죄와 원죄 교리의 출발로 읽습니다.
수평 읽기 예시:
누가 누구를 어떻게 탓하는가(책임 전가), 남녀 사이에 어떤 균열이 생기는가, 인간과 땅·피조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죄를 “규칙 위반”이 아니라 신뢰 붕괴, 타자에 대한 두려움, 피조세계에 대한 착취적 태도의 시작으로 읽으며, 우리 사회의 불신·젠더 갈등·환경 파괴까지 연결해 질문합니다.
가인과 아벨: 제사보다 폭력의 구조
전통 수직 읽기: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어떤 예배가 하나님께 더 합당한가”에 초점이 갑니다.
수평 읽기 예시:
“동생을 향한 분노와 질투가 어떻게 폭력으로 비화하는가”,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때, 이 질문은 지금 서로를 죽이는 우리 사회에 어떻게 울리는가”를 묻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말에서, 서로를 돌보는 책임을 회피하는 현대인의 태도(무관심, 구조적 폭력)를 들춰내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기사에서 ‘폭력의 한계선’으로
전통 수직 읽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의인 노아의 구원”에 집중합니다.
수평 읽기 예시:
왜 하나님이 “땅이 폭력으로 가득함”을 문제 삼는지, 인간의 폭력이 어디까지 가면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지에 대한 사회적 질문으로 확장합니다.
방주 밖의 다수와 안의 소수라는 대비 속에서, 재난·전쟁·기후 위기에서 누가 더 취약하고, 그 구조적 폭력 앞에 신앙 공동체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묻습니다.
바벨탑: 교만에서 ‘집단 욕망과 분산’으로
전통 수직 읽기: “하나님께 도전한 교만한 인간들에 대한 징계”로 요약합니다.
수평 읽기 예시:
“온 지면에 흩어지기 싫다”는 말에 담긴, 한 곳에 자본·권력·명성을 집중하려는 집단 욕망을 읽어냅니다.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흩으시는 사건을,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을 회복하고, 권력 집중을 깨뜨리는 ‘분산의 은혜’로 읽으며 오늘의 도시 개발·제국주의·글로벌 자본을 비추는 거울로 사용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특정 죄악에서 ‘도시의 비-환대’로
전통 수직 읽기: 주로 성적 죄악, 특히 특정 성적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수평 읽기 예시:
창 18–19장 전체를 묶어, 아브라함의 중재, 손님 대접,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도시, 낯선 이를 폭력으로 맞는 군중 심리를 함께 읽습니다.
소돔을 “타자에게 극도로 비-환대적인 도시, 권력과 군중 폭력이 응축된 공간”으로 보며, 난민·이주민·사회적 약자를 향한 현대 도시의 태도를 성찰하게 합니다.
수평 읽기가 노리는 변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수직)”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가 서로에게, 피조세계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수평)”를 함께 물어야 비로소 거룩이 직조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삶의 수직·수평 관계가 함께 직조될 때, 교리 암기형 신앙을 넘어, 관계·정의·환대·환경 책임까지 포함하는 공적 거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수평적 읽기의 목표입니다.
창세기 3–5장: 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 개의 다른 렌즈(수직·수평)로 보여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는 전통적 정의,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한 폭력과 불의’라는 확장된 정의입니다.
1. 수직적 관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기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느냐 어기느냐.
창 3장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는 행위, 창 4장에서 가인이 하나님의 권면을 듣지 않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결과: 죄 → 벌이라는 구조.
에덴 추방, 땅의 저주, 노동과 출산의 고통, 가인의 유리 방랑 등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에 따른 형벌로 이해됩니다.
이 관점은 지난 2,000년 동안 성경 해석의 주류였고, 하나님–인간 사이의 명령·순종·심판 구도를 분명히 세워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합니다.
2. 수평적 관점: 폭력·불의·관계 파괴
출발점 질문: “성경이 ‘죄’라는 단어를 처음 어디에 붙이는가?”
“원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창 3장 본문에는 ‘죄’(하타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오히려 형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인 창 4장 가인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죄의 내용: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 그치지 않고,
형제 살해(가인–아벨),
책임 전가와 무관심(“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점점 확대되는 폭력과 복수(라멕의 노래)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폭력·불의·관계 붕괴가 죄의 본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정의 확장:
그래서 이 책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불의와 폭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라고 요약합니다.
3. 창 3–5장에 던지는 핵심 질문
창 3장(선악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가 깨질 때, 그 파열은 부부 관계·노동·출산·피조세계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 내는가?”
창 4장(가인과 아벨):
“왜 성경은 ‘죄’라는 단어를 형제 폭력 장면에 처음 붙이는가?”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를 향해 들리는가?”
창 5장(족보):
“죄가 개인 사건을 넘어 세대와 구조 안으로 어떻게 스며드는가?”
반복되는 ‘죽었다’라는 후렴 속에서, 폭력과 단절의 역사가 축적되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4. 두 관점을 함께 볼 때 생기는 통찰
수직: 죄 = 하나님께 등을 돌린 상태 → 회개와 용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핵심 과제.
수평: 죄 = 이웃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과 불의 → 화해, 책임, 정의, 약자 보호가 필수 과제.
이 책이 제안하는 지점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가 아니라, 두 관점을 함께 볼 때 거룩이 개인 경건(수직) + 관계·정의(수평)가 동시에 직조된 상태라는 것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6–9장: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
“홍수는 하나님의 기분 나쁨 때문이 아니라, 폭력이 극한에 이른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노선’ 개입인가?”라는 질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야기를 ‘재난 묘사’보다 “폭력과 정의, 그리고 새 출발”에 대한 텍스트로 다룹니다.
왜 홍수가 일어났는가
본문 핵심 구절은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폭력)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13)입니다.
책은 여기서 홍수의 직접 원인을 ‘일반적 죄악’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 영역을 뒤덮은 폭력과 불의의 구조로 읽습니다.
하나님은 임의로 진노한 게 아니라, 더 이상 방치하면 피조세계 전체가 파괴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수직적 읽기: 타락 → 심판
전통적 관점은 “인간이 악해졌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셨다”는 수직적 구도로 정리합니다.
이 관점에서 초점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그리고 노아의 의로움(“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에 맞추어집니다.
수평적 읽기: 폭력의 임계점
수평적 읽기는 “왜 ‘폭력’이 홍수의 직접 사유로 반복되나?”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힘 있는 자들의 약자 착취, 구조화된 불의(부패·강포), 피조 세계 전체가 인간의 죄에 끌려 들어가는 현실(모든 생물의 타락)입니다.
따라서 홍수는 “나쁜 개인들에 대한 감정적 보복”이라기보다, 폭력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수준까지 누적되었을 때, 하나님의 긴급 제동으로 제시됩니다.
홍수 이후: 새 창조와 제한
홍수 후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며, 다시는 같은 방식의 홍수로 온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동시에 창 9장에서 인간에게 피 흘림에 대한 강한 경고(“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사람에게 흘림을 당하리니”)를 주어, 폭력에 대한 한계선을 명확히 긋습니다.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폭력으로 가득한 땅’은 어떤 모습인가?”(전쟁, 가정폭력, 경제적 착취, 환경 파괴 등)
“하나님은 지금도 어떤 방식으로 폭력의 구조를 멈추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가?”
짧게 말하면, 이 책은 노아 홍수를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극단적 ‘아니요’와, 그 이후 은총과 자비의 새 질서를 여는 사건”으로 읽게 해 줍니다.
홍수 이야기를 과거 재난 서사가 아니라, 전쟁·가정폭력·경제적 착취·환경 파괴 등 현대의 폭력 구조를 비추는 거울로 읽자는 것이 수평적 독해의 방향입니다.
창세기 10–11장: 바벨탑
바벨탑 이야기는 이 책에서 “하늘 도전 교만”보다 권력·안전·명성의 집중을 향한 집단 욕망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읽힙니다. 그래서 왜 무너졌는가 보다 “무엇을 위해 그 탑을 쌓았는가, 누구를 향한 이야기인가”를 묻도록 이끕니다.
핵심 구절과 질문 포인트
“우리가 성과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왜 이들은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가?”, “왜 한 도시, 한 언어, 한 프로젝트에 모든 힘을 몰아넣으려 하는가?”입니다.
수직적 읽기 :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는 교만, 자기 이름 높이기 교만에 대한 징계, 언어 혼잡과 흩어짐은 벌
수평적 읽기 : “흩어짐을 면하자”
흩어지기 싫어 권력·자원·명성을 한곳에 집중하려는 집단 욕망, 제국화의 시작.
언어 혼잡·흩어짐 = 권력 집중을 깨고 다양성과 분산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개입
도시와 탑 자체가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고”(명성 독점),
“흩어짐을 면하자”(집중·동질성 유지)가 결합될 때 생기는 제국적 도시가 문제라고 읽습니다.
자본·권력·기술이 한 축에 몰려 주변부·소수·다양성을 지우는 현대 도시와 국가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로 제시됩니다.
언어의 다양화와 인류의 분산은 권력 집중을 막고, 문화·언어의 다양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브레이크’로 읽힙니다.
하나님은 한 언어·한 도시·한 이름 아래 묶인 제국의 꿈을 깨뜨리고, 여러 민족과 언어가 공존하는 세계를 다시 여는 쪽에 서 계신다는 메시지가 부각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우리 시대의 바벨탑은 어디에서, 어떤 이름으로 쌓이고 있는가?”(초대형 도시, 특정 국가·기업·교단, ‘브랜드’ 등).
“흩어지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언어·문화가 지워지거나 희생되고 있는가?”
아주 짧게 정리하면, 저자가 제시하는 바벨탑 수평 읽기는 “하나님께 덤빈 탑 이야기”가 아니라, 집중과 동질성을 추구하는 제국적 도시 욕망에 맞서 다양성과 분산을 회복시키는 하나님 이야기로 보는 읽기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 등 족장 이야기
이 책에서 족장 이야기(특히 아브라함과 소돔·고모라)는 “하나님–개인”을 넘어서 도시·약자·폭력·정의를 묻는 장으로 읽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공동체”의 모델로, 소돔은 나그네와 약자를 짓밟는 도시의 상징으로 제시됩니다.
아브라함: 정의와 공의를 맡은 사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며 “그로 하여금 자녀와 권속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창 18장).
이 책은 아브라함의 소명 핵심을 “믿음 좋은 개인”보다, 정의·공의를 실천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으로 읽고, 신앙의 수평적 책임(공적 정의)을 강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가 아니라 폭력과 비-환대
전통적으로 소돔의 죄를 “동성애”로만 좁혀 읽어 왔지만, 이 책은 창 18–19장을 함께 보면서 집단 폭력과 나그네·약자에 대한 비-환대에 초점을 둡니다.
낯선 이(천사)를 집단적으로 성폭행하려는 시도, 나그네를 지키려는 롯과 그 가족에 대한 폭력, 도시 전체의 타락한 여론 구조가 “정의와 공의를 상실한 도시”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 몇 명의 ‘의인’인가
아브라함의 중보(“의인 50명…10명까지”)는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단지 “얼마나 많이 죄 지었나”가 아니라, 그 도시 안에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의인의 ‘핵’이 남아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책은 여기서 “의인 몇 명”을 추상적 경건인이 아니라, 약자와 타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사람들로 이해하며, 도시·사회 속 ‘공의의 소수’의 역할을 묻습니다.
소돔 vs 아브라함 공동체의 대비
소돔: 나그네·약자를 폭력으로 짓밟고, 군중이 한마음으로 악에 동참하는 도시.
아브라함 공동체: 나그네에게 떡과 물과 쉼을 제공하며(창 18장 손님 접대), 하나님 앞에서 다른 도시를 위해 중보 하는 공동체.
이 대비를 통해, “거룩한 공동체”는 성적 순결만이 아니라 폭력을 거부하고 약자를 환대하는 집단이라는 수평적 거룩의 그림이 제시됩니다.
오늘을 향한 질문
“지금 내가 속한 도시와 교회는 소돔 쪽인가, 아브라함 쪽인가?”
난민·이주민·가난한 이·소수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실제 환대와 안전을 제공하는지 묻도록 이끕니다.
“아브라함처럼, 내 시대의 도시들을 위해 정의와 공의를 구하며 중보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족장 이야기의 수평적 결론으로 제시됩니다.
사회적 맥락에서 본 두 사람
아브라함:
분쟁 상황에서 양보와 분산을 선택하고, 나그네로 살면서도 타자를 환대하며, 이후 소돔을 위해 중보 하는, 정의·공의를 위해 도시 밖에서 도시를 끌어안는 인물로 비칩니다.
롯:
아브라함의 보호 안에서 부를 얻고, 이후 경제적 풍요를 따라 도시로 들어가지만, 그 도시 구조가 가진 폭력·비-환대에 휩쓸려, 결국 가족과 재산 대부분을 잃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롯 관계의 사회적 맥락은
“부와 공간이 늘어날수록 생기는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
“도시의 번영과 약자의 안전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나그네/이방인을 환대하는 공동체 vs 짓밟는 도시 중 어디에 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관계·도시·경제를 둘러싼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게 만든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거룩”을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웃·공동체·피조세계와의 수평 관계까지 아우르는 삶의 상태로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의 정의: 수직 + 수평이 직조된 삶
전통적으로 거룩은 “위로부터 오는 명령에 대한 순종, 죄짓지 않는 상태” 같은 수직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간과 인간·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가 정의·공의·환대로 세워진 상태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거룩한 삶이라는 직물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의 수직 차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교만 대신 겸손·순종을 선택하는 태도는 여전히 거룩의 필수 조건으로 인정합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나 사이의 개인 경건”에 갇히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의 폭과 깊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거룩의 수평 차원: 관계·정의·환대
아담–하와, 가인–아벨, 노아 세대, 바벨탑, 소돔·고모라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폭력·불의·비-환대·착취가 거룩의 정반대에 서는 수평적 죄의 모습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거룩은 곧, 이웃과의 관계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약자와 타자를 환대하며, 피조세계를 돌보고 책임지는 공동체적·사회적 상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날실과 씨실” 비유
“삶의 수직적 관계가 날실, 수평적 관계가 씨실이 되어 거룩한 삶이라는 직조물이 짜인다”라고 설명합니다.
어느 한쪽 실만으로는 천이 되지 않듯, 수직만 있고 수평이 없는 신앙, 수평 실천만 있고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가 없는 윤리도 완전한 거룩이 될 수 없다는 균형을 강조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바로 이 수평적 거룩(관계·정의·환대)을 집약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
예수님의 새 계명: 무엇이 ‘새로운가’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장)은 “서로 사랑하라”인데, 이미 율법에도 있던 사랑 계명인데 왜 ‘새’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수직 계명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방식으로, 수직 계명의 자리를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대체하십니다.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의 재배치
“하나님 사랑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진짜 하나님 사랑이며, 여기서 수직과 수평이 하나로 묶입니다.
예수님: 수평적 거룩의 모델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기도, 순종)라는 수직, 죄인·병자·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식탁 교제하고 회복시키는 수평을 동시에 드러낸 거룩의 완성된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거룩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 곧 타자를 환대하고, 낮은 자의 편에 서고, 폭력과 배제를 거부하는 구체적 관계 방식으로 구체화됩니다.
창세기에서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질문
책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제목처럼, 창세기의 질문들(인간은 왜 있는가, 폭력과 도시, 의인과 정의)이 결국 예수님의 질문과 새 계명에서 다시 울린다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답집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살도록 이끄는 질문의 책으로 받아들일 때, 창세기 읽기가 오늘 나의 제자도와 직결된다고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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