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소개] 이옥 선교사
유니티미션 선교회 선교사
전)국제사랑재단 선교사
전)조선인민군 하사 (선전선동원)
* 책. 하나님이 이끄신 위대한 여정
* 우리 엄마 아버지, 벽지까지 뜯어 먹으면서 굶어 죽었습니다
[성경 본문] 로마서 9:1~3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코디언... 아버지께 배워 군대에서도 짊어지고 다녔고, 탈북 이후에도 함께 한 도구
내가 오늘 들고 나온 아코디언을 북한에서는 '손풍금'이라고 한다. 과거 조선인민군의 선전선동원이었던 내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 자리에 섰듯이, 이 악기는 과거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변하였다. (아코디언 연주~^^)
북한 신의주 지휘본부 경비대 000 2671군부대 소속 분대장이었던 나는 22년전 탈북하여 총신대 교회음악과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면서 해외의 북한노동자들을 섬기는 UMI(Unity Mission) 선교회에서 섬기고 있다.
고난의 행군이 가져온 비극, 그리고 탈영과 탈북
1998년 2월 중순 여군의 몸으로서 북한 땅을 탈영했다. 7년간의 군복무를 하였는데 군에서는 선전선동원으로 일했다. 모이면 선전하고 흩어지면 선동하는 역할이었다. 양친이 모두 교육자였으며 열성당원이셔서 우리 자매들에게 매우 엄격하셨기에 나는 모범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집에서 식사할 때마다 먼저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에게 감사했고 매주마다 비판하고 학습하는 생활에 익숙하게 살았다.
군복무 중이던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 수령이 서거했다. 처음에는 새벽 근무 중에 방송을 들으며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오열을 하며 뛰쳐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실감하고 졸도해버렸다. 수령님은 신적인 존재로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고, 수령님이 죽었으니 내 인생도 다 끝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친필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김일성 죽음 이후, 태풍 매미까지 겹치면서 북한에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300만명 이상이 기아로 죽었다. 군인은 배급량은 줄었지만 먹고 살 수는 있었기에 큰 불만이 없었다.
1998년 2월 중순경, 7년간 복무하고 있던 경비대에 부모님이 살고 있던 내 고향 (평안북도 천마) 동사무소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동무래, 아바지 오마니가 죽었으니 시신 확인하러 날래 오라” 군 입대 후 가족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나는 당일 휴가를 받아 고향마을에 도달했을 때 트럭에 십 여구의 시체를 싣고 있는 중이었다. 트럭에 올라 부모님의 시신을 찾았지만 굶어서 죽은 시체라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렇게 참혹한 시신 무더기는 처음 보았다. 내 나이 스물 한 두 살일 때여서 무서워 쓰러져 버렸고 부모님의 시체는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집단 매장 되었다. 굶어 죽는 것은 보통의 죽음과는 달리 20 여일 동안 살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한 후에 죽는 참혹한 일이었다.
(입대할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남동생이 떠올라서 집으로 뛰어 갔다. 집안은 그야말로 배고픔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흔적이 역력했다. 방바닥 장판과 벽지는 모조리 뜯겨 있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방 중앙에 불을 피워 땔감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방안 곳곳에는 대소변으로 인해 냄새가 진동했다. 대변을 핥아 먹은 흔적에 나는 통곡을 하고 말았다. 가족의 비참한 생활을 떠올리려니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군 입대 8년 동안 쌀밥 안주고 강냉이만 준다고 타령했던 죄책감에 사로잡혀 부모님께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코를 잡고 막대기로 썩은 이불을 들썩이는데 동생이 누워 있는 것이었다. 반가운 맘에 동생을 안았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입대할 때 봤던 그 키에서 영양실조로 성장이 멈췄음을 알고 그동안 배고픔과 굶주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요기는 할 수 있었던 내 삶이 죄스러웠고 내 식구를 굶겨 죽인 당과 수령을 위한 삶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남동생을 들쳐 업고 아버지의 출생지였던 중국 도문을 향했다. 군인을 검색하는 10호 초소를 피해서 산길을 통해 이동했으나 3박4일을 굶으니 기진하였다. 고향인 평북 천마에서 시작해서 자강도를 거쳐 양강도 회령 (두만강 하류)까지 이어지는 500km를, 천마산 고무산 백두산 등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다. 동생을 등에 업은 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샘물에서 물도 마시고 군수 차량이 흘린 강냉이를 주워 요기를 하면서 (산간지역 움퍽 파인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트럭이 춤을 추며 가고 있었다. 속력을 못 내고 천천히 달리는데, 옥수수 강냉이가 줄줄 떨어지는 것을 산속에서 목격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내려가서 쏟아진 강냉이를 흙과 함께 정신없이 주워 먹었다. 배를 채우고 강냉이를 주머니와 모자에 담았다. 오랫동안 굶주렸다가 강냉이를 먹었으니 목이 부어 이중고를 겪기까지 했다.) 포기하지 않고 한 달여(18일간_를 걸쳐 중국 도문과 인접한 회령의 두만강 앞까지 도착했다.
3월초여서 녹은 얼음이 둥둥 떠나니는 때였는데 경험이 없어 무작정 두만강의 폭이 200미터 정도나 되는 곳으로 뛰어 내려 허우적대며 사투를 하다가 의식을 잃은 채 흘러 내려가 결국은 중국 쪽 뭍에 도착했으나, 그 과정에서 남동생을 잃고 말았다. 슬픔 속에 부르짖으며 날뛰다가 탈진하였다. 겨우 조선족 가정에게 구조되어 링거를 맞는 등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고 통성명을 통해 도문에 사시던 아버지의 형제 자매들까지 만나게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풍각쟁이 아버지의 재주를 이어 받아 아코디언을 연주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 보자는 삼촌의 권유로 과외를 시작해서 돈을 벌기도 했다. 또 남한에서 나온 선교사 목사님을 만났으나 처음에는 정신병자처럼 보였을 뿐 그 얘기들과 기도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목사님의 가르침은 늘 동일했다. “북한에서 가르치는 남한에 대한 사상교육은 사실과 틀리다. 김일성이 남침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를 구원해 줄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성경을 같이 잃고 찬송도 함께 부르면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며 날마다 내게 찾아와서 전하는 목사님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이야말로 당장 총살감이야”고 했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내 쫓고 문을 쾅 닫기까지 했다. 그러나 5개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목사님이 찾아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찬양 테이프를 전해줬는데, '윤형순 찬양' 테이프에 있는 '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 발...'이라는 노래(곡명: 예수님 지신 십자가)의 멜로디가 북한 영화의 멜로디와 똑 같아서 최애곡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최악의 순간에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구원받다
그해 4월에,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원에서, 감히 탈북자로서 아코디언 학원을 하다가 조선족의 밀고를 당해, 도문시 공안부에 끌려가서 북송될 상황이 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부유하게 지내던 삼촌들과 고모들이 구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외면한 것이었다. 삼촌과 고모들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복수심에 발광하다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피투성이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고 자포자기했다. 그 때 내 최애곡 찬양(예수님 지신 십자가)의 멜로디가 떠올랐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가사까지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 찬양이 살아 움직였다. 내 아픔이 예수님의 아픔과 동일시되었고 예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평안을 느꼈다. '예수님'을 스스로 부르짖으며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나를 살리실 분은 내 친척이 아니라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옥이야, 너는 죄인이다.'는 음성을 들었다. 그 감옥 안에서 내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방언의 은사까지 받았다. 오후 2시에 북한으로 호송하는 차로 끌려 가는데 탈북자들을 개/돼지처럼 다루는 것을 보고 당하며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북송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나는 현역 군인이므로 열외되어 재신문을 받게 되었다. 국장 동지가 내 생김새와 나이가 그의 딸과 똑같다며 껴안고 우는 것이었다. 신문이 끝나고 아픔에 신음하며 의식을 잃었는데, 누군가 깨워 눈을 뜨니 바로 그 국장동지였다. 때는 이미 칠흙같이 캄캄한 밤이었다. 족쇄를 풀고 밖으로 빼내어 주더니 “빨리 도망가라, 도문을 떠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끼며 탈옥했다. 그 때 머릿속에 떠오른 연락처는 바로 그토록 박대했던 선교사님이 남겨준 전화번호였다. 그로 인해 선교사님께 전화를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중보기도로 내가 구원 받았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줄로 알았던 동생도 살았고 그 선교단체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와 내 동생을 살려 주신, 영육의 구원함을 동시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맺는 말
한반도가 분단된지 76년이 흘렀다. 한반도의 반쪽은 아직 흉악의 결박에 매여 있다. 한국 교회에는 민족 복음화의 사명이 있다. 한반도의 복음 통일의 사명이 있다. 다니엘처럼 깨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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