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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영사전

Others/이것 저것 2022. 2. 4.

학창시절, 영어를 처음 배우며 서재필 박사나 안창호 선생 같은 분들은 한영사전이나 영한사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영어를 배웠을지 궁금해 했었다.
제임스 게일 목사님을 알게 되면서 1800년대 말에 언더우드, 헐버트, 게일 선교사님들이 함께 노력을 다해 최초의 한영'자전'을 만들었고, 그 후에 게일 선교사가 몇 차례 더 개정 증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구한말 조선인들의 도움도 컸고, 역시 사전의 출판 자체는 일본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고향 익산 근처에 동학혁명으로 유명한 삼례가 있는데, 그곳에 예술촌/책마을이 생겼고 그 곳의 책 박물관에서 있는 자료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한영자전(韓英字典), 1911년(초판 1897년) 힌국 최초 한영사전 -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지은 한영사전

요꼬하마 푸쿠인 출판사(The Fukuin Printing co. LTD.)
x+1154면, 15.2×22.5cm

소개 도서는 선교사 게일이 1897년 양시영(梁時英) 양기탁(梁起鐸, 1871~1938) 부자의 도움으로 편찬한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 1911년 개정판이다.
초판은 서양의 알파벳 순서로 단어가 배열되었으나 개정판에서는 한글자모의 순서를 따랐다.
또 초판의 제2부 중영사전을 완전히 삭제하고 이름에 걸맞게 한영자전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에 따라 초판의 한자색인도 없앴다. 부록의 배열방식도 초판에서는 일본 중국 한국의 순서로 역대 왕조 연표가 작성되어 있으나 개정판에서는 한편에 중국(지나) 한국(죠선) 일본의 순서로 나열되어 보기에 편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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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을 기록한 푸른 눈의 사람들

1. 월리암 그리피스(William. E. Griffith)(1843 ~ 1928)
자연과학을 전공했으며 서구 국가의 자연 과학의 우수성을 깨달은 일본 메이지 정부의 초청으로 일본에 와서 도쿄대에서 물리와 화학 등을 가르친 미국인 교수였다. 동시에 일본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 영향을 준 조선을 알아야 하기에 조선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 서구인들의 조선 연구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가 조선에 대해 집필한 『은자의 나라』(1882)는 당시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거나 혹은 미신과 무능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음도 드러나기에 유럽인들의 조선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낮은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었던 때 이 책을 저술하였기에 다소 사실을 왜곡한 부분도 있으며 후에 일본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2. 퍼시발 로웰(Percival Lowell)(1855~1916)
미국인 사업가이며 천문학자이다. P. Lowell이 일본을 여행하던 중 조선에서 온 보빙사 일행(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등)을 만나고 주일 미국 공사의 요청으로 미국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보빙사 일행은 로웰의 고향인 보스턴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후에 이를 보고 받은 고종은 로웰을 국빈으로 초대했다. 사진기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3년 12월 조선을 방문해 3개월간 머무는 동안 이 때 고종의 어진을 찍은 사진을 비롯, 그가 찍은 한양의 사진 25매를 수록해 2년 후인 1885년에 백과사전식으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라는 책을 펴냈다. 'morning calm'(조용한 아침)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제목으로 썼다.

3.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며 교육자이다.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로서 서재필과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이기도 했다. 1886년 조선에 입국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조선 학생들의 외국어 습득 능력 극찬했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되어 한글에 띄어쓰기, 마침표 등 부호 도입하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면 헐버트 박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할 정도로 안중근 의사가 존경하던 인물이며 친한파 인사였다. 1905년 고종의 밀서 지니고 미국 대통령 면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바도 있다. 『한국역사』, 『대한제국 멸망사』 등을 저술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능통했다. 1906년 헤이그 밀사 파견 건의하고 밀사보다 먼저 헤이그로 가서 합방의 부당함을 알렸다. 1949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차 40년 만에 입국했으나 7일 만인 8월 5일, 누적된 여독과 노환으로 서울에서 별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영면했다.

4. 헤세 바르텍(Ernst Von Hesse-Wartegg)(1851~1918)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이다. 작가이며 여행가였다.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894년 부산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가 조선에 입국한 1894년 정월에는 동학농민운동, 6월에는 갑오개혁, 그리고 일본군의 경북궁을 점령, 그리고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국이었다. 『조선, 1894 여름』(1895)을 저술해 독일에서 발행했다. 이 책에서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많지만 조선인들의 우수성도 잘 묘사되고 있다.

5. 세비지 랜도어 (A. H. Savage Landor)(1843~1928)
영국화가이며 인종학자였다. 1895년에 조선을 방문했다. 조선을 포함한 중국, 일본 등 극동뿐만 아니라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미술가답게 여행하며 늘 화구를 들고 다니며 스케치를 했으며 그가 저술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도 두 차례(1890년에도 조선 방문)의 조선 여행 동안 보고 느낀 것들을 직접 스케치한 삽화가 곁들인 책이다. 랜도어는 이 책에서 조선인들의 용모에 상세한 인종학적 묘사를 하며 조선의 당시 풍습과 문화에 대해 사실주의적 묘사와 더불어 주관적 느낀 점을 기록하고 있다.

6.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
영국 여행가이며 지리학자였다.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이며 20대에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30대에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의사의 권유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40세가 넘어 지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878년에 일본 북해도 여행한 후 중국, 동남아 등 여행하기도 했다. 51세라는 늦은 나이에 10살 연하 의사와 결혼했지만 5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기도 했다. 1892년 왕립협회 화원이 되고 1894년 2월 말, 조선인들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격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조선에 입국 후 3년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는 등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한반도를 답사한 후《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1897) 저술했다.

7. 제임스 게일(James S. Gale)(1863~1937)
케나다 선교사이며 한국학 학자였다. 서울 종로 5가 소재 연동교회 초대 담임 목사 역임했다. 토론토 대학 졸업 후, YMCA 지원으로 조선 선교사로 1888년 입국했다. 처음엔 부산서 전도활동 하다가 1892년부터 서울서 활동했다. 1889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 전도 여행했다. 한국어에 능통해 성서공회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며 최초의 한영사전 펴내는 공헌을 했다. 구운몽,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한국의 고전을 영역해 서방에 알리는 등 문학 작업에도 큰 기여를 했다. 아울러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결정했다. 서울 연동교회 1대 담임목사역임하고 또 후에 정신여고 전신이 된 연동소학교 세워 여학생을 모집해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선, 마지막 10년의 기록』(Korean Sketches) (1898)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8.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1870년~1958년)
미국의 여행가이여 사진가, 영화 제작자였다. 시카고대 사진학과 교수이며 1901년 부산을 경유해 8월 제물포에 도착해 경인선을 타고 서울에 입성해 구한말 조선의 풍경을 영화로 기록해 조선에서 최초로 영화를 상영했다. 그가 1901년에 출간한 Burton Holmes Travelogue (『버튼 홈즈 여행기』)는 열 권의 여행 기록서로 이 중 일본 여행기와 함께 수록된 제10권에 수록된 것이 ‘Seoul, the Capital of Korea’라는 제목이다. 이 서울 여행기가 국내에서 『1901년 서울을 걷다』로 번역해 출간되었다. 홈즈는 조선에서 최초로 영화를 촬영하고 상영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가 여행하며 촬영한 슬라이드와 해설을 통해 강좌를 열기도 했다. 한편 외국인으로서 조선 역사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사실과 다른 부분도 발견된다.

9. 지그 프리드 켄테(Sigefroide Genthe)(1870~1904)
독일인으로서 독일신문 아시아 특파원이었다. 1901년 조선에 입국했다. 『하멜 표류기』(1668)와 『조선교회사서론』(1874)을 통해 알려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정보는 조선이 더럽고 불결하며 조선인은 미개하고 거짓말하며 풍속이 부패하다는 정도. 그러나 켄테는 조선을 종행무진하며 조선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와 풍속을 경험한 결과 이런 사실이 왜곡된 것임을 적극 해명하고 한국인의 정서와 풍물을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한라산 등반해 높이가 1950m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가 조선에서 남긴 발자취는 『신성한 나라 조선』(1905)에 수록되어 있다.

10. 멕킨지(Fredric Mckenzie)(1869~1931)
스코틀랜드계 케나다인으로서 런던 데일리 메일의 아시아 특파원 겸 종군기자였다. 1904년 일본 육군의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러일전쟁 취재차 조선에 입국했다. 1906년에 조선에 재입국해 1908년까지 활동하며 의병의 활약상을 취재해 서방 세계에 알렸다. 1919년에도 조선을 방문, 수원 제암리 사건을 목격하고 일제가 일으킨 학살사건임을 널리 보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조선의 비극』(190)(The tragedy of Korea)를 남겼으며 이 책속에 특히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의병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11.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1870 ~ 1956년)
독일신부이다. 1911년 처음으로 조선 입국 후 4개월간 머물면서 조선인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기록과 사진으로 남겼다. 1910년에 순국한 황해도 신천군 소재 안중근의사 본가를 방문, 친지들과 찍은 사진을 남겼다. 조선을 떠날 때는 “사라져가는 이 나라를 향해 우리는 애써 ‘대한만세’라고 작별인사를 보낸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450쪽의 글과 290장의 사진을 수록한 책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겸제화첩 수록이 됨)를 출간했다. 그 후 14년만인 1925년에 다시 조선을 방문해 대략 4개월간에 걸쳐 조선의 풍습과 문화를 촬영해 무성영화로 만들고 본국에서 상영하며 조선과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회의 활동을 알리기도 했다.

12. 엘리자베스 키쓰(Elizabeth Keith)(1887~1956)
영국인 화가이다. 당시 조선의 문화와 풍습 등을 수채화와 판화로 작품을 남겼다. 일본에 거주하는 언니 엘스펫(Elspet)과 형부의 초청으로 일본에 두 달간 머물 계획으로 1915년 일본에 입국했다. 언니 내외가 귀국하기 전, 조선엔 삼일 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말에 입국, 조선인의 풍습과 문화를 수채화와 목판화로 남겼다. 조선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1921년과 1934년 서양화가로서는 최초로 전시회를 가졌으며 이를 토대로 Old Korea - The Land of Morning Calm (『옛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946)을 펴냈다. 이 책은 동생인 키쓰가 그림을 그리고 작가였던 언니 엘스펫이 글을 쓴 공동 저서물이다. 언니와 함께 키쓰는 조선에 30년 넘어 생활한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도움으로 조선 구석구석 돌며 조선의 일상생활 그렸다. 미국의 한 고서적에서 키쓰의 화집을 송영달교수가 발견하고 이를 한글판으로 출간했다.

13. 선교사들
 
1)아펜젤러(H. G. Appenzeller)(1858~1902)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서 배제학당 설립자이다. 처음엔 인도 선교를 원했지만 조미통상 수호조약의 결과 조선에 미국인의 선교가 가능해지자 1885년 4월, 임신 2개월된 아내(태중의 아이가 딸 엘리스 아펜젤러, 후에 마지막이자 6대 이화여전 교장), 언드우드, 스크랜튼 모자 등과 함께 제물포로 입국했으나 갑신정변 후의 불안한 정세로 아펜젤러 부부는 요코하마로 되돌아가 7월 29일에 다시 조선 입국했다. 나이 27세 때에 작은 학당을 설립, 처음엔 2명으로 시작, 후에 20명으로 늘어나자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 하사했다. 언더우드, J. S. 게일 등과 함께 성경 번역 참여했다. 1902년 배편으로 목포로 가는 도중 배의 침몰로 군산 앞바다에서 익사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묘로 영면했다.

✱배재학당: 1885년 8월 세움. 1885년 7월에 서울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 B. 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허물어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1886년 고종이 ‘배제학당’이라는 이름을 명명한 최초의 남자 중등 사학 기관이다.

2)언더우드(H. G. Underwood)(1859~1916)
런던 출생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내한 3일 만에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1886년에 고아학교를 세우 후에 경신학교와 1915년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1887년에는 황해도 소래, 평양, 의주 일대 전도여행을 했다. 새문안교회와 기독교 서회 설립하기도 했으며 1889년에는 선교활동에 도움이 되는 「한국어문법」과 또 189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간행하기도 하며 성서 번역 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1900년에는 YMCA를 조식하는 등 조선의 사회 개혁운동에도 헌신했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사망. 언더우드의 외아들을 통해 선교 사역이 4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3)매리 스크랜턴(Mary F. B. Scranton)(1832~1909)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남편과 사별, 53세에 의사인 외아들 스크랜턴 내외와 함께 1885년 5월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여성 선교사이다. 정동에 정착, 19채의 한옥을 매입해 학교를 설립했으나 1년 동안 학생이 없는 실정이었다. 1886년 5.31일, 단 한 명으로 영어 수업 시작할 정도로 학생 구하기기 어려웠다. 당시엔 여성의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이 오늘날 이화여자 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 창립일이다. 1887년 학생수 7명으로 증가했다. 200평 규모의 기와집 교사 완공되어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친필 교명을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 되었다. 당시엔 남녀가 서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할 때였고 특히 남자 교사가 가르친다는 소문에 딸을 가진 부모들이 꺼려 휘장을 쳐 교육을 할 정도여서 여성만의 교육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삼일소학당,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 등을 세우며 한국 개화기 교육에 공로가 대단히 크다. 이화학당 초대 교장 역임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시초로 인종 받고 있다. 1887년에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녀관을 세웠다. 아들 윌리엄과 함께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상동감리교회를 세웠다. 1909년 10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보구녀관: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과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여자 환자들을 위한 의료 기관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1887년 10월 정동에 설립한 조선 최초의 근대식 여성 전용 병원으로 시병원의 별채에 한옥을 개조하여 설립했다. 긴급 파송된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2년간 진료 후 건강악화로 귀국, 그 후 로제타 셔우드 홀이 진료를 맡으면서 최초 여성 의사인 박 에스더를 양성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과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다. 고종이 ‘보구녀관’으로 이름을 하사했다. 1893년에는 동대문 분원을 설치, ‘볼드윈<조선여성의료사업을 위한 기부자> 시약소’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이대의과대 부속병원의 기초가 되었다.

4)월리암 스크랜턴(William Scranton)(1856~1922)
메리 스크랜튼의 아들이다. 예일대 졸업 후 뉴욕 의대를 졸업했다. 1884년 여름, 일본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를 통해 조선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 허락한다는 소식 듣고 선교사 적극 검토하던 차에 동아시아 감리교 선교 책임자였던 선교사 매클레이에 의해 장티푸스 앓은 후 선교사 되기로 결심한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아펜젤러 부부, 어머니와 함께 도착했으나 마치 갑신정변으로 혼란하였기에 다시 요코하마로 건너가 수신사 박영효에게 조선말 배웠다. 한 달 뒤인 5월에 조선 입국했다. 처음엔 알렌의 광혜원에서 6주간 잠시 의사로서 근무, 이후 1885년 자신의 집을 개조해 의료 활동 시작했다. 1886년 의료 환자가 늘어나자 1887년에 고종은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어머니 매리 스크랜턴은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동대문에서 여의사 메티 하워드가 진료 보는 부인과 전문 병원인 보구녀관(이와여자대학 부속 의과대학 전신)을 설립했다. 시병원 확장 이동해 상동병원으로 개칭했다.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1922년 별세,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병원: 원래 광혜원의 후신인 제중원이 왕립의료기관으로 출발했던 것과는 반대로 시병원의 출발은 민간병원으로부터 시작했다. 조선에 입국한 월리암 스크랜턴은 광혜원에서 대략 6주간 알렌을 도운 후, 1885년 9월 정동에 가옥을 마련해 진료를 시작해 이듬해 동네 이름을 따서 정동병원이라 한 것이 시병원의 시초이다. 초창기에는 환자를 찾아다녀야할 정도로 빈약했다. 정동병원의 첫 환자는 콜레라로 버려진 여인과 네 살 짜질 아이였다. 치료 후 여인은 스크랜턴 여사의 집안일을 도왔고 아이는 이화학당에 보냈다. 이 후 명성이 커지고 환자가 늘자 1887년 나라에서 ‘시병원’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1888년 12월엔 애오개 시병원의 분원인 시약소(약을 배치하고 경미한 환자를 돌보는 장소)도 생겼다. 스크랜턴이 시병원과 애오개 시약소를 오가며 환자를 돌보았다. 1894년에는 정동의 시병원을 1890년에 설립된 상동병원과 통합해 이전했다.


5)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1865년~ 1951)과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1893~1991)
의사이며 동시에 선교사로 1890년 10월 부산에 도착,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 최초로 이화학당 보구녀관에서 2대 책임자로 역할하며 학생 5명에게 최초로 여성 의학 교육을 시작해 당시 통역을 하던 박에스더가 조선 최초의 양의이자 여의사가 되도록 지원해 그 첫 열매를 맺었다. 함께 의료 선교하던 남편 윌리암 홀이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의료구호활동 하다가 1894년 11월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자 로제타 셔우드는 갓난 아기이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박에스더 부부도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로제타 셔우드는 1897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세웠다. 후에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돌아온 박에스더와 함께 평양에서 진료를 보았다.

1894년에 평양에 평양여맹학교를 설립, 맹인을 위한 점자를 조선어에 맞게 개발해 최초로 사용했으며 평양외국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의과대학 전신)를 설립하며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등 총 43년간 조선 여성 교육과 의료 사업에 헌신했다. 선교하며 만난 의료 선교사 남편 제임스 홀 그리고 5세에 풍토병으로 죽은 유복자 딸과 함께 그녀의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영면했다.

한편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로제다 셔우드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요양소를 설립해 어머니의 선교 계승자가 되어 결핵 퇴치에 힘쓰고 조선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최초로 발행한 바 있으며 1984년 92세의 나이에 휠체어로 고향 서울을 방문한 적 있다. 1991년 벤쿠버에서 사망했지만 또 그의 유연대로 부모님과 누이 동생이 영면하고 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1992년 영면했다.

6)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서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직전 1884년 조선에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입국해 미국 공사관 의사로 근무 중 갑신정변을 겪고 명성황후의 조카인 수구파 민영익을 치료해 목숨을 건졌다. 이런 인연으로 고종에 건의해 1885년 왕립 병원 광혜원을 설립했으며 1887년엔 워싱턴주제 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역할하며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는 등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1890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미국 공사관으로서 본격적인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일본을 규탄하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파면되어 본국으로 귀환해 여생을 마감했다.

✱광혜원과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
알렌이 고종에 건의해 1885년 4월에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며 2주 후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건물은 갑신정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홍영식(우정국 초대 총판)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이용했다. 환자수가 급증함에 따라 알렌은 당시 감리교 선교사였던 스크랜턴 W. B.와 의료 선교사 헤론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진료 업무가 커지자 한성 남부 동현 왕실 부지로 자리를 옮겼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 격랑의 정국 속에 운영이 어려워지자 제중원의 운영권은 조선 정부와 협상 끝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새로 파견된 영국계 케나다 의사이며 선교사인 에비슨에게 경영권이 인도되었다.

에비슨은 1893년에 조선에 입국해 1935년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40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구한말 조선의 병원 설립과 의학의 기틀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비슨이 역할을 한 이 때부터 제중원은 의료 활동과 더불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안식년을 맞아 케나다로 돌아간 에비슨의 노력으로 1899년 미국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당시 1만 달러)가 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1904년에 서울역 앞에 현대식 건물이 새로 신축 완공되어 세브란스 병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1962년 신촌에 병원과 의과대학 건물을 완공해 이전했다. 광혜원을 설립에 큰 공을 세운 이는 알렌이었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게 한 이는 바로 에비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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