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John) 11:1~11 설교자: 주경훈 담임목사님 2025년 12월 28일
1. 호모 헌드레드 시대, 삶과 죽음의 역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5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국내에만 100세 이상 인구가 7,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기대 수명을 예측해 주는 앱(App)까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애씁니다.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는 의학 기술 발달로 100세 장수가 보편화된 시대의 인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유엔의 2009년 '세계인구고령화'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평균수명 80세 이상 국가가 6개국이었으나 2020년에는 31개국으로 증가할 전망이며, 전 세계 100세 이상 인구도 2050년까지 10배 이상 늘어납니다.
한국의 경우 2012년 2,386명이었던 100세 이상 인구가 2040년 약 2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에서는 2024년 100세 이상 인구가 약 10만 명으로, 2054년 42만 명으로 4배 증가할 전망입니다.
한국도 2024년 8,563명(남성 1,526명, 여성 7,037명)을 넘어 2026년 1만 명 돌파가 예상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Main Character)은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조연(Supporting Role) 일뿐,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짜 무대 위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단순히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옭아매는 가장 큰 두려움, 바로 '죽음을 죽이기 위해(Killing Death)'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무디가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될 테죠 하지만 믿지 마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 살았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생기 있게 살아 있을 테니까요.
- 부활을 확신한 무디 목사님의 말씀
2. 고난은 사랑의 부재가 아닙니다 -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죽을병에 걸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Lazarus)가 등장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가 사는 곳은 베다니(Bethany)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이 마을의 이름 뜻은 '비참한 자들의 집', '슬픔의 집'입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Martha)와 마리아(Mary)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전갈의 내용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요 11:3)
그들은 "주님께 헌신한 자가 아픕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The one whom you love) 자가 아픕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어서 오셔서 고쳐 주시라'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하지도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여 피신 중이셨습니다(요 11:8). 제자들도 다시 유대 땅으로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린 것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와주실 것을 믿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죽을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은 사랑의 부재(Absence of Love)가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비록 지금 아프고, 힘들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주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지체하시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6)
성경 원어에는 접속사 '운(οὖν, Therefore)'이 숨겨져 있습니다. 직역하면 "사랑하시니라, '그러므로'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사랑하시니라, '그러므로' 즉시 달려가셨다"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지체하시는 동안에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섭섭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는 말속에는 주님을 향한 진한 서운함이 묻어납니다.
도대체 왜 사랑하시면서 지체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는 7가지 표적(Sign)이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적은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기쁨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장례식장에서 일어납니다. 슬픔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여러 명의 병자를 고치신 표적들이 나옵니다. 그 병자들의 병세는 표적이 진행될수록 더욱 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죽음' 자체를 상대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주님은 늦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Perfect Timing)을 보고 계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의사를 넘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4. 죽음이라는 거짓 왕을 폐위시키다 -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아니라 죽음을 상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
주님 보시기에 죽음은 그저 '잠'에 불과합니다. 깨우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평생 죽음의 공포 아래 종노릇 하며 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7절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Reigned)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어릴 적 '왕 놀이'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위바위보로 왕과 거지를 정합니다. 왕이 되면 거지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권세를 부립니다. 그 놀이 안에서는 왕의 말이 법입니다. 하지만 해가 저물고 어머니가 "밥 먹어라!" 하고 부르시면 그 순간 놀이는 끝납니다. 왕도, 거지도 다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마치 이 '왕 놀이'와 같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너는 끝이야, 너는 내 것이야"라고 위협하며 거짓 왕 행세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거짓 왕을 폐위시키셨습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왕 노릇 하는 대리 통치자(Vice-regent)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담대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5. 결론: 진짜를 본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 어쩌면 그가 가장 섭섭했을지도 모릅니다. 3일간 천국의 영광, 그 '진짜(The Real)'를 맛보았는데, 다시 이 고단한 세상으로 돌아와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죽음 너머의 '진짜'를 본 나사로는 그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죽음이 끝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202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고, 언젠가는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절망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으로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실제 우리 삶의 주연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생명이 우리 삶의 주연입니다.
다가오는 2026년, 죽음의 종노릇 하던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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