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성경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는 우리말로 또는 영어로 번역된 말씀을 통해 성경을 만납니다.
그런데,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라, 의미를 선택하고 강조하는 해석의 과정입니다.
그 결과 어떤 단어들은 신앙의 핵심 언어가 되었고, 어떤 개념들은 본문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신앙을 규정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과 번역자들은 낯선 성경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문화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하느님', '제사(예배)', '복'이라는 옷을 입혔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기독교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때로는 그 옷(문화적 익숙함) 때문에 본질(성경의 원뜻)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성숙했습니다. 익숙한 단어 너머에 있는 본래의 뜻을 궁금해해야 할 때입니다.
'복'을 달라고 빌기 전에, 그것이 현세의 성공인지 하나님과의 동행인지 물어야 합니다. '천국'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발 디딘 이곳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 번역이라는 '손가락' 끝에 머물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진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회개’는 감정일까, 방향 전환일까
한국 교회에서 ‘회개’는 대개 눈물, 후회, 죄책감과 함께 이해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핵심 단어는 헬라어 μετάνοια (메타노이아)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생각과 방향의 전환입니다. 즉, 회개는 “마음이 아파지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번역어는 윤리적·정서적 반성에 무게를 두며 행동과 방향의 변화를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회개 = 감정적 사건처럼 되었지만, 성경 본문은 '회개 = 삶의 전환'입니다.
2. '복(福)' : 현세적 '성공' vs 하나님과의 '관계'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은 히브리어 בְּרָכָה (베라카, 구약 Barak/ 신약 Makarios)입니다. 구약의 복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관계를, 신약의 복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상태'를 뜻합니다. 즉, 성경의 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생명, 번성, 보호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나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복’은 이미 일상 언어에서 돈, 성공, 형통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복은 장수, 부귀, 강녕 등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성경의 복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결과와 성취 중심으로 이해되기 쉬워졌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은 "예수 믿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자식 잘되는) 복 받으세요"로 통용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도왔지만, 동시에 기독교를 물질적 성공 수단으로 여기게 만드는 '기복 신앙'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복 = 잘됨'으로 이해되지만, 성경 본문의 의미는 '복 =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입니다. 돈, 건강, 성공 (소유) 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 / 관계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상태가 복입니다.
3. ‘은혜’는 왜 너무 추상적인가
‘은혜’는 한국 교회 신앙 언어의 핵심이지만, 정작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단어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은혜는 헬라어 χάρις (카리스)입니다.
이 단어는 호의, 선물, 관계적 호혜라는 구체적인 맥락을 가진 단어인데, ‘은혜’라는 한자어 번역은 의미를 너무 압축해서 막연하고 신비적인 개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즉, '은혜 = 느끼는 것'이 일반적 의미지만, 성경 본문의 의미는 '은혜 =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4. '죄' (Hamartia): 관계의 단절 vs 도덕적 범죄
성경의 ‘죄’는 단일 어휘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는 하타(חטא): 과녁을 빗나감, 아본(עון): 뒤틀림, 페샤(פשע): 관계 파괴, 반역 등 다양한 단어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Hamartia)'입니다.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국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이 단어들이 하나의 말, 법률적/도덕적 용어인 '죄(罪)'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는 관계의 문제라기보다 규칙 위반, 법적 문제로 인식되기 쉬워졌습니다. 즉, 성경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붕괴'이지만, 우리말 번역 후의 죄는 '도덕적 실패'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 신앙 정서에서 '회개'는 관계의 회복보다는 "내가 지은 도덕적 잘못을 씻는 것"이나 "벌을 면하는 것"에 더 집중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죄책감(Guilt)이 신앙의 주요 동력이 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는 착한 일을 안 한 게 아니라,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입니다.
5. ‘구원’은 왜 죽은 뒤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구원’ 역시 매우 신앙적인 단어지만, 현실과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원(히브리어 예슈아, 헬라어 소테리아)은 현재, 공동체, 삶의 회복을 포함하는 현장적 개념입니다.
출애굽도, 예수의 사역도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해방과 회복이었습니다.
즉, 우리말 번역이 만든 신앙 언어의 '구원 = 사후 보장'은 원래 성경 본문의 의미로는 '구원 = 지금 시작되는 회복'입니다.
6. '하나님' vs '하느님' (신명 호칭의 토착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당시, 선교사들은 성경의 '엘로힘(Elohim)'이나 '데오스(Theos)'를 번역할 단어를 찾았습니다.
중국/가톨릭은 '천주(天主, 하늘의 주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초월적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한국 전래 무속과 민속 신앙에 존재하던 '하늘님(천신, Sky God)' 개념을 차용하여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 덕분에 기독교는 서양의 낯선 종교가 아니라, "원래 우리가 알던 그 하늘의 절대자"로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일신 사상("하나"님이시다)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신명호칭 논쟁
1880년대 초 한국어 성경 번역에서 '하느님'(하늘님 변형), '하날님', '상제' 등이 혼용되었고, 1883년 요한복음에서 처음 '하나님'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평안도 방언 '하날 + 님'에서 유래한 것으로, 숫자 '하나 + 님'이 아닌 하늘의 만주지역 평안도 사투리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선교사들 간에도 언더우드(천주 주장)와 게일(하나님 주장, 주시경 영향)처럼 의견이 갈려 마찰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天主)'를 고수하며, 개신교가 이를 따라 하자 반발해 폭력 충돌(1891년 황해도 재령 사건 등)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개신교는 '천주'를 피하고 '하나님'이나 '하느님'으로 독자 용어를 정착시켰습니다. 조선 천주교도들은 개신교를 이단으로 여겨 '천주' 사용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7. '말씀' (Logos): 이성에서 인격으로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입니다.
원어의 뜻으로 보면, 로고스는 이성, 원리, 우주의 법칙 등을 뜻하는 철학적 용어에 가깝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이를 '도(道)'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를 '말씀('말'의 높임말)'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차가운 우주의 법칙(로고스)이 아니라, "나에게 인격적으로 말을 건네시는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설교(말씀 선포)를 예배의 절대적 중심으로 삼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8. 극존칭의 사용: 수직적 위계질서의 강화
영어 성경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를 때 친근한 'You'를 사용하지만, 한국어 성경은 '주여' 등의 철저한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대(하게체/해라체)를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극존칭(합쇼체)을 씁니다. 하나님께는 '하시옵소서' 식의 고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세우는 데는 기여했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목회자와 성도 간의 관계를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 고착화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예수님 친구"라는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정서적으로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9. '통성기도'와 '부르짖음'
성경에는 "부르짖으라(Cry out)"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 예레미야 33:3). 이 단어가 한국의 '한(恨)'의 정서와 결합하여, 소리 내어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한국 특유의 '통성기도' 문화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신앙 언어가 되었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이 'Korean Prayer'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독특한 현상입니다.
10. '천국(天國)' : 죽어서 가는 '장소' vs 임하는 '통치'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는 영토(Land)의 개념보다 '왕권', '통치(Reign, Kingship)'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를 한국어 번역에서는 한자어 '하늘(天) 나라(國)'로 번역했습니다. '국(國)'이라는 글자는 영토와 장소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으로 이해하기보다, "죽은 뒤에 저 세상으로 이민 가는 장소(낙원)"로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졌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장소적 개념에 집중된 대표적 사례입니다.
12. '성령(聖靈)' : 충전하는 '에너지' vs 교제하는 '인격'
헬라어 원어 Pneuma는 바람, 호흡을 뜻하며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인 '인격(Person)'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기(氣)'나 '혼(Soul)'으로 이해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성령을 번역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무속적인 '신내림'이나 도교적인 '기운'의 개념이 섞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을 인격적인 교제의 대상이라기보다, "불 받는다", "충만하게 채운다"와 같이 배터리처럼 충전하고 사용하는 '능력(Power/Energy)'이나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능력을 쌓는다는 개념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 충만도 충전하는 에너지나 뜨거운 불을 받는 것이 아니며, 성령님은 하나님의 숨결이며 우리를 돕는 분으로서 나를 장악하는 힘이 아니라, 내 곁에서 인격적으로 대화하고 돕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13. '예배(禮拜)' : 드리는 '의식' vs 삶으로서의 '섬김'
예배(Latreia)를 영어로는 'Service(섬김, 봉사)'라고 표현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도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며 삶 자체가 예배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에서는 '예절(禮)을 갖추어 절(拜)한다'는 뜻의 유교적/불교적 용어인 '예배'를 차용했습니다.
'Service'의 개념이 약해지고 '절하는 의식'이 강조되다 보니, 한국 기독교는 "일요일에 교회 건물에 모여서 드리는 1시간의 의식"을 예배의 전부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예배당 안에서의 모습(주일 성수)과 세상 밖에서의 삶(봉사와 섬김)이 분리되는 이중적인 신앙 태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왜 이 구별이 중요한가
이런 우리말 번역들은 틀렸다기보다 강조점을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번역된 언어를 본문 자체로 착각할 때 생깁니다. 번역은 성경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보이게 만든 창인 것이죠.
성경을 원어로 읽어야만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번역이 해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성경은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신앙을 흔들고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익숙함입니다. 번역을 의식하며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하게 만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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