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배영호 전도사
2007년 11월 탈북
노원 한나라은혜교회 교육 전도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재학
*꽃제비에서 복음사역자로 거듭남"
<고난의 행군과 꽃제비 어린시절>
나는 북한 함경북도 어랑군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조부모님 밑에서 자라다가, 8살이 되던 해에는 역시 2명의 자기 자녀를 데리고 재가한 새어머니가 있는 아버지께 갔으나, 새어머니와의 마찰이 심했다.
9세에 새어머니와 싸우고 집을 나와서 기차를 타고 다니며 소매치기를 하며 살았다. 다른 사람의 배낭을 칼로 찔러 물건을 훔쳐 파는 꽃제비로 살았다. 북한에서는 94년 고난의 행군 이후 수없이 많은 꽃제비가 생기게 되었는데, 94년 이전의 꽃제비는 대부분 가정불화로 뛰쳐나온 애들이었다.
이후 자꾸 도망가니까 일반 학교에서는 통제가 어려워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의 계모학원(일종의 고아원)에 보내졌다. 나는 그래도 그곳에서만큼은 다 잘해보고 싶었다. 이름이 학원이니까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지만 실제 가보니 그렇지 못했다. 학원에 들어가보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만 보였고 옥수수 죽 조금만 먹이고 매일 농장과 산에서 일을 해야 했다. 오전에는 수업을 한 후에, 죽 조금 먹고 (여름에는 농사를 하러 나가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구해 메고 내려오는데 (나무가 없어 깊은 산에 들어가야 했고 작고 마른 체격에 삼십키로 정도의 나뭇짐을 져야 했기에) 두 다리가 떨렸다. 아이들이 짝을 져서 주변 농작물을 훔치러 가기도 하고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올라가다가 굴뚝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할 때였다. 밀가루의 비율이 많은 죽을 주기도 했지만, 학원 자체적으로 식량을 해결해서 먹이라고 하며 식량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다. 굶어죽기보다 낫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먹기는 했지만 영양실조 등으로 많은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학원 뒷산에 있는 하얀 살구나무 뒷편에는 60명이 넘는 아이들의 시체가 묻혀 있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너무 배고팠고 죽을 것 같아서 학원을 도망쳐 나와서 다시 소매치기 생활을 했다. 도시든 시골이든 불빛 하나 없었고, 가족들이 자기 집을 팔거나 버리고 나와 거지로 나앉은 사람들도 많았다. 굶주림과 가난으로 끔찍한 상황이었으나 북한에서는 외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른 기준으로 세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여관방에 40명의 아이들을 가두어 놓기도 했다. 그 아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의 구타는 말로 표현하기 싫을 정도였다. 어린이는 나라의 왕이라고 외쳤던 북한의 현실은 그러했다. 집을 팔아 쌀과 바꿔 먹은 후에 시골로 향하는 사람들도 도시에는 많았다. 장사는 좀 나아진 후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적금이나 저축도 모르고 김일성 수령만 바라보고 국가에 헌신하던 사람들은 그저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 일가는 불멸의 신이 아니라 우리를 이용해먹기만 한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집안이 무너졌지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특히 내가 계모학원으로 간 이후에는 더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새어머니는 데리고 들어왔던 자녀 둘만 데리고 떠났고, 새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내 배다른 두 동생들을 아버지 혼자 맡게 되었다. 방법이 없으니 아버지는 집을 팔고 탄광 기숙사로 들어가 살았다. 국가단위의 기관에서 기숙사를 만들어 먹을 것을 제공해준 것이었는데, 일상적인 일자리가 없으니 사람들을 탄광이나 광산에 몰아넣은 것이었다.
하루는 방학 때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가 기숙사 문을 열었는데 두 동생과 아버지가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는데 인기척에 여동생이 나와 '오빠~?'하는데 그 얼굴이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결국 그 배다른 동생은 자기 엄마를 찾아 떠난 뒤에 지금까지도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다.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북한 당국은 김일성 우상화에만 돈을 쓰고 있었다. 만수대 궁전은 9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 전체가 3일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굶어 죽을 각오, 매맞아 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가 필요한 북한의 현실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교회를 가게 되고 사역장에서 신앙 훈련을 받다>
소매치기 친구들과 함께 3명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소매치기로 한 달 정도 돈을 번 후에 북한으로 돌아올 요량이었다. 6월 중순 쯤 두만강 물이 크게 불어났을 때였지만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수영은 웬만큼 할 줄 알았기에 무사히 온성군 남양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으로 들어갔다. 꽃제비가 흔한 북한의 시장을 생각하며 도문 남(南)시장에 들어섰는데 시장 아주머니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얼굴이 까맣고 누가 봐도 북한에서 온 아이들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기에 그분들의 선심으로 요기를 한 후에는, 중국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며 음식을 얻어 먹고 재워주기도 해서 지낼 수 있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한 부부가 한달에 70원(1원이면 북한에서 빵 5개를 살 수 있음)씩이나 준다고 해서 무작정 시골로 따라 가서 1년 정도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아주머니는 교회 집사님이었다. 하루는 집사님의 권유로 교회를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교회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기 싫은 걸 억지로 따라갔는데, 변방의 그 교회는 창고같은 집에 빨간 휘장에 빨간 방석에 십자가도 빨간색에, 온통 노인들만 계셔서 뭔가 잘못 온 것 같았지만 그렇게 교회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하루는 한국에서 선교사님들이 오셨다고 와 보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갔다. 내가 봐왔던 사람 중에 그분들 만큼 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점이 되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안아줬다. '영호야, 그동안 힘들었지?' 포옹에 익숙하지 않아서 거부감은 있는데 그 위로의 말은 참 따뜻했다. 그분들이 가시면서 ‘영호야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기도해주실 거야.' 하고 중국 돈 400원을 주고 갔다. 교회 오면, 선교사님을 만나면 돈을 주는구나 생각했었고, 그 때 필요한 건 돈이었기에 돈을 주니까 좋았다. 하루는 교회 전도원이 예수님의 생애라고 누가복음으로 만들어 놓은 영화를 보여주셨는데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에서는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시골에 있다가 전도사님이 저를 어느 과수원에 보내셨는데, 거기에서는 북한 사람 40~50명이 과수원 밑에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다. 임현수 목사님(캐나다 토론토 한빛교회)과 캐나다 한인교회에서 그때 정말 큰 일을 해주었다. 북한사람들을 도와주고 일을하고 돈을 벌어서 북한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시대에 교회와 선교사님들이 안계셨다면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인교회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오면 불을 켜놓고 밤새 찬양을 불렀는데 나도 찬양을 2개정도 배웠다. 그들이 사영리를 통해서 복음도 전하고 책도 전해주는데 무척 다양한 기독교 테이프와 책들을 보게 되었다. 그걸 통해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 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대해서 좀 배우고 싶어졌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선교사님들, 대학생들은 보아왔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상상도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먹고 사는 건 지장 없었는데 성경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이후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성경공부반(통독반,사역장)에 가게 되었다.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사역장에서는 약 3년 반 정도 있었다. 성경을 배우러 갔지만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는데, 어느 순간 가다 보니까 내 마음이 점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은 금식하며 성경을 통독하고 점심먹고 또 통독하고 또 말씀 암송하면 일과를 마치는 형식으로 빡빡한 일정을 보냈다. 매일 철야기도도 드렸다. 바닷가에서 밤새 기도했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돌아오는 기도와 말씀에 빠져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말씀을 배워 복음을 안고 북한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역장에는 파송받아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생각했지 민족 복음은 꿈꾸지 않았었는데, 전도사님이 나에게 민족이라는 멍에를 메게 하셨다. 참 힘들고 버거웠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다시금 내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북한의 회개와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사역장(통독반)에서 2년 6개월 되던 해 그곳을 책임지시고 헌신하시던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북경에서 열린 어느 집회에 가셨다가, 북경의 공원에서 철야기도를 하시다가 사모님이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사모님을 위해 모든 사역장이 삼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지만 사모님은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고 우리 사역장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한 두 달 후에 사모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북한 엘리트 출신인 사모님은 오빠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면서 김일성을 반대하는 모임을 하다가 가족이 흩어지고 사모님 혼자 도망왔기에 북한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보위부가 사모님에게 너는 당의 배려로 수많은 걸 받아서 대학까지 다녔는데 예수를 믿으면 되겠냐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했었다. 사모님은 ‘당과 수령은 선물과 의무교육을 줬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라고 전하고 북한에서 순교하셨다고 했다.
<북송, 보위부, 교화소... 고난의 시절에 함께 눈물 흘리신 하나님>
6개월 후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바닷가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수갑을 차고 인근 파출소로 연행된 후에 형제2명, 자매 3명과 함께 두 달을 감방에서 지낸 후에 중국 단둥을 거쳐 북한 신의주 보위부로 이송되었다. 조국의 배신자로 죄수가 되었는데, 보위부에서 이틀 뒤에 운동장에서 이른바 '일광욕'을 하고 있던 중에 '평남20' 넘버 차량이 들어오더니 평안남도 보위부라는 사람이 전도사님 이름을 불렀다. 전도사님은 평남으로 가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본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풀려났지만 그 이후로도 두 번 더 북송을 당해 총 3번 북송을 당했다. 2년 형을 받았을 때는 신입반장이라는 사람이 '그곳은 지옥이니 살아나가려면 살얼음을 걷듯하되 귀머거리 3년, 소경 3년의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다. 겨우 중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예전같지 않았다. 무자비한 색출이 계속되었다. 세번째는 북경(北京)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남조선 도주' 죄명이 씌워졌다. 북경에 갔다는 것은 남조선 대사관에 가겠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때 당시 우리의 구호는 성경을 배워서 북한으로 가자는 것이었기에 나는 정말 한국에 갈 꿈이 전혀 없었다.
함경북도에 있는 도 보위부에서 일 년 일 개월을 있게 되었는데 여러 보위부를 전전하는 동안 몸이 많이 상해서 그때는 37.5kg이 나갈 정도로 허약해졌다. 정치범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눈빛만 봐도 온몸이 저렸다. 하나님께 신음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왜 이렇게 죽어야하지? 나는 성경공부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한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죽어야하지? 하나님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물론 성경 공부를 할때에는 북한으로 복음을 안고 가야한다고 배웠지만 주님이 나를 지켜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느꼈다. 처음에는 원망, 불평이 없었지만 그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에는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든 큰 고통이 지속되면서, 왜 내가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나를 점점 시궁창으로 왜 몰아가시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도도 할 수 없었다. 반항을 하고 싶었는데 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밤이 되고 잠을 청하면 어디선가 모르는 찬송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이었다. 분명히 누군가 부르는 찬송이였다. '멀리 멀리 갔더니~'
도 보위부의 그들은 인간들이 아니었다. 고문을 할때마다 웃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두려움에 그들은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고문을 가하면 가할수록 육체는 고통이 따랐지만 내 영혼은 더욱 강해져 갔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꼈다. 핍박과 고통은 나를 더이상 얽매일수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 하나 있었는데 성경책이 그리웠다. 예전에 성경책을 읽으며 공부하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고통 속의 비참한 내 모습이었지만, 또 다른 나 자신은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무릎꿇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다른 모습임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보위부 타격대에서 소꿉친구와 마주쳤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생각했다. 그 친구는 계보가 좋은 집안이고 나는 노동자 집안이었다. 그는 승승장구해서 보위부가 되었고 난 죄수로 눈앞에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 친구 덕분에 많이 안 맞았다. 하나님이 친구를 통해서 나를 빼내셨다. 도 보위부는 풀려날 가능성이 99% 없는 곳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친구의 보증으로 1년 2개월 만에 보위부에서 풀려나서 안전부로 넘어가서 4년 11개월 교화형을 받았다. 교화소도 인권이 최악인 곳인데, 나는 교화소에 다시 들어갔다가 만기 석방될 때 몸무게는 60kg이었다. 살아 들어가서 죽어 나오는 그 곳을 죽어서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오게 된 것이다.
석방 후 2007년에는 중국을 거쳐 베트남, 캄보디아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분들이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했던 덕분이었다. 내게는 한국행은 또 다른 모험이자 하나님의 믿음의 시험이었다. 잡히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중국에서 이틀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데 욥기서의 말씀을 주셨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으로 몇달 몇일을 돌아서 들어오게 되었지만, 사람이 사람처럼 살아보겠다고 가다가 잡혀서 피터지게 맞고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에 그다지 기뻐할 수 없었고 오히려 너무나도 화가 났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이렇게 공평하지 않으신가?
<방황 끝에 복음 사역자로 거듭나다>
아픔이 커서 한국에 와서도 바로 신학을 하지 못했다. 악몽에 시달리고 술의 기운을 빌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거제도에 있는 대우 조선소에서 일을 하는 중에 어느 날 갑갑해서 나와 바닷가 바위 끝에서 기도를 하다가 다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났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다. 내가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했던 8년의 기간 동안 나 혼자 고통받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다. '영호야 가자'는 하나님의 음성에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는 생각에, 두 시간 가량 회개를 하고 내려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비록 그곳이 북한일지라도). 통일도 더욱 응원한다.
그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고 어떤 것도 막아낼 수 있는 전신갑주를 취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게 하신다면 못할것이 없다는 각오로 다시 일으켜주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일어나야 한다.
대한민국 교회뿐만 아니라 온세계 모든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어떻게 들어쓰시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북한에서 온 통일세대 탈북민들의 올바른 신앙을 준비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역은 기도와 말씀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탈북민들은 다른 교육 다른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남북한 사람들의 융합은 남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한을 많이 사랑하신다. 북한 정권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보니까 그 안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전도사님같은 사람들을 먼저 앞세워 보내셨던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자기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겠다고 순교했던 이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에 북한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크리스찬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통일은 어떤 사람들이 받을수 있냐면 말씀과 기도와 헌신으로 준비를 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교회당을 짓고 싶다. 못먹고 못입고 자라는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밥과 따뜻한 잠자리를 주고 싶고, 그들을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키우고 싶다. 이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비전과 사명이다. 이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길을 열어줄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신학을 시작하면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동생과 굶어 죽어간 이웃들, 따뜻한 밥을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던 이들, 왜 고난행군속에서 죽어야하는지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부족하지만 신학을 하고 있다.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탈북민 동포에게 기도와 물질로 섬겨 주시기 원한다. 그들이 당했던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 원한다. 이 땅에 와서 신학을 하는 이들, 교회를 개척해서 가는 북한 탈북민 목회자들을 섬겨주시라. 그들이 받은 상처는 무엇으로도 결코 치료할 수 없겠으나,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들이 받은 고통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은 결코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탈북민들과 함께 해주시면 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새터민들이 지은 교회와 함께 한다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고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신학을 하는 (북한)사람들이 100명 가까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면서도 공부를 하고 있다. 여러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관심만이 하나가 될수있고 아주 귀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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