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 무관심과 구조적 폭력의 시대에 다시 묻는 가인의 질문
성경에서 가장 뻔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창세기 4장 9절에 등장합니다.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내뱉은 말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태도이며,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는 무관심의 언어입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가인
오늘의 가인은 돌을 들지 않습니다. 칼을 휘두르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거리의 노숙자를 보지만 시선을 돌리고, 불공정한 구조를 알지만 침묵하며, 고통받는 이웃의 삶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만든 구조가 아닙니다.”
- “나 하나 착하게 산다고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 “그건 국가나 제도의 문제입니다.”
그의 손은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오늘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구조적 폭력 속의 아벨들
오늘날 아벨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 최저임금 아래에서 일하다 병든 노동자로
- 교육과 기회의 사다리에서 밀려난 아이로
- 전쟁과 기후위기로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으로
이들은 한 번에 살해되지 않습니다. 대신 천천히, 합법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방식으로 소멸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오늘날 그 피의 소리는 통계 수치로, 뉴스 하단 자막으로, 보고서의 각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질문하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살인자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보고도 외면한 사람, 알면서도 침묵한 사람, 안전한 자리에서 구조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인의 대답이 다시 떠오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요?”
침묵은 중립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무관심은 무죄가 아닙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닙니다.
오늘의 가인은 잔혹한 악인이라기보다 편안한 사람입니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책임은 행동뿐 아니라 태도로도 물어집니다.
다시 던져지는 질문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질문은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네가 외면한 그 사람은
정말 네 아우가 아니었느냐?”
신앙은 예배의 횟수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언어로만 평가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서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가인처럼 대답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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