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John) 5:1~9 설교자: 주경훈 목사 (Rev. Ju Gyeong-hun)
1. 화려한 명절의 그늘, 베데스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같은 3대 명절이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Jerusalem)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도시는 활기에 차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이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축제와 쉼이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화려한 성전의 중심이 아니라, 성전 곁에 있는 한 문(門)을 통과하십니다. 바로 '양문(Sheep Gate)'입니다. 느헤미야 3장 1절을 보면 이 문은 대제사장들이 직접 건축한 문입니다. 왜 이름이 양문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드릴 희생 제물인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러 가는 양들이 통과하는 그 문 곁에, '베데스다(Bethesda)'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참 아름답습니다.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깊은 연못 주위로 다섯 개의 행각(지붕이 있는 복도)이 있어 뜨거운 볕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하나같이 자기 힘으로는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든,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담장 하나 사이인 이곳 베데스다에는 신음과 고통, 그리고 절망만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화려한 종교 도시 예루살렘의 진짜 민낯이자, 감추고 싶은 세상의 아픔입니다.
2. 은혜가 사라진 은혜의 집
도대체 왜 이 많은 병자가 병원이 아닌 연못가에 모여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5장 3~4절(어떤 사본에만 있는 내용)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사실 이것은 성경적 진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퍼져 있던 '전설(Legend)'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데스다는 간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지하수가 솟구쳐 물이 보글보글 올라올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의 역사라고 믿고, 그때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낫는다는 미신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서울의 미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제 놀이터는 북한산(Bukhansan)이었습니다.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는 거대한 흰 바위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바위에 흰 구름이 내려앉을 때, 하늘이 점지한 사람만이 저곳에 올라가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신화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에 모인 사람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설과 신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름만 '은혜의 집'일 뿐, 은혜가 메말라 버린 곳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 '신화'가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카더라 통신'을 믿습니다. "어디 가면 낫는다더라", "누구를 만나면 해결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처세술과 방법론, 그리고 헛된 신화가 믿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합니다.
둘째, 은혜가 사라지면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의 규칙은 잔인합니다. '선착순'입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단 한 사람만 혜택을 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거동이 불편한 중환자들 사이에서 누가 1등을 할까요? 아마 가장 덜 아픈 사람, 혹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멀쩡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빨라서 나았다"라고 자기 힘을 자랑할 것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은혜가 사라지니 무한 경쟁과 '내 힘'만 남았습니다. 평소에는 서로 위로하던 환자들도 물만 움직이면 서로를 짓밟는 전쟁터가 됩니다.
셋째, 은혜가 사라지면 '원망'이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그는 "네,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없습니다(I have no one)."라고 말합니다. 부모 복이 없어서, 자식 복이 없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이 모양이라고 원망과 핑계만 늘어놓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말라버린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이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예배의 자리, 베데스다에 나와 있습니다. 혹시 우리도 막연한 행운이나 나의 노력을 의지하며, 혹은 누군가를 원망하며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38년 된 병자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첫째, 은혜는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요 5:6)
예수님은 안식일의 축제를 뒤로하고 가장 비참한 곳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 중에서도 가장 가망 없는, 38년이나 된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여기서 '보시고'라는 단어는 단순히 눈으로 봤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사정을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을 아십니다. 남모를 눈물과 긴 고통의 시간을 다 아십니다. 병자에게는 선택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출발입니다.
둘째, 은혜는 주님의 일방적인 '개입'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뻔한 질문 같지만, 이것은 정보 수집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이제 내가 너의 인생에 개입하겠다. 내가 너의 삶에 들어가겠다"라는 주님의 의지 표명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이 있었고, 왕의 신하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요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기대조차 없었던 그에게 주님이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셋째, 은혜는 주님의 전적인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8)
예수님은 세 가지 명령을 동시에 내리십니다. "일어나라, 자리를 들어라, 걸어가라." 38년 동안 누워만 있던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그에게는 일어날 근육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그의 마른 뼈와 근육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가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4. 결론: 오직 은혜만을 구하십시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요 5:9).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 전략, 내 자원, 내 계획, 내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저앉았던 삶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베데스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직도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막연한 신화입니까? 아니면 남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경쟁심입니까? 혹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원망입니까?
이제 눈을 들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헛된 전설이나 '카더라' 통신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답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형편을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여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오늘 이 시간,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갑시다. 주님의 그 일방적이고 전적인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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