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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세20. Day 1. 여호와여 나를 고치소서 (렘 17:12~16 시 42:5)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0. 11. 1.

강사: 김은호 목사

누가 기도할 수 있을까?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마6:9상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누구에게 기도할 수 있을까? 이 땅의 아버지는 한계가 있으나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한계가 없으신 분이다. 우리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분이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기도인데, 1) 예레미야의 신앙의 고백,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 3) 예레미야의 기도의 내용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예레미야의 신앙의 고백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예레미야는 먼저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을 '영화로우신 보좌여'라고 부른다.(렘17:12) 보좌는 왕되신 주님이 통치하시는 곳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만유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도 앞으로 21일간 만유의 왕이시요 만유의 주께 기도할 것이다.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하나님은 언제부터 보좌에 계셨을까? '시작부터'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시간 이전부터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왕상 22:19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렇게 이사야가 바라본 하늘의 모습에서는 삼중 거룩송을 부르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요한이 바라 본 천국의 예배 모습은 어떠했을까?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이와 같이 이사야와 수백 년의 차이를 둔 사도 요한이 바라본 하나님의 보좌와 천국의 예배의 모습은 동일하며, 특히 하나님의 보좌에는 찬양과 영광이 떠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은혜의 보좌'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보좌에는 심판의 보좌도 있다. 우리는 심판의 보좌 앞에 서지 말아야 한다.
1)은혜의 보좌란? 하나님께서 좌정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곳이기에 은혜의 보좌라고 부른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실수를 많이 했어도, 아무리 더럽혀졌어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면 쌓아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2)누가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계 7:14~15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예수의 피로 씻어 희게 된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얻은 사람들이다. 
예배는 시선이 중요하고 기도도 집중력이 중요하다.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자.

'우리의 성소이시며'
(히9:12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시 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소이시다. 이는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 현장이 바로 주의 거룩한 성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성소가 되어주신다.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만나주시는 곳이 성소였다.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곳이 바로 성소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의 성소는 어디일까? 우리가 예배하는 바로 여기가 성소다. 예루살렘이 아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당 건물도 성전이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고, 우리가 기도하는 그곳이 성전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성소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가야 한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그 모임/현장의 중심이 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영으로 그 현장 가운데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악이 떠나갈 것이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묶인 것이 풀릴 것이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자.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소망이란 '기다린다'는 어원에서 비롯된 단어다. 성경의 소망은 소망의 근거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이 지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임이 예레미야의 소망이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일까? 다시 오실 주님인가, 가족의 구원인가, 질병의 치유인가 관계의 회복인가?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우리의 소망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라 자손 중의 한 사람이 불안과 낙심 가운데서 이 시를 썼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였다.
첫째)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때문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둘째) 하나님의 침묵 (시43: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시편 42편과 43편에서 이 시인은 '어찌하여'를 10회나 사용할 정도로 낙심했다.
셋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인은 사슴이 물을 갈급함처럼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했다.
어떻게 하면 낙심하고 불안해 하는 내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영혼을 향하여, 내 자신에게 외치는 것이다. 무엇을 외쳐야 할까?
첫째)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시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우리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내 영혼을 향하여 외쳐야 한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둘째)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외칠 수 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세째)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저앉지 말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음과 같이 외치자.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고 불안해 하느냐"
"내 영혼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해 기도한다.
-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를 버림 (렘17:13)
그 이유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너무 답답해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수치를 당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처음 경험한 것도 바로 '수치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을 가리고 숨었다.
-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신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죄의 근본이다. 그리고 그들은 멸망했다. (렘17:13 흙에 기록되리니). 즉, 멸망이다.

세째로, 예레미야의 기도의 내용 (간구)이 있다.
(렘 17:13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나를 고치시는 분 (라파), 나를 구원하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서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생활 속의 구원'을 의미한다. 내가 온전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는 고백이다.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하실 분이 아무도 없다고 너무나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신앙 연조가 아니라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내가 처한 상황과 문제가 아니라, 주의 보혈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간증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기도하자.
"주님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적용 기도:
영광스러운 보좌...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다.
사탄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아무리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곳이 그 현장이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성소가 되게 하자.

하나님,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내게 믿음 주시옵소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속에 빠져있더라도....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고치소서.
(시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소망이신 하나님...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심을 고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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