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환 논법을 넘어선 신앙의 변증
여기저기서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겁니다. “왜 기독교인들에게 ‘A가 진리냐’고 물어보면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라고 답하느냐. 그럼 ‘왜 성경이 진리냐’고 물으면 ‘성경에 성경이 진리라고 쓰여 있다’고 답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순환논법에 빠진다는 거죠. “내 말이 옳으니까 내 말이 옳다”라고 말하는 동어반복을 한다는 겁니다.
알리스터 매그래스(Alister McGrath)라는 신학자에 따르면, 변증의 초점은 특별히 성서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 주변 문화의 호소력 있는 논증들을 구성하는 데 있습니다. 흥미롭죠. 기독교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책인 성서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주변 문화를 가지고 로고스의 논증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학의 핵심: '빠른 생각'을 교정하는 '느린 생각'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다니엘 카너먼은 인간의 사고를 시스템 1(빠른 생각)과 시스템 2(느린 생각)로 나눴습니다.
*시스템 1(직관): "2+2=4"처럼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생각입니다. 일상에서는 효율적이지만, 편견이나 '휴리스틱(어림짐작)'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스템 2(이성): "35x273"처럼 노력이 필요하고 논리적인 사고입니다.
신학은 바로 시스템 2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주일학교 시절부터 관성적으로 믿어온 '빠른 생각' 속의 하나님을, 성서와 전통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느리게' 다시 짚어보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진리니까 진리다"라는 동어반복적 확신에서 벗어나, "왜 그러한가?"를 묻는 것이 신학의 시작입니다.
2. 빠른 생각과 느린 생각: 신학은 ‘느리게 생각하기’다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이라는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있습니다. 그분의 책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제목이 『생각에 관한 생각』이고, 원제는 Thinking, Fast and Slow입니다. 말 그대로 빠른 생각(시스템 1)과 느린 생각(시스템 2)이죠.
이 책의 주장은 단순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빠른 생각과 느린 생각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빠른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빠른 생각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동적이고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사고죠.
예를 들어 2+2는 빨리 계산할 수 있습니다. 친구의 환한 표정을 보면 즉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 내내 완전히 의식적으로만 하려면 한 시간 이상 버티기 어렵죠.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운전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시스템 1, 즉 빠른 생각입니다. 생존을 위해 극도로 효율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림작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을 휴리스틱(heuristic)입니다. 예를 들어 가용성 휴리스틱은 이런 겁니다. 며칠 전에 비행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비행기가 사실 매우 안전한 이동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취소하고 KTX를 타고 부산에 가는 것이죠. 비행기는 사고가 거의 나지 않지만, 한 번 나면 크게 나기 때문에 최근에 들은 사건이 내 행동의 기준이 됩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비행기를 타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또 기준점 휴리스틱도 있습니다. 마트에서 자주 보는 방식이죠. 어떤 상품에 2만 원이라고 써놓았다가 지우고 15,000원이라고 쓰고, 그것도 지우고 1만 원이라고 쓰면 “원래 2만 원짜리를 1만 원에 파네?” 하고 손이 갑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저 상품이 1만 원의 가치가 있느냐”인데, 누군가가 기준점을 제시하면 우리는 그 기준점을 중심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반면에 느린 생각도 있습니다. 이것을 시스템 2라고도 부르죠. 이것은 복잡한 계산, 논리적 추론, 자기 통제 같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35 ×273 같은 계산은 빨리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요즘 잠자기 전에 두 자릿수 곱하기를 해보곤 하는데, 젊을 때는 잘 되었는데 요즘은 잘 안 됩니다. 머릿속에서 계산하려 해도 예전만큼 잘 되지 않더라고요.
논리적 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화가 나지만 지금 화를 내도 되는지 앞뒤 사정을 살피고, 화를 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계산하는 것, 이런 것들이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사고입니다.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귀찮거든요. 뇌는 게으릅니다. 몸만 게으른 게 아닙니다. 가능한 한 작동을 덜 하려고 합니다. 계속 시스템 2로 살 수는 없습니다. 뇌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빨리 선택합니다.
문제는 시스템 2, 즉 느린 생각이 빠른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최악의 방식으로 작동할 때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주장해 놓고, 그 떠오른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느린 생각을 동원하는 경우죠.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불쑥 떠올린 생각을 사람들이 반박하면, 그때부터 “내 말이 맞다”를 주장하려고 느린 생각을 시작합니다. 카너먼의 책은 인간이 합리적 행위자라는 고전경제학의 가정을 뒤집는 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정책을 세울 때나 투자할 때 직관적으로 하지 말고 느리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느리게 생각하기가 학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신학은 무엇인가. 성서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에 대해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 감정들을 느리게, 천천히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우리 내부에서 풍문처럼 떠도는 신앙 이야기—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나 교리라고 착각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자로 살면서 신학자의 최대 경쟁상대가 주일학교 선생님이라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렸을 때 배운 것을 절대 고치려고 하지 않거든요. 아무리 신학자가 뭐라고 해도, 어렸을 때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자기 신앙의 기초로 자리 잡으면 그것을 교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면, 시스템 2를 발휘해 자기가 말한 것이 맞다고 주장하려고 노력하죠.
물론 주일학교 선생님이 헌신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신학적으로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부터 34절까지, 바울이 아테네에서 선교한 이야기입니다.
3. 사도행전 17장 다시 읽기: 바울은 논쟁을 포기했는가
제가 석사 과정일 때 라디오 설교를 듣는데 어떤 분이 사도행전 17장의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런 줄거리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런 방식의 설교를 많이 확인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바울은 당대 누구 못지않은 학식을 지닌 사람인데, 가장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던 아테네에 가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와 논쟁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에 따르면 바울은 최고의 지성으로 그들을 논리적으로 격파하려 했지만 처절하게 실패했고, 그 이후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선포했지 지적·철학적 논쟁에 말려들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설교의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 같은 대석학도 성공하지 못한 논쟁을 통해 신앙을 전파하려 하지 말고, 선포하고 회심을 기다려야 하며, 토론이나 설득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참 편하죠. 공부할 필요도 없고 시스템 2를 돌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사도행전 17장이 그런 말씀입니까? 성서학자로서 느리게 생각해 봅시다. 초점을 두 가지로 모아 보겠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아테네 선교는 실패였는가. 또 하나는 실패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후에 논쟁이나 설득 같은 지적 토론을 하지 않았는가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도 답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선교했고, 그들 가운데 선교의 성과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몇 사람을 기록하죠. 한 사람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았던 디오누시오입니다. 오늘날의 고위 공무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지위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회심합니다. 또 다마리라는 여성도 회심합니다. 아마 그 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반대와 비웃음을 받았지만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아테네 선교는 결코 “실패”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둘째, 아테네 선교 이후 바울이 철학적 논쟁을 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아테네 이후에 곧바로 고린도로 갑니다. 그리고 18장 4절을 보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했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하였다.” 이 구절은 바울이 전도를 위해 유대인과 헬라인과 토론하고 설득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여기서 “토론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디알레고마이(dialegomai)가 재미있습니다. 이 단어는 17장 이전에는 나오지 않다가, 바울의 아테네 선교 이후로 계속 등장합니다. 17장 17절 이후로 18장 4절, 19장 8절과 9절, 20장 7절과 9절, 24장 23절 등에서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아테네 선교를 통해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 선교의 수단인지 깨달았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천천히 생각하면, 빠른 생각으로 듣기 좋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너집니다.
바울은 논증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일이 선교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인문학과 신학의 관계
저에게 가끔 “저 사람은 인문학자지 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인문학을 많이 활용한다고 타박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도행전 17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자신의 말을 강화하기 위해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아테네의 종교적 공간을 보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구를 근거로 종교학적 논증을 펼치기도 합니다. 바울은 당대의 시인과 철학자, 종교학적 언어를 인용하며 복음이 무엇인지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중심에는 신앙이 있었고, 모든 작업은 신앙을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말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인간의 몸이기에 식욕과 수면욕을 느끼듯이, 신앙은 그 자체로 스스로 이해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스스로 해명받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직관적으로 “기독교는 이런 거야”라고 떠도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짚으며 정말 그런지 따져봅니다. “선포(케리그마)만 중요하다”는 주장도, 본문이 그걸 말하는지 아닌지를 검토해 교정합니다. “아니야, 그 본문은 오히려 토론의 중요성을 말하는 본문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학이 하는 역할의 한 부분입니다.
변증의 기술: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신학은 내부적으로는 신앙의 질서를 잡고, 외부적으로는 세상을 향해 신앙을 설명(변증)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은 고대 수사학의 세 요소와 연결됩니다.
*에토스(Ethos - 인격과 태도): 변증하는 사람은 '온유와 두려움'을 갖춰야 합니다. 상대방을 비웃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뢰를 주는 태도가 먼저입니다.
*파토스(Pathos - 감정적 공명): 기독교의 변증은 청중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공포와 지옥불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가 주는 아름다운 소망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로고스(Logos - 논리적 이유): 신앙은 비합리적인 신비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교회 밖의 신학: 변증(아폴로기아)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밖에서는 신학이 무엇을 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변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증이라는 단어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어 아폴로기아(apologia)를 번역한 말인데, 변호사가 “이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변호하는 그 ‘변호’의 의미입니다.
알리스터 매그래스에 따르면, 기독교 역사에서 변증은 기독교 신앙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오해나 왜곡을 반박하는 데 사용되며, 특별히 성서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 주변 문화의 호소력 있는 논증을 구성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변증은 “성경이 그렇다”를 반복하는 순환논법으로는 신앙 밖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다는 것을 알며, 주변 문화의 언어로 로고스의 논증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부를 향한 신학의 중요한 기능은 변증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들을 최선의 방법으로 변호하고 설명하며,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16절: 로고스·에토스·파토스의 변증
변증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제가 번역한 것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해 달라며 묻는 모든 이들에게 항상 아폴로기아, 다시 말해 변증을 준비해 두십시오. 다만 이때 온유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하십시오.”
베드로전서의 배경은 세계적인 박해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면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슬픔을 당하는 상황에 놓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조직적인 핍박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형식과 윤리적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위험한 사회 일탈처럼 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황제 숭배를 하지 않고 도시의 수호신을 섬기지 않으니, 당시 지중해 세계 사람들 가운데서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는지” 설명할 준비, 곧 아폴로기아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짧은 구절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고대 그리스 수사학의 핵심인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토스: 온유함과 하나님을 두려워함
먼저 에토스가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신뢰를 주어야 설득이 됩니다. 수사학은 넓은 의미에서 설득의 기술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편지를 쓸 때 수사학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같은 표현도 수사학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로 그 전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 같은 과장도 수사학적 표현이죠.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 구약을 통해 논증하고 자신이 배운 헬라적 수사학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오히려 고린도전서를 바울 수사학이 가장 잘 드러난 서신으로 꼽습니다.
설득의 기술에서 말하는 사람의 신용, 전문성, 품성, 권위가 중요합니다. 청중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진정성이나 인격을 통해 설득될 준비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변증의 에토스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온유함과 하나님을 두려워함입니다. 온유함은 청중을 향한 태도입니다. 상대를 도발하거나 비웃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변증은 오만하거나 우월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함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아는 듯이 함부로 말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변증의 목적은 지적 유희나 말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싸움으로 이기기 위해 논쟁하지만, 기독교 변증의 에토스는 그러지 않습니다. 진리는 폭력적이거나 모욕적인 방식으로 선포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태도가 변증의 에토스입니다.
파토스: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불러일으키라
다음으로 파토스가 있습니다. 파토스는 청중에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공감, 연민, 두려움, 희망 같은 감정들을 말이죠.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핵심 파토스는 분명합니다. “너희가 가진 희망에 관해 묻는 모든 이들에게”라고 했으니, 우리가 불러일으켜야 할 파토스의 중심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증이나 전도, 선교라는 이름으로 종종 상대의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해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아폴로기아, 외부를 향한 신학은 희망이라는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만 좀 위협하십시오.” 기독교 신학은 희망에 관한 것이지, 루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옥불로 위협하며 “너의 잘못을 토해내라”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로고스: 공적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라
마지막으로 로고스가 있습니다. 변증의 로고스는 신앙 유무와 상관없이, 묻는 모든 이들에게 기독교의 희망이 설명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기독교인이 품는 희망이 합리적이라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비이성의 테두리에 가두고 “우리끼리만 믿으면 된다”는 소종파적 태도는 변증의 로고스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사적인 신비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질문 앞에서 이유(로고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고 아폴로기아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신학의 중요한 구성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는 이어서 “선한 행실은 비방자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부끄럽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실행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악보로 적지만, 악보 자체가 목적이 아니듯, 연주될 때 음악이 완성되듯, 신학도 말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학의 완결성은 선한 행실로 비방자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연극 대본이 무대에 올려질 때 가치가 있듯, 신앙 역시 사회 속에서 실행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은 특히 더 그러한 학문입니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 시대와 호흡하는 신학
신학은 고정된 화석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신학은 늘 당대 지성계의 도전에 응답하며 변해왔습니다.
*중세(아퀴나스): 이슬람을 통해 재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도전 앞에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종교개혁(루터, 칼뱅): 당대 대세였던 '인문주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성서를 원어로 읽고 정교한 논리를 세웠습니다.
*현대: 과학, AI, 생태 위기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 신학은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5. “신학들”의 역사: 도전과 응전
이제 신학이 무엇인지 구구절절 말하기는 어렵고, 스케치도 아닌 크로키 정도만 했습니다. 이제 신학의 역사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일부러 “신학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떤 신학이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그 신학으로 다른 신학을 비판하는 데만 사용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불쌍한 사람들 중 하나가 신학을 오로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배운 사람입니다.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은 ‘신학’(theologia)이라는 용어 사용을 주저했습니다. ‘데오’는 하나님, ‘로기아’는 이야기, 학문을 뜻하지만, 그리스 세계에서 이것은 신들에 관한 신화나 형이상학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신앙과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그러나 지금은 다 사용합니다.
신앙이 변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가까운 예로, 제가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기타 치면 장로님께 엄청 혼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그렇게 혼내던 교회에 밴드가 있더라고요. 신학들은 존재합니다.
1) 초기 교부: 그리스 철학으로 응전하다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기 교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기독교 신앙이 불합리하고 미신이라는 비판에 맞서, 그리스 철학을 통해 아폴로기아, 즉 변증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철학은 야훼 하나님, 성령으로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헬라 철학의 언어와 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으로 정교화하고, 신앙의 정당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초기 신학이 동시대의 도전을 받았고, 그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철학과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2) 중세 스콜라: 아퀴나스와 이성·계시의 조화
중세 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스키엔티아(scientia),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에 가까운 지식으로 규정하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역동적으로 신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3세기 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재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철학적 진리(이성)와 신앙적 진리(계시)가 모순될 수 있다”는 이중진리설 같은 급진적 사상이 등장합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이 서로 모순될 수 있다는 위협 앞에서, 신앙이 결코 철학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신학 작업의 핵심 주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성은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신앙의 핵심 신비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성은 신앙이 비합리적 도약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고 신앙의 합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일에 생애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 대개혁: 인문주의 방법으로 성서로 돌아가다
종교개혁 시대는 가톨릭의 타락이 극심했습니다. 루터는 타락한 가톨릭을 비판하고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개혁에 나섭니다. 그리고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루터뿐 아니라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인 칼뱅도 인문주의의 세례를 받은 학자였습니다. “아드 폰테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도 인문주의자들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중세 스콜라 방법론을 버리고, 당시 학문의 대세로 자리 잡은 인문주의적 방법론을 사용해 성서를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한 것이었습니다.
칼뱅의 경우, 그는 경건을 지식 탐구와 분리하지 않고 신학의 목적에 두었습니다. 『기독교강요』는 “우리가 가진 지혜의 총체, 거의 전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로 시작합니다.
칼뱅의 학문 여정을 보면, 그는 14세에 파리에서 라틴 문법을 배우고, 몽테규 대학에서 논리학·문법·수사학을 배웁니다. 18세에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528년 오를레앙으로 가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입각한 법학을 배웁니다. 그곳에서 아드 폰테스라는 핵심 방법론을 익히고, 성서를 그리스어·히브리어로 읽으며 법학의 정교함으로 신학을 구성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1533년 ‘돌연한 회심’ 이후, 인문주의적 소양과 언어학적 능력, 명료한 논리, 체계적 분석력, 강한 수사학을 성경과 교부 문헌 연구에 적용합니다. 그리고 27세에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합니다.
4) 계몽주의 이후: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중심 신학
근대에 와서 계몽주의가 시작되며 이성이 강조됩니다. 칸트 같은 사람은 순수 이성으로 신의 존재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 신학은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까?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슐라이어마허입니다. 흔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죠. 그는 신학의 중심을 감정에 둡니다. 교리적 앎이나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히 느끼고 무한하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절대 의존의 감정’에 신앙의 핵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면적 체험이 신학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기보다 인간의 종교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초월적 분이라기보다 인간의 삶과 역사, 사회와 자연에 내재한 분으로 이해되기 쉬워집니다. 그러면 인간 중심적 낙관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5) 2차 대전 이후: 칼 바르트와 ‘위로부터 오는 말씀’
그러나 그 낙관이 처절하게 깨진 사건이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인간의 종교 경험이나 인간의 진보에 대한 낙관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드러낸 것이죠. 그 위기 앞에서 등장한 인물이 칼 바르트입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침투하는 초월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가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이 신학적 행위이며, 신학의 과제는 교회가 선포하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선포를 검토하는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6) 세계 기독교와 해방신학: 고통의 현장에 응답하다
20세기 이후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있었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같은 인물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그 현실 앞에서는 사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실천을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학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실천적 신학을 해방신학이라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해방신학이 공산주의 신학으로 오해되거나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평가할 때, 그 시대가 던진 질문과 그 응답의 맥락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7) 포스트모던과 그 이후: 신학은 언제나 시대의 과제와 싸운다
신학의 중심축은 이동하고 있습니다. 서구가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가장 많은 기독교인을 보유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럼 신학은 무엇에 답해야 합니까? 아프리카의 빈부격차, 인프라의 부재, 마녀 낙인 같은 문화적 문제들 앞에서 신학은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 유교·불교·샤머니즘이 강한 아시아에서 기독교 신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 포스트모던 시대가 왔습니다. 포스트모던은 단일의 진리가 없다고 말하며, 거대 담론 자체를 폭력으로 고발합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위협”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럼 모더니즘 시대에는 문제가 없었습니까?” 모더니즘 시대에도 이성 절대주의와 싸웠습니다. 신학은 늘 그 시대의 과제와 싸워 왔습니다.
싸움을 피하고 문을 걸어 잠가 소수만의 안전지대로 숨어버리는 태도가 근본주의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학자들은 포스트모던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모더니즘이 인류에 끼친 해악을 비판하고, 기독교 복음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변증 하기도 합니다. 신학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이며, 그 응전은 늘 그 시대의 주요 문화가 사용하는 방법론을 기꺼이 사용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8) 21세기의 과제: 과학, AI, 생태 위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신학의 장은 더 펼쳐질 겁니다.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21세기,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맞닥뜨린 신학적 과제는 자연과학입니다. AI도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답해야 합니다. AI가 등장했으니 이제 ‘인간이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생태 위기는 인류 전체가 죽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또 신경과학과 뇌과학이 발달하면, 뇌의 작동 방식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해야 할 겁니다. 민주주의, 인권, 정의 같은 사회적 문제에도 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온 적도 없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동시에, 외부를 향한 아폴로기아, 변증도 수행해야 합니다. 생태 위기라는 인류의 위기 앞에서, 첨단 기술이라는 거대한 테크놀로지 앞에서, 삶의 최전선에서, 경건(피에타스)을 가진 사람으로서 두렵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로고스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메시지 안에 희망이 있다는 그 희망의 내용을 구성해야 합니다.

6. 비신학생을 위한 제안: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 문해력’과 교양 시민
신학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며 살다가 신학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M.Div를 가야 하나요? Th.M을 가야 하나요?”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인이 신학을 할 필요는 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문적인 신학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년되면 약 한두 가지는 드시죠. 저도 두 가지 먹습니다. 그렇다고 전문 의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적이 있다고 해서 법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생물로 살아왔다고 생물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사회에 산다고 사회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 분야는 전문 분야입니다.
기독교양 시민으로 산다는 것
결국 신학은 '나의 신앙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믿는 바를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신앙은 독단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됩니다.
전문적인 학위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왜 이 약(신앙)을 먹는지, 내 병(실존적 고통)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 즉 '기독교 문해력'을 기르는 과정은 현대 신앙인에게 필수적입니다. 온유한 태도로 세상과 대화하며, 삶 속에서 그 가치를 연주해내는 '기독교양 시민'이 많아질 때 기독교는 다시금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 신학을 알고 싶을 때, 신학 자체를 전공하려 하기보다 기독교 문해력을 쌓으라고 제안합니다.
기독교 문해력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 우리의 신앙을 이해할 때,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두 차원을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통시적 차원은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그리고 다른 종교와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신앙과 제도를 형성해 온 과정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앞에서 초대교회부터 포스트모던 신학까지 대략 통사를 말한 것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어떤 신학이 최고인가”를 단정하는 태도는 본질주의적 사고입니다. 내 신앙 고백은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이 열심히 믿고 그 안에서 자기 신앙을 해명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신학적 우월성을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의 이유 중 하나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 번역본까지 하나로 고정하고 “그것만 옳다”라고 주장합니다. 불안하니까요. 그러나 신앙은 불안을 없애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불안을 견디며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불안 때문에 “내 신앙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통시성은 이상화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시적 차원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맺는 복합적 관계 속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레토릭에 속지 않으려면 기독교 문해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질환이 있어서 매일 약을 두 종류 먹는데, 약을 먹을 때 “왜 이 약을 먹어야 하는지, 내 병의 현상은 무엇인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듯,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해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 전문 신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어떤 분이 “성경을 많이 알고 싶은데 신약학 공부하면 되나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약학은 역사비평, 문학비평, 이데올로기 비평 등으로 신약 문서를 분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것이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작업이 어떤 이에게는 신앙을 더 돈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교양 시민’으로 살아가길 권합니다. 신학대학들이 기독교 문해력과 기독교 교양 시민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전문 신학을 하고 싶은 분들도 있고 교양을 쌓고 싶은 분들도 각자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신앙을 보편의 언어, 객관의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신앙을 증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문해력은 비기독교인에게도 유익하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의 풍성한 삶, 기독교 내에 있는 자원들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의 언어로 기독교의 저수지를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시각
첫째, 신앙의 '신비'와 '이성' 사이의 긴장입니다.
강연은 '느린 생각'과 '로고스'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에는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두려움'이나 '압도적인 신비 체험'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칫 종교를 철학이나 윤리학의 하위 범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실천'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신학의 완성이 '선한 행실'에 있다고 강조하긴 했지만, 실제 신학의 역사는 종종 탁상공론에 머물렀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음에 '이론적 로고스'가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는 해방신학적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적 유희로서의 신학이 아닌, 고통받는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신학이 더 절실할 때가 있습니다.
셋째, '기독교 문해력'의 현실적 장벽입니다.
전문 신학자가 아닌 교양 시민으로서의 신앙인을 제안한 것은 신선합니다. 그러나 바쁜 현대 사회에서 성도들이 복잡한 통시적·공시적 맥락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다시 '전문가 그룹'에 의존하게 만드는 또 다른 엘리트주의를 낳을 우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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