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프로필] 지선 전도사 (본명: 김지선)
- 찬양사역자
- 건신대학원대학교(대전광역시 소재) 신학과 찬양인도학 교수 https://www.alu.ac.kr/Board/Detail/1231/1312
- 극동방송 '내 삶의 노래로' 진행
- CTS TV '내가 매일 기쁘게' 고정 패널
- 전) 대전시립합창단 소프라노 단원 (10년간)
*학력 :
-목원대 성악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공연예술뮤지컬과 졸업
-facebook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396769253
-새롭게 하소서 간증 링크: https://youtu.be/hJeFquH2sEw
[본문] 히브리서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오늘 이 시간에 모든 분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간증을 이 찬양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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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라] https://youtu.be/1dGIO1cW-2E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돌아보니
짧은 내 인생길 오직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내 평생 살아온 길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다 함이 없는 사랑
달려갈 길 모두 마치고
주 얼굴볼 때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내 평생 살아온 길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다 함이 없는 사랑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내 평생 살아온 길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다 함이 없는 사랑
달려갈 길 모두 마치고
주 얼굴볼 때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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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간증을 통해 여러분들의 질병과 아픈 곳들이 치유되기를 원한다.
나는 9년전부터 찬양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다. 작년에 개설된 신학대학원에서 찬양사역에 대한 강의도 하고 있다. 대전에서 왔는데 클래식 해설도 하고 있고, 유아들을 위한 음악 설명도 하고 있다. 뮤지컬 음악 감독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TV 미스트롯에도 나왔다. 영탁의 노래 앞부분의 피처링을 했다.
20여년 전, 곧 15세 때부터의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생각한다.
KBS 관현악단의 플루티스트였던 아버지가 그만 두신 후에 어머니가 경제를 맡으시며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 어느날 잠에서 깨었을 때 어머니가 얼굴에 상처를 입고 변기 위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본 적도 있는데, 아버지의 의처증과 가정 폭력으로 인해 엄마는 가출했고 (부모님은 이혼하셨다.) 그로부터 엄마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양육을 포기하셔서 동생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가서 친척집 곧, 큰아빠 집에서 살아야 했다. 엄격하신 큰아빠로 인해 억울한 일도 있었고, 학교에서는 서울에서 전학왔기에 왕따도 당했고, 사촌의 괴롭힘도 당했다. 어느 날 영양실조에 걸려서 1년 간 코피를 계속 흘리기도 했다. 이질, 장티푸스 등 온갖 질병을 안고 살았다. 지금도 왼쪽 귀에 난청이 오기도 한다. 항상 배고팠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내내 신경성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고 코피를 수시로 흘려 자주 쓰러지는 나를를 지켜보던 음악 선생님이 아는 작은 교회의 사모님에게 나를 데려갔다. (음악 선생님의 친구인 그 사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응답을 받았는데 어떤 아이를 하나님이 보내준다고 했어. 내가 걔한테 공짜로 레슨을 해야 하는 운명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음악 선생님이 나를 연결시켜 준 것이었다.) 그렇게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주위의 사랑을 받으며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게되었다. 그 사모님은 일천번제 예배를 드리면서 레슨을 해줬다. 그 때도 하나님은 목사님의 하나님이었을 뿐 내 하나님은 아니었다.
이렇게 1년을 레슨 받은 덕에 목원대 음대에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후 큰집에서 독립했으나 대출을 받는 등 형편이 어려워서 휴학을 하려 했으나 All A+의 성적표를 받고 음대 전체 수석으로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교수님들의 경제적 지원, 유학 준비 등의 도움도 받았다. 어떤 교수님은 베를린에 기숙사까지 다 마련을 해주셨다. 유학행 티켓까지 끊고 나서 나는 은혜받은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고 살았는데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은혜'가 내 체험이 되고 믿음이 되었다. 선생님의 하나님, 목사님의 하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었다.
이렇게 이끌어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서 유학 가기 전에 뜨겁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1세에 처음으로 새벽예배를 갔는데 나를 누군가가 안아주는 것 같은 따뜻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가?’라는 생각으로 새벽예배를 시작해 하나님이 내 창조주시이심을 인정하게 됐고, 이후 7일, 14일, 40일 작정을 하여 새벽기도에 매진하게되었다. 그렇게 365일을 기도하다가 유학을 안 가게 됐다.
교회 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대전 시립합창단원 모집을 하는 곳에 접수를 받으러 갔다가 경험 삼아 나도 원서를 제출했다. 1차 합격 후에 새벽 예배를 드렸는데 악보 2장이 떨어졌고 그 곡을 집중 연습을 해서 고음이 잘 나는 하이 소프라노로 대전 시립합창단원으로 합격했다. 별정직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급여가 있어서 집도 얻고 살림도 장만하고 내 마음대로 식사도 할 수 있고 냉난방도 조절할 수 있는 첫 경험을 했다.
같은 교회에서 드럼을 치던 교회오빠가 청혼을 해서 3개월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대중음악을 하던 남편은 내 권유로 세상 음악을 그만 두고 하나님께 몰두 했다.
2011년에 5살, 2살 두 명의 아이들을 두고 있을 때였는데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커서 하나님을 보기를 사모하고 기도하던 중에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먼지 같은 나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아이들에게 그런 감동을 편지로 쓰기도 했다. 필사 중에 기도 제목을 적었는데 그동안은 일부러 회피하던 '고난'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이때까지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진짜 고난이 아니었음을 성경을 통해 봤습니다. 하나님 이제 진짜 고난을 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왔다. 그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고난이었는데 진짜 고난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런 기도를 드리고 계속 합창단에 출근했다. 때로는 어깨가 너무 아파서 ‘하나님 여기 좀 주물러주시면 안 돼요’라는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주물러주시는 느낌을 받으면서 출근을 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또, 철야 예배를 드리려고 앉아 있는데 말로만 듣던 것처럼 교회 문에서 불덩이가 내게 돌진해오는 환상을 보고 집으로 도망가게 되는 경험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두 아이가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원망이 많았던 엄마(서울에서 다른 아저씨와 재혼한 상태였음)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집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서 엄마가 내려오셨다. 엄마는 청소하시고 나는 두 아이 목욕을 오랜만에 시키고 있었다. 첫째 아이부터 목욕을 시키고 방으로 내보내고 막내를 씻기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들 아빠가 드러머라 아이가 젓가락을 가지고 자주 놀았는데 그날 그 젓가락을 콘센트에 꽂아 감전된 것이었다. 아이는 물기로 인해 온몸이 검게 그을리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몇 십분 뒤 아이는 다행히 눈을 떴으나 그 후에 온 구조대원이 보고는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 손가락 10개는 연기가 나는 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다. 금방 좋아질 거라 믿었으나 병원에서는 열 손가락 신경과 관절이 다 끊어져 앞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상태로 살아난 것을 의사들도 처음 보고 당황할 정도였다. 그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 이게 뭐예요?’라는 기도만 나왔다. 상처가 깊어서 소독만 3일을 했는데 은찬(큰아들)이는 너무 괴로워했다. 합창단에 육아 휴직을 내고 아이의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몸 안에 전기가 관통을 하고 갔기 때문에 계속 사진만 찍으며 뇌와 장기를 검사했다. 열 손가락 모두 신경과 관절이 손상되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며칠 만에 병실을 배정 받아 입원을 했는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응답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자에게는 어떤 상황과 환경도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병실에서 2주쯤 지났을 때 아무 말씀 없던 하나님이 그날 처음으로 평안의 바람과 따뜻한 성령의 바람을 주셨다. 필사한 구절들도 다 떠오르며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그리고,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위로해 주셨다. 나을 때까지 이 성, 곧 성심병원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아이는 상태가 심각해져 갔다. 네 번째 손가락은 바스러져서 한마디가 사라졌다. 뼈 한 마디가 말라서 의사 선생님이 후~하고 부니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손가락들도 뼈가 보이는 상태였다. 의사들은 남아있는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 엉덩이 살을 이식하고 손가락을 배에 꽂아 재생을 시도했다. 전신 소독을 위해서 전신마취를 이틀에 한 번씩 20번이 넘도록 했다. 하루는 전신마취하고 하루는 금식하며 지냈다. 그게 아이가 다섯 살 때 겪은 일이었다.
은찬이의 일자로 누워 있는 생활이 계속 되었다. 검은 봉투에 대변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성경 필사로 인해 은혜를 받았기에 그 상황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계속 찍으며 일기를 썼다.
어느 날 아이가 마취를 위해 또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엄마, 나 혼자 안 들어갔어요. 내 옆에 천사 네 명이랑 예수님이 있었어”라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때서야 ‘하나님이 은찬이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다. 수많은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말해주었어도 그 말을 믿지 못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고 아빠를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했다.
은찬이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엄마 나 소풍 온 것 같다. 엄마랑 하루 종일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소풍이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소풍이란 말에 ‘내가 소풍 왔는데 한 번도 즐기지를 못하고 소풍인데 아빠 용서 한번 못하고 살았구나’라는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우리들을 잠깐 이 땅에 소풍을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아빠가 단번에 용서가 됐다고 한다. 미웠던 마음이 하나도 없고 너무 보고 싶어졌다. 엄마도 너무 이해가 되었다. 엄마의 인생이 있는데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화상 환자들을 놓고 찬양을 했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누워있던 환자들의 영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안정적인 합창단을 버리고 찬양사역자가 됐다. 오직 ’영혼을 살리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난 속에서도 내가 항상 웃었고 그로 인해 은찬이도 항상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은찬이는 퇴원하고 나서 집에서 손가락이 다 살아나는 기적을 맛보았다.
대전에 내려가면서 휴게소에서 핫바를 사줬는데 은찬이가 직접 쥐고 먹는 것이었다. 아토피를 통해서 오른손 뿐만 아니라 왼손까지 살아났다. 기도의 응답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붕대와 마스크로 가려져 있을 때도 응답을 믿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왼손 약지가 여전히 약한 것도 십자가를 붙들게 하기 위한 통로임을 믿었다.
퇴원 후에 남편을 통해 송경민 작곡가와 함께 음반을 내게 되었다. 아빠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아빠를 용서했다. 23년만의 화해였다.
그 후에는 엄마와 양부가 스스로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는데 양부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도 모셔서, 가족이 다시 모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 음반이 나오기 전에 우리 가정에 회복의 복을 주셨다.
결핍을 은혜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송경민 작곡가의 '은혜'라는 찬양을 나누겠다. https://youtu.be/pZuW2CV0mXY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은혜였소
---+---
우리의 마른뼈같은 인생을 하나님은 은혜로 회복시켜 주신다.
아이빅밴드의 송경민 작곡가가 제작해 주신 '소풍'이라는 곡의 뮤직 비디오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날마다 우리 3남매를 통해 기적을 체험한다. 우리는 '가족'이다. 다니엘 세이레 기도회에 참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도 주 안에서 가족이다.
https://youtu.be/LCWouAbaHfs
마지막 찬양으로 맺으려 한다.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살리라~ 아멘!"
[적용기도]
우리는 영적인 소풍을 나온 것 같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복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고 가족의 소중함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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